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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목
한승오
벼이삭 누렇게 출렁대는 가을. 저 너머 콩잎을 찾아 고라니가 논을 밟고 오간다. 어제 남긴 발자국 그 자리에 또 오늘의 발자국을 남기고. 어제와 똑같은 길을 맹목적으로 고집하는 내일의 사람처럼.
빨갛게 석양을 잠재운 지평선이 논 위에 가만히 내려앉는 저녁. 불쑥 고라니 한 마리가 논 속 평화로운 수평을 뚫고 용수철처럼 솟구친다. 길 잃고 허둥대는 발걸음이 벼를 짓밟고 혼란스럽게 산을 향해 달린다. 길 아닌 두려움에 선 인생처럼.
막 떠나 고라니의 자리. 벼 포기 얼기설기 깔아 만든 하룻밤 잠자리. 야생의 고린내가 훅 다가온다. 도무지 가까이할 수 없는 저 먼 냄새. 도무지 멀리할 수 없는 이 가까운 냄새. 삶의 도정에 남겨놓은 내 치부처럼.
호기심의 첫걸음이 내딛은 길을 따라 딱딱한 길로 굳어버린 습성. 노루목. 고라니는 이 길을 다시 오리라. 죽음마저 불사하는 지독한 어리석음으로. 인생의 노루목을 되새김질하는 나의 발걸음처럼.
-시집『삼킨 꿈』(강, 2012)
2012-10-01 월요일 23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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