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노루목 / 한승오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2. 10. 1. 23:22
728x90

노루목


한승오

 

   벼이삭 누렇게 출렁대는 가을. 저 너머 콩잎을 찾아 고라니가 논을 밟고 오간다. 어제 남긴 발자국 그 자리에 또 오늘의 발자국을 남기고. 어제와 똑같은 길을 맹목적으로 고집하는 내일의 사람처럼.
   빨갛게 석양을 잠재운 지평선이 논 위에 가만히 내려앉는 저녁. 불쑥 고라니 한 마리가 논 속 평화로운 수평을 뚫고 용수철처럼 솟구친다. 길 잃고 허둥대는 발걸음이 벼를 짓밟고 혼란스럽게 산을 향해 달린다. 길 아닌 두려움에 선 인생처럼.
   막 떠나 고라니의 자리. 벼 포기 얼기설기 깔아 만든 하룻밤 잠자리. 야생의 고린내가 훅 다가온다. 도무지 가까이할 수 없는 저 먼 냄새. 도무지 멀리할 수 없는 이 가까운 냄새. 삶의 도정에 남겨놓은 내 치부처럼.
   호기심의 첫걸음이 내딛은 길을 따라 딱딱한 길로 굳어버린 습성. 노루목. 고라니는 이 길을 다시 오리라. 죽음마저 불사하는 지독한 어리석음으로. 인생의 노루목을 되새김질하는 나의 발걸음처럼.

 

 


-시집『삼킨 꿈』(강, 2012)
2012-10-01 월요일 23시 22분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명선 - 우기의 배경 / 우기(雨期)의 배경   (0) 2012.10.02
편지 / 김남조  (0) 2012.10.01
血書 / 채상우  (0) 2012.09.29
국립낱말과학수사원 / 함기석  (0) 2012.09.29
두부 / 유병록  (0) 2012.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