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고 -수필

시작법을 위한 기도 / 김현수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2. 12. 2.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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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각산(북한산) 인수봉>

 

 

시작법을 위한 기도


박현수

 


저희에게
한 번도 성대를 거친 적이 없는
발성법을 주옵시며
나날이 낯선
마을에 당도한 바람의 눈으로
세상에 서게 하소서
의도대로 시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옵시며
상상력의 홀씨가
생을 가득 떠돌게 하소서
회고는
노쇠의 중좌임을 믿사오니
사물에서 과거를
연상하지 않게 하옵시며
밤벌레처럼 유년을
파먹으며 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소서
거짓 희망으로
시를 끝내지 않게 하옵시며
삶이란 글자 속에
시가 이미 겹쳐 있듯이
영원토록
살갗처럼 시를 입게 하소서

 

 


-시선집『詩가오셨다』(천년의 시작, 2008)

 

 

 

 

   시가 어떻게 해서 쓰여질까. 어떤 때는 별다른 손질도 없이 몇 십분 만에 뚝딱 완성되기도 하고 또 어떤 시는 몇 개월 몇 년, 몇 십 년만에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낮설게 하기의 아름다움> 이라는 천양희 시인의 글을 보면 시인으로서 늘 깨어 있는 마음과 시를 향한 고뇌가 잘 나타나 있다. 일순 떠올랐다 사라지는 작은 시의 씨앗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지하철이든 어디든 메모지를 손에서 놓지 않으며 시와 더불어 시를 위한 준비를 늘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가 자주 와 준다면 좋겠지만 그렇지도 않거니와 설사 온다고 해도 시로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이 험난하고 지난한 시도 있다. 이 글에서 그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자신의 시 세 편을 소개하고 있다. 한 편은 어머니를 소재한 시 '그믐달' 이라는 시는 30분만에 완성을 했으나 '마음의 수수밭' 은 8년, '직소포에 들다' 는 무려 13년만에 완성을 했다고 한다. 이재무 시인은 자신의 경험으로 볼 때 잘 쓰려고 퇴고를 많이 한 시보다 어떤 느낌을 받아 한번에 쓰여진 시가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런 고된 퇴고 과정을 거쳐서 세상에 나온 시는 적어도 오래 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길 것이다..

 

  이 시 세 편은 모두 다 <마음의 수수밭> 이라는 시집에 실려 있지만 이 중에 두 편 '마음의 수수밭과 직소포에 들다' 는 문학과지성사에서 한국 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판된 기획 시집에 들어 있다. 무려 8년에 걸려 세상에 나왔다는 이 기획 시집에는 시인 166명 700여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이미 고인이 된 경우에는 8편의 시를 해제자가 추천하여 엮은이가 4편을 선정하고 엮은이의 판단으로 일부 시인은 7편까지 실었다고 한다. 7편이 실린 시인들을 대략 보니 한용운, 김소월, 서정주, 이상, 정지용 같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의 내노라 하는 시인들이고 생존시인은 6편의 시를 본인이 자선하고 그 중 엮은이가 4편을 선정하였다고 한다. 천양희 시인 같은 경우에는 이 기념시집에 두 편이 들어있는데 이 두 편은 본인이 고른 대표작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을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마음의 수수밭』.창작과비평사. 1994)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2』(조선일보 연재, 2008)

 

 

 

직소포에 들다


천양희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물방울이 툭, 떨어진다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하얀 수궁(水宮)을.


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 ― 바위들이 흔들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마음의 수수밭』창비.  1994)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그믐달


천양희

 


달이 팽나무에 걸렸다


어머니 가슴에
내가 걸렸다


내 그리운 山번지
따오기 날아가고


세상의 모든 딸들 못 본 척
어머니 검게 탄 속으로 흘러갔다


달아 달아
가슴 닳아
만월의 채 반도 못 산
달무리진 어머니.

 

 

 

-시집『마음의 수수밭』(창작과비평사, 1994)

 

 


   시인이란 시를 쓰는 사람인데 명색이 시인이 몇 달, 혹은 길게 면 년 동안 시를 한 편이라도  못쓰게 되면 오죽 답답할까. 아무리 쓰려고 해도 시는 오지 않고 또 끼적거려 놓은 것이 이미 남이 다 밟고 지나간 발자국을 따라간다면 시인 스스로도 자괴감에 휩싸일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보통 사람들처럼 재물이나 보화를 달라고 절대자에게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시인의 바람은 오직 시를 주십사 하는 것이다. 그것도 이 세상에 없는 나만이 쓸 수 있는 나만의 시 한 편을 내려 주십사 간절히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Ballade Pour Adeline(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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