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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릿재 타령
고개를 넘는다. 팔월 불볕 아래 싸릿재를 넘어간다.
흙먼지 여든 구비 억새 눕는 山자락 火田말 너와 집엔 핏빛 봉선화 순이는 廣大다 어미도 없는 아리랑 아리랑 쑥국 먹고 아리랑 문둥이가 살다간 외딴 골짜기 왼종일 징소리만 홀로 울어 恨많은 흰 구름 싣고 갔는데
타령이 고개를 넘는다. 팔월 불볕은 싸릿재를 넘어간다. 고 정건모 화백 <현대문학 1986.8.>
태백산맥을 동과 서로 가로지르는 숱한 영과 재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미지근하고 김빠진 병 사이다가 생각난다. 시대는 1970년대 초반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사내는 독립심을 키워야 한다며 아버지는 여름 방학을 맞아 나를 홀로 버스에 타게 해 먼 친척집이 있는 강원도 어디인가로 보내 버렸다.
처음 홀로 여행하는 것이 두려웠지만 짐짓 그렇지 않은 척 작별인사를 하고 지금 같으면 유럽이라도 갔을 시간에 덜컹덜컹 비포장도로를 달려 도착한 곳이 진부령이었다. 가는 길은 험난했다. 출력이 모자라는 완행버스는 오르막을 만날 때마다 곧 터질 것 같은 비명을 질러댔다. 입석도 만원인 채로 산지사방으로 덜컹거리는 버스, 에어컨도 없는 차 안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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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도착해 덜컥 내린 버스,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병 샀지만 차멀미에 시달려 한두 모금만 마셔도 속이 불편했다. 아깝기도 하고 상태가 나아지면 또 마실까 싶어 사이다 병을 들고 휘적휘적 팔월의 불볕더위 신작로를 따라갔다. 그 길을 한 시간 정도 걷다 자전거를 세워 두고 땀을 식히던 집배원을 만났다. 그는 머뭇거리다 그 사이다 안 마실 거면 달라고 말을 걸었다. 수치심보다 갈증이 컸었던 것이다. 나에게 사이다를 건네받은 그는 미적지근한 설탕물을 맛나게 한숨에 들이켜고 난 후 한숨을 길게 쉬고 또 물었었다. 어디까지 가느냐고.
그는 나를 짐자전거 뒷자리에 태워 10리 정도 떨어진 내 목적지까지 태워다 주고도 고맙다고 했다. 40년도 더 된 그때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과 자전거 앞쪽에 매달려 있던 낡은 가죽 우편가방이 생생하다.
이제는 고인이 된 우리나라 원로 서양화가 정건모 화백이 정확했다. 영을 하나 넘는 일도 타령이 필요한 고행의 여정이었고 어미 없는 아이의 생활처럼 태백 자락의 생활은 척박했다. 그리고 그곳은 서울 공장으로 일하러 간 누나가 금의환향하는 고향이기도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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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은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 달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 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양희은 '한계령', 작사·작곡 하덕규
이 노래를 한계령을 넘는 시외버스 안에서 들었다. 건축가 김수근이 지은 이국적인 한계령 휴게소를 막 지나쳐 동해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서쪽으로 뉘엿뉘엿 태양이 동해 바다를 찬란하게 비추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태백산의 동쪽 사면은 해가 빨리 졌다. 금세 어둑어둑해진 주변은 흑백으로 변해 점점 어둠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그때 동행이었던 친구가 워크맨으로 양희은이 부른 이 노래를 들려주었다.
사방이 어두워지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 한계령 내리막길에서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온통 회색으로 가득한 차창 밖에 조근조근 속삭이듯 양희은이 부르는 한계령이 떠돌았다. 충격적이었다. 멜로디보다 가사가 먼저 와 닿았다. 노래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나는 멍하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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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를 만든 이가 가수 하덕규 임에 놀랐고 이 가사의 원작시를 정덕수 시인이 19세의 나이에 쓴 것임을 알고 나서 한 번 더 놀랐다.
하덕규! 갓 스물을 넘긴 나는 그의 노래들로 황홀했었다. 세련되고 섬세한 비둘기, 고양이, 푸른돛, 가시나무 새는 우리에게 나른한 노래의 여백을 듣게 했다. 대중보다 반 발자국 앞서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그의 노래는 대중적이지만 통속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한계령을 만들었으리라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양귀자 작가의 '한계령'에서 밤무대 가수 은자는 '한계령'을 부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기복에도 희망을 살펴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한계령은 슬픈 노래다. 하늘같이 높은 영을 하나 넘어 위안을 얻나 싶었더니 저 산은 다시 지친 내 어깨를 떠밀어 내려가라 한다. 우리에게 한 줄기 바람처럼 살고 싶은 맘은 결국 허락되지 않았다. 거기까지가 한계이다. 너의 한계가 명확하지만 결코 포기도 못 한다는 불편한 진실에 순응하라 말한다.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과연 그 한계는 내가 만든 것인가? 아니면 누구인가 나에게 한계를 강요하는 자가?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참 후에 슬퍼지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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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늦게 차를 몰고 출발, 4차선으로 난 영동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려 단숨에 메밀꽃 축제가 한창인 봉평에 도착했다, 쉬엄쉬엄 온 길도 두 시간이 채 안 걸렸다. 근처에 만만한 숙소를 정하고 달이 뜨길 기다려 메밀꽃밭으로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메밀꽃을 소금을 뿌린 듯 보려면 깜깜한 밤에 달이 휘영청 해야 한다. 낮 시간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딜 갔을까? 이윽고 밤이 깊고 달이 뜬다. 잠시 메밀꽃에 홀려도 좋은 시간이다.
"그만 거둘까?" "잘 생각했네. 봉평 장에서 한 번이나 흐뭇하게 사 본 일 있었을까? 내일 대화 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오늘 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걸?" "달이 뜨렷다?"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한국 문학 대표작 선집 중
봉평에서 평창 근처 대화 장까지는 팔십 리 길을 달 뜬 밤에 허생원과 조선달, 동이 세 사람이 메밀꽃 가득한 길을 걷는다. 밤새 걸어야 하는 고된 장돌뱅이의 일상 중 어렵게 만나는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나도 조금은 그 흉내를 내 볼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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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그제야 나는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른 아침 차에 시동을 걸고 다시 길을 나섰다. 애초에 너무 싱겁게 목적지인 강릉에 도착하는 것이 싫어서 머문 곳이 봉평이었다. 대관령 옛길을 택해서 간다고 해도 시간은 넉넉했다. 대관령, 미시령, 한계령의 옛길들은 다 제구실을 못하고 도대체 영을 언제 넘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평평한 길이 새로 나 있다. 나를 힘들게 했던 높디높은 고개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특색 없이 깔끔하기만 한 휴게소 앞 노점상의 스피커에서 양희은의 한계령과 어이없는 휴게소 뽕짝이 섞여 나왔다. 대관령의 꼭대기를 넘어서자 강릉 시내와 앞바다가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나는 높은 곳에 올라 다시 내려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여전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안도감이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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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정녕
인용 문헌 <현대문학> 고 정건모 화백, 1986년 8월 발행 <메밀꽃 필 무렵> 이효석 저, 한국 문학 대표작 선집 <한계령> 양희은 노래, 하덕규 작사•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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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문화 기획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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