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 ~ ) - 목록과 시
제01편 서정주 - 푸르른 날
제02편 조 은 - 어느 새벽 처음으로
제03편 김남조 - 옛애인들
제04편 에릴리 디킨슨 - 새들은
제05편 김종삼 - 묵화(墨畵)
제06편 상희구 - 대구사과제
제07편 황지우 - 거룩한 식사
제08편 문정희 - 얼어붙은 발
제09편 레미 드 구르몽 - 낙엽
제10편 이상희 눈물 소리
제11편 나해철 - 실없이 가을을
제12편 김기택 - 수화
제13편 이정주 - 방을 보여주다
제14편 김영태 - 라벨과 나
제15편 송승환 - 네온사인
제16편 우영창 - 해피
제17편 김형영 - 노모
제18편 전동균 - 모기
제19편 전동균 - 여행자
제20편 에르난데스 - 그대가 없다면
제21편 이진명 - 모래밭에서
제22편 최영미 - 월동준비
제23편 김병호 - 세상 끝의 봄
제24편 김태형 - 기러기
제25편 포루그 파로흐자드 -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제26편 박경희 - 통박꽃
제27편 장석남 - 무쇠솥
제28편 김정환 - 지울 수 없는 노래
제29편 나희덕 - 소만(小滿)
제30편 이용임 - 여름의 수반
제31편 신동옥 - 도감에 없는 벌레
제32편 유 하 - 겨우 존재하는 것들
제33편 성미정 - 매우 드라이한 출산기
제34편 이태주 - 풍경(風磬)
제35편 이창기 -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제36편 신용목 - 일어나지 않는 일 때문에 서해에 갔다
제37편 박상우 - 버티는 삶
제38편 이성복 - 귀에는 세상 것들이
제39편 성기완 -그리고매우멀어바다같아요
제40편 이인철 - 순창고추장
제41편 박시하 - 옥수역
제42편 김희정 -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제43편 존 던 -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제44편 오규원 - 새와 나무
제45편 맹문재 - 나는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는다
제46편 김종철 - 재봉
제47편 정희성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제48편 김승희 -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제49편 최승자 - 시간이 사각사각
제50편 박재삼 - 사람이 사는 길 밑에
제51편 복효근 - 한 수 위
제52편 보들레르 - 어떤 희롱꾼
제53편 이근배 - 절필(絶筆)
제54편 홍일표 - 그림자 미술관
제55편 정세훈 - 차가운 사랑
제56편 노향림 - 해수찜
제57편 김민정 -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제58편 권혁웅 - 도봉근린공원
제59편 이수명 - 이빨들의 춤
제60편 진효임 - 치매걸린 어머니
제61편 정현종 - 견딜 수 없네
제62편 김경미 - 이러고 있는
제63편 김승일 - 멋진 사람
제64편 방민호 - 행복
제65편 박 준 - 눈썹 ―1987년
제66편 김소월 - 님의 노래
제67편 강영환 - 써레봉을 넘어서
제68편 권대웅 - 장독대가 있던 집
제69편 마종기 - 익숙지 않다
제70편 오세영 - 다랭이 논
제71편 김연희 - 러시앤캐시
제72편 송상욱 - 와온(臥溫)
제73편 한석호 - 수취인이 없다
제74편 유희경 - 심었다던 작약
제75편 최승호 - 봄밤
제76편 황동규 - 물소리
제77편 함민복 - 농약상회에서
제78편 메리 올리버 -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제79편 황병승 - 앙상블
제80편 양선희 - 하염없이
제81편 윤후명 - 철새
제82편 이시영 - 지상의 방 한 칸
제83편 이학성 - 매의 눈
제84편 빈센트 밀레이 - 활짝 편 손으로 사랑을
제85편 김창완 - 대본 읽기
제86편 박연준 - 뱀이 된 아버지
제87편 공광규 - 모과꽃잎 화문석
제88편 최문자 - 발의 고향
제89편 이 상 - 아침
제90편 김경후 - 지우개
제91편 김요아킴 - 나의 연봉
제92편 장대송 - 낡은 유모차와 할머니
제93편 김박은경 - 리미티드 에디션
제94편 신현림 - 나의 싸움
제95편 윤성근 - 꺼진 불
제96편 고트프리트 벤 - 한마디의 말
제97편 이원 - 사랑 또는 두 발
제98편 문동만 - 어떤 음계에서
제99편 남진우 - 폐선에 기대어
제100편 김현승 - 사랑의 동전(銅錢) 한 푼
제101편 조용미 - 강으로 나간 사람
제102편 이경례 - 잔
제103편 오은 - 이력서
제104편 김영승 - 오래간만이다 522번
제105편 문성해 - 백주대낮에 여자들이 칼을 들고 설치는 이유
제106편 딜런 토머스 - 푸른 도화선 속, 꽃을 몰아가는 힘이
제107편 - 문동만 -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제108편 - 김기림 - 길
제109편 - 장승리 - 보름
제110편 - 함기석 - 없는 사람
제111편 - 안현미 - 기차표 운동화
제112편 - 백 현 - 지붕 아래의 잠
제113편 - 김성대 - 여름의 자세
제114편 - 김소연 - 이것은 사람이 할 말
제115편 - 백무산 - 동해남부선
제116편 - 김이듬 - 날마다 설날
제117편 - 김요일 - 꽃싸움
제118편 - 이승희 - 내가 바라보는
제119편 - 박상수 - 시상식 모드
제120편 - 김경주 - 외계(外界)
제121편 - 데릭 월컷 - 바다 등나무
제122편 - 박영희 - 단 하루라도 좋으니
제123편 - 이문재 - 슬픈 로아라
제124편 - 송경동 -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제125편 - 백상웅 - 그저 그런
제126편 - 리 산 - 너바나
제127편 - 월트 휘트먼 - 그리며 사색하는 이 순간
제128편 - 서미경 - 차단기 기둥 곁에서
제129편 - 고형렬 - 버스에서 자는 어머니
제130편 - 이용악 - 강가
제131편 - 이용악 - 것들
제132편 - 이은봉 - 상수리나무들아
제133편 - 장석주 - 파리
제134편 - 류 근 - 가족의 힘
제135편 - 김행숙 - 떨어뜨린 것들
제136편 - 강성은 - 환상의 빛
제137편 - 장옥관 - 탱자는, 탱자가 아닙니다
제138편 - 박정대 - 음악들
제139편 - 다카하시 아유무 - 바람
제140편 - 김남호 - 근황
제141편 - 박도희 - 나의 빈티지
제142편 - 천금순 - 섬진강변에서
제143편 - 테드 휴즈 - 그 여자의 남편
제144편 - 김 언 - 기하학적인 삶
제145편 - 박상순 - 10개의 강아지 인형을 지키는 옷장 속의 인간
제146편 - 이장욱 - 삼 분 전의 잠
제147편 - 엄원태 - 구름에 대하여
제148편 - 이제야 - 소매소매의 자세
제149편 - 고옥주 - 끈질기게 나를 찾아다니는 전화
제150편 - 유홍준 - 토끼
제151편 - 폴 베를렌 - 가을의 노래
제152편 - 김신용 - 전어
제153편 - 심재상 - 당신의 차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제154편 - 오성일 - 검색
제155편 - 오두섭 - 물방울
제156편 - 허수경 - 공터의 사랑
제157편 - 김재혁 - 번역의 유토피아
제158편 - 박형준 - 초저녁 달
제159편 - 김사인 - 월부 장수
제160편 - 김명리 - 가을나무의 말
제161편 - 기욤 아폴리네르 - 미라보 다라
제162편 - 송재학 - 마흔 살
제163편 - 양애경 - 그 창
제164편 - 송승언 -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제165편 - 이병률- 혼자
제166편 - 박후기 - 폐결핵
제167편 - 하야시 후미코 - 폐가 노래한다
제168편 - 권현형 - 달콤한 인생
제169편 - 천상병 - 들국화
제170편 - 이제니 - 밤의 공벌레
제171편 - 한기팔 - 창이란 창을 다 열어 놓고
제172편 - 조정권 - 몰소리
제173편 - 최정례 - 길에 누운 화살표
제174편 - 정지용 - 옛 이야기 구절
제175편 - 김정란 - 나의 시(詩) ―약한 너에게 기대어
제176편 - 허형만 - 뒷굽
제177편 - 감태준 - 흔들릴 때마다 한 잔
제178편 - 정래교 - 늙은 소
제179편 - 이사라 - 얼룩
제180편 - 윤성택 - 오늘의 커피
제181편 - 김상미 - 겨울 이야기
제182편 - 니카노르 파라 - 주님의 기도
제183편 - 최동호 - 정릉 산보
제184편 - 김주대 - 형편대로
제185편 - 정용주 - 비밀정운
제186편 - 박주택-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제187편 - 김갑수 - 겨울이 오면
제188편 - 김명인 - 은혼
제189 편 - 아르튀르 랭보 나의 방랑(환상)
제190편 - 손택수 - 녹슨 도끼의 시
제191편 - 강 정 - 아픔
제192편 - 함성호- 바다 속 마을
제193편 - 황학주 - 풍선
제194편 - 윤명수 - 하루
제195편 -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 니에 대한 칭찬의 말
제196편 - 장정일 -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제197편 - 윤병무 - 인성의 비교급
제198편 - 김종해 - 인사동으로 가며
제199편 - 이상교 - 봉숭아 꽃물
제200편 - 도종환 - 악기
제201편 - 앨프리드 테니슨 - 향긋이 나직이
제202편 - 이성미 - 반복의 이유
제203편 - 김춘수 - 서풍부(西風賦)
제204편 - 정복여 - 꿈꾸는 사업
제205편 - 이규리 - 잘 가라, 환(幻)
제206편 - 강형철 - 이명(耳鳴)
제257편 - 김은율 - 부엌칸타타
제258편 - 안도현 - 겨울 편지
제209편 - 정호승 - 슬픔이 기쁨에게
제210편 - 조혜경 - 검은 스웨터를 뜨는 시간
제211편 - 이수익 - 어느 밤의 누이
제212편 - 필립 라킨 - 장소들, 사랑하는 사람들
제213편 - 박준범 - 화이바를 쓰고 머리를 긁었네
제214편 - 정끝별 - 막고 품다
제215편 - 신대철 - 무슨 소리 ―고비삽화 5
제216편 - 천양희 - 대대포에 들다
제217편 - 이기철 - 정신의 열대
제218편 - 차창룡 - 사우나탕에서, 쌀이시여
제219편 - 이윤학 - 환타 페트병
제220편 - 조동범 - 빙하기를 맞다
제221편 - 김동환 - 산 너머 남촌에는
제222편 - 곽효환 - 봄나무 아래 가을을 심은 날
제223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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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푸르른 날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동아일보. 2012년 9월 12일)
기사 입력 2012-09-12 03:00 기사 수정2012-09-1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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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날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시집『푸르른 날』(미래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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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느 새벽 처음으로
조은
이른 새벽 잠에서 깼다
불안하게 눈을 뜨던
여느 때와 달랐다
내 마음이 어둠 속에
죽순처럼 솟아 있었다
머리맡엔 종이와 펜
지난밤 먹으려다 잊은 맑은 미역국
어둠을 더듬느라
지문 남긴 안경과
다시는 안 입을 것처럼
개켜 놓은 옷
방전된 전화기
내 방으로
밀려온 그림자
창 밖 그림자
한 방향을 가리켰다
밤새 눌려 있던
머리카락이 부풀고
까슬까슬하던 혀가 촉촉했다
흰 종이에다
떨며 썼다
어느 새벽 처음으로……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8』(동아일보 2012년 1월 9일)
기사입력 2012-09-14 03:00:00 기사수정 2012-09-17 15:4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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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옛 연인들
김남조
지난 세월 나에겐
시절을 달리하여 연인이 몇 사람 있었고
오늘 그들의 주소는
하늘나라인 이가 많다
기억들 빛바랬어도
그 각각 시퍼렇게 멍이 든
심각성 하나만은
하늘에 닿았고
오늘까지 살아 있으니
그들 저마다
어찌 나의 운명 아닐 것인가
그 시절 여자들은
사랑하는 이에게
손뜨개 털장갑을 선물했으나
나만이 그거나마 단 한 번 못했으니
오랫동안 그분들
손 시려웠을지 몰라
빌고 비오니
그저 영혼 따뜻하게들 계시고
후일 우리 만나거든
그 옛날 장마비처럼 그치지 않던
눈물 얘기도
부디 미소지으며
나누게 되기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동아일보 2012년 9월 17일)
기사 입력 2012-09-17 03:00 기사 수정 2012-09-1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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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새들은
에밀리 디킨슨(1830∼1886)
새들은 네 시-
그들의 여명에-
공간처럼 무수한
대낮처럼 무량한 음악을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가
소모한 그 힘을 셀 수가 없었다
마치 시냇물이 하나하나 모여
연못을 늘리듯이
그들의 목격자는 없었다
오직 수수한 근면으로 차려입고
아침을 뒤쫓아
오는 사람이 가끔 있을 뿐
그건 갈채를 위한 것이 아님을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오직 신과 인간의
독자적인 엑스터시
여섯 시가 되면 홍수는 끝나고
옷을 입고 떠나는
소동은 없었으나
악대는 모두 가고 없다
태양은 동녘을 독점하고
대낮은 세상을 지배하고
찾아온 기적도
망각인 듯 이루어지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동아일보 2012년 9월 19일)
기사입력 2012-09-19 03:00:00 기사수정 2012-09-19 10: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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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묵화(墨畵)
―김종삼(1921∼1984)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동아일보 2012년 9월 21일)
기사입력 2012-09-21 03:00:00 기사수정 2012-09-21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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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화((墨畵)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1969년)
현대시 100년 -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편[8]
-시집『흰책』(믿음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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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구사과
상희구
인도라는 사과는
최고의 당도에다
씹히는 맛이 하박하박하고
홍옥이라는 사과는
때깔이 뿔꼬 달기는 하지마는
그 맛이 너무 쌔가랍고
국광은 나무로 치마 참나무겉치
열매가 딴딴하고 여문데
첫눈이 니릴 직전꺼정도 은은하게
뿕어 가민서 단맛을 돋꾼다
풋사과가 달기로는
그 중에 유와이가 젤로 낫고
고리땡은 오래 나아 둘수록
지푼 단맛이 있고
아사히는 물이 많은데 달지만
지푼 맛이 적고
B품으로 나온 오래된 낙과는
그 씹히는 맛이 허벅허벅하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동아일보. 2012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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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거룩한 식사
―황지우(1952∼ )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동아일보. 2012년 9월 26일)
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면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곽재구의 달빛으로 읽은 시『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이가서,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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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얼어붙은 발
―문정희(1947∼ )
큰 거울 달린 방에 신부가 앉아 있네
웨딩마치가 울리면 한 번도 안 가본 곳을 향해
곧 첫발을 내디딜 순서를 기다리고 있네
텅 비어 있고 아무 장식도 없는 곳
한번 들어가면 돌아 나오기 힘든 곳을 향해
다른 신부들도 그랬듯이 베일을 쓰고
순간 베일 속으로 빙벽이 다가들었지
두 발이 그대로 얼어붙는
각성의 날카로운 얼음 칼이 날아왔지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구나!
두 무릎을 벌떡 세우고 일어서야 하는 순간
하객들이 일제히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왔지
촛불이 흔들리고 웨딩마치가 울려퍼졌지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람처럼 사라져야 할 텐데
이 모든 일이 가격을 흥정할 수 없이
휘황한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었네
검은 양복이 흰 손을 내밀고 있었네
행복의 문 열리어라!
전통이 웃음을 흘리며 베일을 걷어 올렸네
난해한 행복이 출렁이는 바다를 향해
풍덩! 몸을 던지는 소리가 들려왔네
무사히 아름다운 혼례가 치러지고 있었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동아일보. 2012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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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낙엽
―레미 드 구르몽(1859∼1915)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 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동아일보. 2012년 10월 03일)
낙엽
구르몽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 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라멩 흩어지며 낙병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날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김희보 편저『世界의 名詩』(종로서적,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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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눈물 소리
―이상희 (1960∼ )
오래 울어보자고
몰래 오르던 대여섯 살 적 지붕
새가 낮게 스치고
운동화 고무창이 타도록 뜨겁던
기와, 검은 비탈에
울음 가득한 작은 몸 눕히고
깍지 낀 두 손 배 위에 얹으면
눈 꼬리 홈 따라 미끄러지는
눈물 소리 들렸다
- 울보야, 또 우니?
아무도 놀리지 않던
눈물 전곡(全曲) 감상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동아일보. 2012년 10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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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실없이 가을을
―나해철(1956∼ )
밥집 마당까지 내려온 가을을
갑자기 맞닥뜨리고
빌딩으로 돌아와서
일하다가
먼 친구에게 큰 숨 한 번
내쉬듯 전화한다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눈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니
좋다고
불현듯 생각한다
가을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와 있어서
그를 그렇게라도 보내게 한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동아일보. 2012년 10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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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수화
―김기택(1957∼ )
두 청년은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승객이 드문드문 앉아 있는 버스 안이었다.
둘은 지휘봉처럼 떨리는 팔을 힘차게 휘둘렀고
그때마다 손가락과 손바닥에서는
새 말들이 비둘기나 꽃처럼 생겨나오곤 하였다.
말들은 점점 커지고 빨라졌다.
나는 눈으로 탁구공을 따라가듯 부지런히 고개를 움직여 두 청년의 논쟁을 따라갔다.
그들은 때로 너무 격앙되어
상대방 손과 팔 사이의 말을 장풍으로 잘라내고
그 사이에다 제 말을 끼워 넣기도 하였다.
나는 그들의 논쟁에서 끓어 넘친 침들이
내 얼굴로 튈까 봐 자주 움찔하였다.
고성이 오갈 때에는 그들도 꽤나 시끄러웠을 것이다.
운전기사가 조용히 좀 해달라고 소리칠까 봐
가끔은 눈치가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버스 안에 두 사람 말고는 딴 승객은 없는 듯 조용하기만 했고
이따금 손바닥 서걱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동아일보. 2012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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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방을 보여주다
―이정주(1953∼)
낮잠 속으로 영감이 들어왔다. 영감은 아래턱으로 허술한 틀니를 자
꾸 깨물었다. 노파가 따라 들어왔다. 나는 이불을 개켰다. 아, 괜찮아.
잠시 구경만 하고 갈 거야. 나는 손빗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골랐다. 책
이 많네. 공부하는 양반이우. 나는 아무 말 않고 서 있었다. 책들을 버
려야지. 불태워 버려야지. 내 얼굴에 불길이 확 치솟았다. 싱크대에 그
릇들이 넘쳐나 있었다. 혼자 자취하는 모양이네. 우리 딸도 혼자 살아
요. 그러나 걔는 짐이 이렇게 많지 않아. 짐들도 버려야지. 모두 갖다
버려야지. 나는 양손을 비비며 서 있었다. 햇볕도 잘 들고 혼자 살기
딱 알맞네. 노파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 아, 그럼. 도시가스
들어오고 방도 따뜻하대요. 영감은 신발을 꿰며 소리쳤다. 노파는 내
얼굴을 빠안히 쳐다보며 말했다. 왜 나갈려고 그러시오? 나는 한참
눈을 껌벅거렸다. 그리고 손날로 허공을 찌르며 말했다. 먼 데로 가
려고 합니다. 먼 데로? 노파의 눈이 내 손끝을 따라왔다. 노파도 같
이 가고 싶은 얼굴이었다. 갑자기 현관이 멀어지고 나도 뒤로 엄청
물러나 있었다. 노파는 화장실 앞에서 갑자기 아득해진 공간을 쳐다
보고 서 있었다. 멀리 현관 밖에서 영감이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동아일보. 2012년 10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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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라벨과 나
―김영태(1936∼2007)
내 키는 1미터 62센티인데
모리스 라벨의 키는 1미터 52센티 단신(短身)이었다고 합니다
라벨은 가재수염을 길렀습니다
접시, 호리병, 기묘한 찻잔을 수집하기
화장실 한구석 붙박이
나무장 안에 빽빽이 들어찬
향수(香水) 진열 취미도
나와 비슷합니다
손때 묻은 작은 소지품들이 (누에 문양 포켓수건이나 열쇠고리까지)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냄새, 빛깔도 (그가 작곡한 ‘거울’ 속에 비친 사물들)
저 혼자만인 둘레에
지금도 남아 있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동아일보. 2012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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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네온사인
―송승환 (1971∼)
저무는 태양이 차례로 회전문 통과한 사람들 그림자를 붉은
담장에 드리운다 갓 돋아난 초록 이파리 검게 물들어간다 곧장
침대로 가기 꺼려하는 여인은 포도주의 밤을 오랫동안 마신다
공장 폐수를 따라 하얗고 둥근 달은 강으로 흐른다 언제나 우리
들은 그 가늘고 긴 새벽의 유리관 전극 속으로 사라진 불의
문자(文字) 아래로 걸어간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동아일보. 2012년 10월 17일)
기사입력 2012-10-17 03:00:00 기사수정 2012-10-17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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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해피
―우영창 (1956∼ )
해피가 짖는다
왜 네 이름이 해피였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한쪽 귀가 짜부라져 해피인지
다리 하나가 절뚝거려 해피인지
해피인 채로 내게 건너와
너는 나의 해피가 되었다
지금도 네 이름이 해피인지는
알 길이 없다
가끔은 무섭도록 네가 보고 싶다
우리에겐 깊은 공감이 있었다
세상은 그걸 몰랐다
죽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나이가 지났다
네 순한 눈동자가 닫힐 때
나는 어디 있었던가
나는 안다
나는 그 순간
너와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어둠 속에서
내 눈동자 물기 가득
앞발을 들고
네가 지금 일어서고 있는 것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동아일보. 2012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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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노모(老母)
―전연옥 (1961∼ )
스타킹은 문갑 위에 있다
거 봐라 내 뭐랬니
이게 출근이냐 전쟁이지
내일 모레면 너도 이제 서른인데
다닐 때 안경 벗지 말고
또릿또릿 잘 보고 다녀야 한다
참내, 구둣솔은 네가 들고 있잖니
전철 안에서 또 졸지 말고
건널목에서도 좌우 잘 살피고 다녀라
어린애가 아니니까 내 이러지
아, 잘 살피고 다녀야
네 맘에 드는 남자가 눈에 띄지
에미 잔소리 때문에
네 귀에 딱지가 앉았어도 할 수 없다
그러게 너는 어쩌자고 연애도 못 하냐
눈이 없냐 코가 째보냐
막둥이 시집보내느니
차라리 내가 가는 게 쉽겠다만
그래, 잘 보고 잘 다녀오너라
하이고 내 팔자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동아일보. 2012년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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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모기
―김형영 (1944∼ )
모기들은 날면서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온몸으로 소리를 친다
여름밤 내내
저기,
위험한 짐승들 사이에서
모기들은 끝없이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살기 위해 소리를 친다
어둠을 헤매며
더러는 맞아 죽고
더러는 피하면서
모기들은 죽으면서도 소리를 친다
죽음은 곧 사는 길인 듯이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모기 소리로 소리를 친다
영원히 같은
모기 소리로……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동아일보. 2012년 10월 24일)
기사입력 2012-10-24 03:00:00 기사수정 2012-10-24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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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김형영
모기들은 날면서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온몸으로 소리를 친다
여름밤 내내
저기,
위험한 짐승들 사이에서
모기들은 끝없이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살기 위해 소리를 친다
어둠을 헤매며
더러는 맞아 죽고
더러는 피하면서
모기들은 죽으면서도 소리를 친다
죽음은 곧 사는 길인 듯이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모기 소리로 소리를 친다
영원히 같은
모기 소리로……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문학과지성사. 1979 )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다음 문학 카페 : 시하늘 시읽기>
http://cafe.daum.net/sihanull/2qnJ/1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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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여행자
―전동균(1962∼)
일찍이 그는 게으른 거지였다
한 잔의 술과 따뜻한 잠자리를 위하여
도둑질을 일삼았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왕으로 법을 구하는 탁발승으로
몸을 바꾸어 태어나기도 하였다
하늘의 별을 보고
땅과 사람의 운명을 점친 적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눈먼 떠돌이 악사가 되어
온 땅이 바다고 사막인 이 세상을
홀로 지나가고 있으니
그가 지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흐름을 멈추고 다시 시작하는
저 허공의 구름들처럼
말 없는 것들, 쓸쓸하게 잠든 것들을 열애할 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동아일보. 2012년 10월 26일)
2012-10-26 03:00 2012-10-2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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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그대가 없다면
―미겔 에르난데스(1910∼1942)
그대의 눈이 없다면 내 눈은
외로운 두 개의 개미집일 따름입니다.
그대의 손이 없다면 내 손은
고약한 가시다발일 뿐입니다.
달콤한 종소리로 나를 가득 채우는
그대의 붉은 입술이 없다면
내 입술도 없습니다.
그대가 없다면 내 마음은
엉겅퀴 우거지고 회향 잎마저 시들어가는 고난의 길입니다.
그대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내 귀는 어찌 될까요?
그대라는 별이 없다면 나는 어디를 향해 떠돌까요?
그대의 대꾸 없어 내 목소리는 자꾸 약해집니다.
바람결에 묻어오는 그대 냄새 좇아
희미한 그대 흔적을 더듬어봅니다.
사랑은 그대에게서 시작돼
나에게서 끝납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0』(동아일보. 2012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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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모래밭에서
―이진명 (1955∼ )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갑자기 알아차리게 된 이즈음
외롭고 슬프고 어두웠다
나는 헌것이 되었구나
찢어지고 더러워졌구나
부끄러움과 초라함의 나날
모래밭에 나와 앉아 모래장난을 했다
손가락으로 모래를 뿌리며 흘러내리게 했다
쓰라림 수그러들지 않았다
모래는 흘러내리고 흘러내리고
모래 흘리던 손 저절로 가슴에 얹어지고
머리는 모랫바닥에 푹 박히고
비는 것처럼
비는 것처럼
헌것의 구부린 잔등이 되어 기다리었다
모래알들이 말했다
지푸라기가 말했다
모든 망가지는 것들은 처음엔 다 새것이었다
영광이 있었다
영광, 영광
새것인 나 아니었더라면
누가 망가지는 일을 맡아 해낼 것인가
망가지는 것이란 언제고 변하고 있는 새것이라는 말
영광, 영광
나는 모래알을 먹었다
나는 지푸라기를 먹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1』(동아일보. 2012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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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월동준비
―최영미 (1961∼ )
그림자를 만들지 못하는 도시의 불빛.
바람에 날리는 쓰레기.
인간이 지겨우면서 그리운 밤.
애인을 잡지 못한 늙은 처녀들이
미장원에 앉아 머리를 태운다
지독한 약품냄새를 맡으며
점화되지 못한 욕망.
올해도 그냥 지나가는구나
내 머리에 손댄 남자는 없었어.
남자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머리를 매만지며
안개처럼 번지는 수다……
겨울을 견딜 스타일을 완성하고
거울을 본다.
머리를 자르는 것도
하나의 혁명이던 때가 있었다.
생머리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표식이던,
단순한 시대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2』(동아일보. 2012년 11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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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세상 끝의 봄
―김병호 (1971∼ )
수도원 뒤뜰에서
견습 수녀가 비질을 한다
목련나무 한 그루
툭, 툭, 시시한 농담을 던진다
꽃잎은 금세 멍이 들고
수녀는 떨어진 얼굴을 지운다
샛길 하나 없이
봄이 진다
이편에서 살아보기도 전에
늙어버린, 꽃이 다 그늘인 시절
밤새 혼자 싼 보따리처럼
깡마른 가지에 목련이 얹혀 있다
여직 기다리는 게 있냐고
물어보는 햇살
담장 밖의 희미한 기척들이
물큰물큰 돋는, 세상 끝의 오후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3』(동아일보. 2012년 11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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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기러기
―김태형 (1970∼ )
이제 막 도착한 듯 한시름 놓아 날고 있는 기러기떼를 올려다봅니다
한 해에만도 일만 킬로미터쯤 날아간다지요 아마
그들이 날아온 그 뒤쪽이 아득합니다
살아갈 힘을 다해 우랄 산맥을 두고 온 그쪽 하늘은
그러니까 내겐 헤아릴 수 없는 거리입니다
그 옛날 어느 밀교승은 소식 전해줄 기러기마저 없다고 눈물 흘렸지요
한껏 흐드러진 꽃을 핑계로 다 익은 술을 핑계로
소식 전하던 마음도 이제 때를 놓쳤으니
멀찍이 새들을 올려다보며 늦가을 평원을 지납니다
이제 갓 뽑은 흙 묻은 무를 한쪽 베어물어
매운맛이 사라지는 동안
그래도 입안에서부터 한동안 잊었던 것들이 말이 되어 나오려 합니다
도무지 말이 되어 나올 수 없는 것까지도
잠시 올려다본 하늘에 스미어 있습니다 기러기가 날아갑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4』(동아일보. 2012년 11월 07일)
기사입력 2012-11-07 03:00:00 기사수정 2012-11-07 10: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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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포루그 파로흐자드(1935∼1967)
나의 작은 밤 안에, 아
바람은 나뭇잎들과 밀회를 즐기네
나의 작은 밤 안에
적막한 두려움이 있어
들어 보라
어둠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나는 이방인처럼 이 행복을 바라보며
나 자신의 절망에 중독되어 간다
들어보라
어둠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지금 이 순간, 이 밤 안에
무엇인가 지나간다
그것은 고요에 이르지 못하는 붉은 달
끊임없이 추락의 공포에 떨며 지붕에 걸쳐 있다
조문객 행렬처럼 몰려드는 구름은
폭우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한순간
그 다음엔 무
밤은 창 너머에서 소멸하고
대지는 또다시 숨을 멈추었다
이 창 너머 낯선 누군가가
그대와 나를 향하고 있다
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푸르른 이여
불타는 기억처럼 그대의 손을
내 손에 얹어 달라
그대를 사랑하는 이 손에
생의 열기로 가득한 그대 입술을
사랑에 번민하는 내 입술의 애무에 맡겨 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5』(동아일보. 2012년 11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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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통박꽃
―박경희 (1974∼ )
박 중에서
가장 가슴에 남는 박은
바가지로도 쓸 수 없고
죽도 뜰 수 없는
통박!
쪽박도 면박도
통박에 비하면 깨진 박 축에도 못 끼는데
마흔이 다 된 게
밥물도 맞출 줄 모르느냐고
고두밥도 모자라 쌀이 씹힌다고
국수는 오래 삶아야 속까지 익지
예산 국수 공장에서 금방 뽑아 왔느냐고
시금치나물은 살짝 익혀야지
흐물흐물해서 어디 씹히기나 하겠느냐고
소금은 순금으로 만들어
그리 귀해서 간이 싱겁느냐고
두릅은 나무둥치를 잘라서 했느냐고
씹으면 그나마 남은 이 다 부러지겠다고
금니 박아줄 수 있느냐고
그깟 글 나부랭이 써서
어느 세월에 똥구멍에 볕 들 날 있겠느냐고
고향 집에서 돌아오다 바라본
참말로 환장하게 환한 꽃!
박꽃!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6』(동아일보. 2012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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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무쇠 솥
―장석남 (1965∼ )
양평 길 주방기구종합백화점
수만 종류 그릇의 다정한 반짝임과 축제들 속에서
무쇠 솥을 사 몰고 왔다
-꽃처럼 무거웠다
솔로 썩썩 닦아
쌀과 수수와 보리를 섞어 안친다
푸푸푸푸 밥물이 끓어
밥 냄새가 피어오르고 잦아든다
그사이
먼 조상들이 줄줄이 방문할 것만 같다
별러서 무쇠 솥 장만을 하니
고구려의 어느 빗돌 위에 나앉는 별에 간 듯
큰 나라의 백성이 된다
이 솥에 닭도 잡아 끓이리
쑥도 뜯어 끓이리
푸푸푸푸, 그대들을 부르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7』(동아일보. 2012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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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지울 수 없는 노래
―4·19혁명 21주년 기념시
김정환 (1954∼ )
불현듯, 미친듯이
솟아나는 이름들은 있다
빗속에서 포장도로 위에서
온몸이 젖은 채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던 시절
모든 것은 사랑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죽음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부활이라고 했다
불러도 외쳐 불러도
그것은 떠오르지 않는 이미 옛날
그러나 불현듯, 어느 날 갑자기
미친 듯이 내 가슴에 불을 지르는
그리움은 있다 빗속에서도 활활 솟구쳐 오르는
가슴에 치미는 이름들은 있다
그들은 함성이 되어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사라져버린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있다
그들의 뜨거움은 아직도 있다
그대 눈물빛에, 뜨거움 치미는 목젖에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8』(동아일보. 2012년 11월 16일)
2012-11-16 03:00 2012-11-1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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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울 수 없는 노래/김정환
―4·19 21주년 기념시
불현듯, 미친 듯이
솟아나는 이름들은 있다.
빗속에서 포장도로 위에서
온몸이 젖은 채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던 시절
모든 것은 사랑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죽음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부활이라고 했다
불러도 외쳐 불러도
그것은 떠오르지 않는 이미 옛날
그러나 불현듯, 어느 날 갑자기
미친 듯이 내 가슴에 불을 지르는
그리움은 있다 빗속에서도 활활 솟구쳐오르는
가슴에 치미는 이름들은 있다
그들은 함성이 되어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사라져버린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있다
그들의 뜨거움은 아직도 있다
그대 눈물빛에, 뜨거움 치미는 목젖에
(『지울 수 없는 노래』. 창작과비평사. 1982)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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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소만(小滿)
―나희덕 (1966∼ )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
조금 빈 것도 같게
조금 넘을 것도 같게
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
내 마음의 그늘도
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
소만(小滿) 지나
넘치는 것은 어둠뿐이라는 듯
이제 무성해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나무는 그늘로만 이야기하고
그 어둔 말 아래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
소만(小滿) 지나면 들리는 소리
초록이 물비린내 풍기며 중얼거리는 소리
누가 내 발등을 덮어다오
이 부끄러운 발등을 좀 덮어다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9』(동아일보. 2012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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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여름의 수반
―이용임 (1976∼ )
서성이는 육체
나리우는 육체
맴도는 육체
묽어지는 육체
붉어지는 육체
환하게 사라지는 육체
입김으로 흩어지는 육체
한 점으로 떠 있는 육체
가장자리가 흔들리는 육체
바람을 가둔 육체
거울이 되는 육체
눈 위에 손을 올리고 기다리는 육체
그림자에 빠져 익사하는 육체
꽃잎을 얹은 육체
푸른 얼굴의 육체
가둔 향기에 빙빙 돌면서
말라가는 육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0』(동아일보. 2012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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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도감에 없는 벌레
―신동옥 (1977∼ )
옛 애인에게 받은 속옷을 셔츠를 입고 옛 애인에게 받은 바지를 입고 나선다
옛 애인에게 받은 안개를 바람을 입고 옛 애인에게 받은 황사를 입고 나선다
변절기(變節期), 잿빛 웃음으로 낱장의 표정을 여미다
살갗을 떠나는 각질에 지는 꽃잎 하나씩을 짝짓다가
―우리 언제 다시 천둥과 우레 눈보라 속에서 다시 만날까
―이 소란이 끝나고 누울 때 누가 승자인지 드러나겠지
그 많았던 오해와 모략과 끝끝내의 말들
오래 귀담아 들을수록 거짓은 내밀해서 점점 달콤해져만 가는 것인데
중독자여, 나는 1초의 삶을 위해 24시간 죽는가
깨지 않아도 좋을 오랜 꿈속에 갇힌 번데기처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1』(동아일보. 2012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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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겨우 존재하는 것들
―유하 (1963∼ )
여기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쑥국 먹고 체해 죽은 귀신 울음의 쑥국새,
농약을 이기며 물 위를 걸어가는 소금쟁이,
주인을 들에 방목하고 저 홀로 늙어가는 흑염소,
사향 냄새로 들풀을 물들이며 날아오는 사향제비나비,
빈 돼지우리 옆에 피어난 달개비꽃,
삶의 얇은 물결 위에 아슬아슬 떠 있는 것들,
그들이 그렇게 겨우 존재할 때까지, 난 뭘 했을까
바람이 멎을 때 감기는 눈과 비 맞는 사철나무의 중얼거림,
수염난 옥수수의 너털웃음을 그들은 만졌을지 모른다
겨우 존재하기 위한 안간힘으로,
달개비꽃 진저리치며 달빛을 털 때 열리는 티끌
우주의 문, 그 입구는 너무도 투명하여
난 겨우 바라만 볼 뿐이다
아, 겨우 존재하는 슬픔,
보이지 않는 그 목숨들의 건반을
딩동딩동 두드릴 수만 있다면!
난 그들을 경배한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2』(동아일보. 2012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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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매우 드라이한 출산기
―성미정(1967∼ )
닥터 박 왜 자꾸 항문 끝에 힘을 주라는 거요 내 지금 비록 네 발 달
린 짐승이 되어 침대 위를 기고 있지만 이곳은 분명 산부인과의 분만실
이오 그런데 자꾸 항문 끝에 힘을 주라니 날보고 지금 똥을 낳으라는 말
이오 똥 아닌 것을 낳으라는 말이오 닥터 박 어쨌든 난 지금 당신 명령
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니 어디 한번 죽을 힘을 다해 항문 끝에 힘
을 주겠소
닥터 박 이곳은 화장실이 아닌 건 분명한데 난 지금 도저한 핏기가 묻
은 희고 말랑한 똥을 낳은 것 같소 이 똥을 품에 안으며 난 이 희한한 똥
과 사랑에 빠질 것을 예감하고 있소 이것이 자라서 진짜 똥이 되어도 내
사랑은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처럼 희고 말랑할 것 같음도…닥터 박 항문
끝에 힘을 주라는 당신의 조치는 매우 적절하였던 것 같소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3』(동아일보. 2012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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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풍경(風磬)
―이태수 (1947∼ )
바람은 풍경을 흔들어 댑니다
풍경 소리는 하늘 아래 퍼져 나갑니다
그 소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나는
그 속마음의 그윽한 적막을 알 리 없습니다
바람은 끊임없이 나를 흔듭니다
흔들릴수록 자꾸만 어두워져 버립니다
어둡고 아플수록 풍경은
맑고 밝은 소리를 길어 나릅니다
비워도 비워 내도 채워지는 나는
아픔과 어둠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어두워질수록 명징하게 울리는 풍경은
아마도 모든 걸 다 비워 내서 그런가 봅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4』(동아일보. 2012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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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이창기 (1959∼ )
한 사나흘 깊은 몸살을 앓다
며칠 참았던 담배를 사러
뒷마당에 쓰러져 있던 자전거를
겨우 일으켜 세운다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는데
웬 여인이 불쑥 나타나
양조간장 한 병을 사오란다
깻잎장아찌를 담가야 한다고
잘 있거라
처녀애들 젖가슴처럼
탱탱한 바퀴에 가뿐한 몸을 싣고
나는 재빠르게 모퉁이를 돌아선다
근데
이미 오래전에 한 사내를 소화시킨 듯한
저 여인은 누구인가
저 여인이 기억하는,
혹은 잊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5』(동아일보. 2012년 12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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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일어나지 않는 일 때문에 서해에 갔다
―신용목 (1974∼ )
저녁이 하늘을 기울여, 거품 바다
그득 한 잔이다.
속에서부터, 모든 말은 붉다. 불길 몸으로 휘는 파도의
혀.
돌아와 한 주전자 수돗물을 받았다.
이 위로, 몇 척의 배가
지나갔을까.
불에 올렸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6』(동아일보. 2012년 12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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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버티는 삶
―박상우 (1963∼ )
사막과
황무지와
무인도로 이루어진
나의 세계
갈증을 견디기 위해서는
한 잔의 물만,
허기를 견디기 위해서는
한 움큼의 먹이만
있으면 되고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는
인간은 본디 섬이라고
믿으면 되느니,
그런 삶도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
햇빛이 닿지 않는 심해(深海)에 빠져
염통과 뇌가 터질 듯 말 듯해도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7』(동아일보. 2012년 1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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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귀에는 세상 것들이
―이성복(1952∼ )
귀에는 세상 것들이 가득하여
구르는 홍방울새 소리 못 듣겠네
아하, 못 듣겠네 자지러지는 저
홍방울새 소리 나는 못 듣겠네
귀에는 흐리고 흐린 날 개가 짖고
그가 가면서 팔로 노를 저어도
내 그를 부르지 못하네 내 그를
붙잡지 못하네 아하, 자지러지는 저
홍방울새 소리 나는 더 못 듣겠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8』(동아일보. 2012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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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그리고매우멀어바다같아요
―성기완(1967∼ )
그리고매우멀어바다같다던
당신이떠난그곳이어딘지
알수없어
매우멀어바다같아요
당신이남겨놓으신흔적들
파도에씻긴조가비같은것들
함께바다에여행갔을때당신이
무릎접고고개숙이고줍던
그시간이
매우멀어바다같아요
당신이나를버린이유
알수없어걷고또걷던새벽에얻은
몽유의버릇
주머니에가득한물음표
아이가쏟아놓은퍼즐조각처럼
그이유가망망(茫茫)해서대해(大海)같아요
언젠가부터긴긴잠을자고있어요
당신이어디사는지알지도못하는
그냥내가한참미워밤바다같아요
그리고너무멀어
오늘이
망망(茫茫)큰바다같아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9』(동아일보. 2012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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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순창고추장
―이인철(1961∼ )
이슬을 닦고 장독뚜껑 열면
곰삭고 있는
해
하나
저렇게 붉으면
저렇게 뜨거우면
사랑처럼 단내가 풍풍 나는구나
강천산 단풍보다 더 싱싱한 색이 돋는구나
섬진강 한 굽이의 샘물 냄새
물씬
물씬
솟구쳐 오르고
양푼에 곰삭은 해 한 수저 떠넣고
붉은 밥을 비비면
칼칼한 입맛
고추씨 같은 별빛과
왕대나무숲 붐비는 바람소리
담 넘어 우리를 부르는 어머니의 가는 손
들린다
뜨거웠던 시절에
은어떼처럼 되돌아오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0』(동아일보. 2012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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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옥수(玉水)역
―박시하 (1972∼ )
사랑해,
공중 역사 아래 공중에게 고백을 하려다 만다
군고구마 통에 때늦은 불 지피는 할머니가
내가 버린 고백을 까맣게 태우고 있다
이 허망한 봄날
겨울을 견딘 묵은 사과들이
소쿠리에 담겨 서로 껴안고 있다
또 다른 출발을 꿈꾸는 걸까?
아직 붉다
역사가 흔들릴 때
문득 두고 온 사랑이 생각났다
푸른 강물 위
새로 도착하는 생(生)과
변함없이 떠나고 있는 생(生)들이 일렁인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1』(동아일보. 2012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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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김희정(1967∼ )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너희들이 태어나고, 제일 먼저
그림자를 버렸단다
사람들은 아빠보고 유령이라 말하지만
너희들이 아빠라고 불러줄 때마다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단다
다음으로 버린 것은 남자라는 단어야
폼 잡았던 남자라는 옷 벗어 던지고
너희들이 달아 준 이름
아빠를 달고 세상을 향해 걷고 또 걷는단다
그 순간만은 아빠라는 이름이 훈장이 되고
슈퍼맨의 망토가 된단다
다음은 지갑을 닫았단다
멋진 폼으로 친구들 앞에서
지갑을 열었던 날이 있었지
네가 태어났던 날이야
그날을 끝으로
먼저 지갑을 꺼내 본 적이 없단다
망설이다 망설이다, 버린 것이 자존심이야
너무나 버리기가 힘들어
마음 한 구석에 숨겨놓았지
네가 학교에 입학하고
책가방이 무거워져 갈 때
오랜 세월 자리를 잡아
나오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그 자존심
잘 마시지 못한 소주 꾸역꾸역 삼키며
세상 밖으로 토해냈단다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사람들이 그림자가 없다고 놀려도
남자의 옷을 벗고 다닌다고 말해도
지갑이 없다고 수군거려도
배알이 없다는 말로
심장에 비수를 꽂아도
나는 너희들의 아빠니까, 괜찮아
아빠니까 말이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2』(동아일보. 2012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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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존 던(1572∼1631)
세상 어느 누구도 외따로운 섬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
이며 대양의 한 부분이다.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흘러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질 것이며, 모래벌이 씻겨도 마찬가지, 그대나 그대 친구들의
땅을 앗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손상시킬지니,
나는 인류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를 알
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종이나니.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3』(동아일보. 2012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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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새와 나무
― 오규원(1941∼2007)
어제 내린 눈이 어제에 있지 않고
오늘 위에 쌓여 있습니다
눈은 그래도 여전히 희고 부드럽고
개나리 울타리 근처에서 찍히는
새의 발자국에는 깊이가 생기고 있습니다
어제의 새들은 그러나 발자국만
오늘 위에 있고 몸은
어제 위의 눈에서 거닐고 있습니다
작은 돌들은 아직도 여기에
있었다거나 있다거나 하지 않고
나무들은 모두 눈을 뚫고 서서
잎 하나 없는 가지를 가지의 허공과
허공의 가지 사이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4』(동아일보. 2012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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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나는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는다
―맹문재(1963∼ )
대학교수의 손이 왜 이래?
악수를 하는 사람들은
나뭇등걸처럼 갈라진 나의 손등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놀리기도 한다
나는 정답 같은 당당함을 가지려고 하면서도
그때마다 움츠러든다
내가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는 이유는
위생적으로 아이들에게 밥을 해주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닮고 싶은 손이 있기 때문이다
투르게네프의 [노동자와 흰 손의 사나이]에 나오는 사나이는
당국의 눈치보다 노동자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육 년이나 쇠고랑을 찼고
마침내 교수형을 선택했다
나도 빈 요구르트병 같은 노동자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출석 확인을 하듯 일기를 쓰고
연서를 하고
때로는 집회에 나가지만
흰 손의 사나이가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최소한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5』(동아일보. 2012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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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재봉
―김종철 (1947∼ )
사시사철 눈 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에는
집집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마을의 하늘과 아이들이
쉬고 있다
마른 가지의 난동(暖冬)의 빨간 열매가 수실로 뜨이는
눈 나린 이 겨울날
나무들은 신의 아내들이 짠 은빛의 털옷을 입고
저마다 깊은 내부의 겨울바다로 한없이 잦아들고
아내가 뜨는 바늘귀의 고요한 가봉(假縫),
털실을 잣는 아내의 손은
천사에게 주문받은 아이들의 전 생애의 옷을 짜고 있다
설레는 신의 겨울,
그 길고 먼 복도를 지내나와
사시사철 눈 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
아내가 소요하는 회잉(懷孕)의 고요 안에
아직 풀지 않은 올의 하늘을 안고
눈부신 장미의 아이들이 노래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눈뜨지 않고 지내며
어머니의 나라에서 누워 듣던 우레가
지금 새로 우리를 설레게 하고 있다
눈이 와서 나무들마저 의식(儀式)의 옷을 입고
축복받는 날
아이들이 지껄이는 미래의 낱말들이
살아서 부활하는 직조(織造)의 방에 누워
내 동상(凍傷)의 귀는 영원한 꿈의 재단,
이 겨울날 조요로운 아내의 재봉 일을 엿듣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6』(동아일보. 2012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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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희성(1945∼ )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1』(동아일보. 2012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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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김승희(1952∼)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 마디 못 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밋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에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8』(동아일보. 2013년 01월 02일)
기사입력 2013-01-02 03:00:00 기사수정 2013-01-02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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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마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 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미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과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김승희 시산문집『그래도라는 섬이 있다』(마음산책,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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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시간이 사각사각
―최승자(1952∼)
한 아름다운 결정체로서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사각사각 아름다운 설탕의 시간들
사각사각 아름다운 눈(雪)의 시간들
한 불안한 결정체로서의
시간들도 있습니다
사각사각 바스러지는 시간들
사각사각 무너지는 시간들
사각사각 시간이 지나갑니다
시간의 마술사는 깃발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사회가 휙,
역사가 휙,
문명이 휙,
시간의 마술사가 사각사각 지나갑니다
아하 사실은
(통시성의 하늘 아래서
공시성인 인류의 집단 무의식 속에서
시간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입니다)
시간이 사각사각
시간이 아삭아삭
시간이 바삭바삭
아하 기실은
사회가 휙,
역사가 휙,
문명이 휙,
시간의 마술사가 사각사각 지나갑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9』 (동아일보. 2013년 01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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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사람이 사는 길 밑에
―박재삼(1933∼1997)
겨울 바다를 가며
물결이 출렁이고
배가 흔들리는 것에만
어찌 정신을 다 쏟으랴.
그 출렁임이
그 흔들림이
거세어서만이
천 길 바다 밑에서는
산호가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는 일이라!
사람이 살아가는 그 어려운 길도
아득한 출렁임 흔들림 밑에
그것을 받쳐주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가 마땅히 있는 일이라!
……다 그런 일이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0』 (동아일보. 2013년 01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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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한 수 위
―복효근 (1962∼)
어이, 할매 살라먼 사고 안 살라면 자꼬 만지지 마씨요
―때깔은 존디 기지*가 영 허술해 보잉만
먼 소리다요 요 웃도리가 작년에 유행하던 기진디 우리
여펜네도
요거 입고 서울 딸네도 가고 마을 회관에도 가고
벵원에도 가고 올여름 한려수도 관광도 댕겨왔소
물도 안 빠지고 늘어나도 않고
요거 보씨요 백화점에 납품허던 상푠디
요즘 겡기가 안 좋아 이월상품이라고 여그 나왔다요
헹편이 안 되먼 깎아달란 말이나 허제
안즉 해장 마수걸이도 못했는디
넘 장사판에 기지가 좋네 안 좋네 어쩌네
구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허들 말고
어서 가씨요
―뭐 내가 돈이 없어 그러간디 나도 돈 있어라
요까이껏이 허면 얼마나 헌다고 괄시는 괄시요
팔처넌인디 산다먼 내 육처넌에 주지라 할매 차비는
빼드리께
뿌시럭거리며 괴춤에서 돈을 꺼내 할매 펴보이는 돈이
천원짜리 구지폐 넉 장이다
―애개개 어쩐다요
됐소 고거라도 주고 가씨오 마수걸이라 밑지고 준 줄이나
아이씨요잉
못 이긴 척 배시시 웃는 할배와
또 수줍게 웃고 돌아서는 할매
둘 다 어금니가 하나도 없다
*기지: 옷감, 천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1』 (동아일보. 2013년 01월 09일)
기사입력 2013-01-09 03:00:00 기사수정 2013-01-09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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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어떤 희롱꾼
―보들레르 (1821∼1867)
수많은 사륜마차들이 지나간 눈과 진흙의 혼돈, 장난감 등속과 봉봉과
자의 번쩍임, 탐욕과 절망의 범벅, 가장 강한 고독자의 뇌리조차 혼란케
하는 대도시의 이 모든 공공연한 광란……새해가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혼잡과 뒤죽박죽의 한가운데를 채찍으로 무장한 무뢰한에 시달리
며 분주히 뛰어가고 있는 당나귀 한 마리가 있었다. 당나귀가 막 보도
의 모퉁이를 돌아가려고 하는데 장갑을 끼고 잔인할 정도로 넥타이를
꽉 매고 꼭 맞는 옷 속에 감금당한 듯, 요란하게 차려입은 멀쩡하게
잘생긴 한 신사가 이 보잘것없는 짐승 앞에 정중히 몸을 굽히는 것
이었다. 그리고 모자를 벗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행복하고
복된 새해를 기원하나이다!” 그러고는 거만스럽게 누구신지 알 수
없는 동료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치 자신의 기쁨에 그들이 동의해
줄 것을 간청하기라도 하듯.
당나귀는 이 익살꾼을 보지 않은 채 그의 의무가 그를 부르는 곳을
향해 열심히 달리기를 계속할 뿐이었다.
나는 갑자기 이 사치스러운 천치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
혔다. 이 천치야말로 그 자신 속에 프랑스의 모든 에스프리를 축소해 가
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2』(동아일보. 2013년 0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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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절필(絶筆)
―이근배 (1940∼)
아직 밖은 매운 바람일 때
하늘의 창을 열고
흰 불꽃을 터뜨리는
목련의 한 획
또는
봄밤을 밝혀 지새우고는
그 쏟아낸 혈흔(血痕)들을 지워가는
벚꽃의 산화(散華)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는
단풍으로 알몸을 태우는
설악(雪嶽)의 물소리
오오 꺾어봤으면
그것들처럼 한 번
짐승스럽게 꺾어봤으면
이 무딘 사랑의
붓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3』(동아일보. 2013년 0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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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그림자 미술관
―홍일표(1958∼)
먼 기억처럼 바삭 마른 그림자
살살 긁어보면 피가 배어 나오기도 하는
아직 고양이 울음소리가 가느다란 잎맥으로 남아 있는
200년 전 그림 속으로 들어간 나비와 고양이가
그림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저것은 어제 본 나비, 어제 본 고양이
일렁이는 그림자의 뿌리는 땅속까지 뻗어 있다
그림자가 출렁,
물고기 한 마리 뛰어오르듯
검은 허공을 열고 나오는 한 쌍의 나비
수 세기를 오가며 새까매진 어둠의 뒤편에 붙어
그림 속 봄을 매만지는 사이
손발이 다 녹아 날아가고
고양이가 펄쩍 뛰어오르는 순간 꽃잎 위의 나비가 200년 뒤로 얼른 숨는다
허공에 박힌 고양이의 몸이 빠지지 않는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4』(동아일보. 2013년 0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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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차가운 사랑
―정세훈(1955∼)
차가운 사랑이
먼 숲을 뜨겁게 달굽니다
어미 곰이 애지중지 침을 발라 기르던
새끼를 데리고 산딸기가 있는 먼 숲에 왔습니다
어린 새끼 산딸기를 따먹느라 어미를 잊었습니다
그 틈을 타 어미 곰
몰래 새끼 곁을 떠납니다
어미가 떠난 곳에
새끼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놓였습니다
버려야 할 때 버리는 것이
안아야 할 때 안는 것보다
더욱 힘들다는 그 길이
새끼 앞에 먼 숲이 되어 있습니다
탯줄을 끊어 자궁 밖 세상으로 내놓던
걸음마를 배울 때 잡은 손을 놓아주던
차가운 사랑이
먼 숲을 울창하게 만듭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5』(동아일보. 2013년 0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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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해수찜
노향림 (1942∼)
이따금 바다 갈매기들이 하얗게 똥을 떨어뜨린다.
그 똥이 훤히 올려다보이는 유리 천장 아래
상체를 내놓은 반라(半裸)의 여자들이 모여 찜질을 한다.
유황 성분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만든 해수탕
질기고 비루한 일상을 벗어버리겠다고
바닥에 오체투지 하듯이 납작 엎드려 부항을 뜨거나
약쑥 냄새 자욱한 평상에 무릎관절 꺾고 앉아 있다.
만삭처럼 부른 배들을 스스럼없이 내놓고
뜨거운 열기 속에 얼굴들이 복숭앗빛으로 불콰하다.
더운 수증기에도 잘 젖지 않는 젖가슴들
한때 아기들에게 젖을 물렸을 자루처럼 늘어진 가슴 끝에
시든 꽃꼭지 같은 유두를 매달고 있다.
유난히 하복부가 나온 젊은 아낙이 통성명을 한다.
아따, 언니는 임신 팔 개월째여? 배만 징허게 나와부렀소.
삼십 대로 보이는 아낙이 저승꽃 핀 얼굴의
팔십이 넘어 보이는 늙은 아낙에게 말을 건다.
폐경기를 다 넘긴 여자들이 다시 회임했다고 깔깔댄다.
싸 온 도시락들을 나눠 먹으며 아따, 언니는 벌써 두 양푼째네.
요렇코럼 만수위 된 뱃속에 뭘 또 심고 싶소,
소나무 장작불 땐 해수탕에 와서 배 따땃하면 됐제.
그녀들은 유황 성분이 온몸에 녹아들었는지
불이 이는 홍조를 띠며 자매들처럼 앉아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6』(동아일보. 2013년 0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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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김민정(1976∼)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꼭 한 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오며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두사부일체’ 보면서 한 번도 안 웃었지?
웃겨야 웃는데 한 번도 안 웃겨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잘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도미회 장식했던 장미꽃 다 씹어 먹었지?
싱싱하니 내버리기 아까워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이상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진정한 시의 달인 여기 계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으므로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사연 끝에 정중히
호(號) 하나 달아드리니 son of bitch
사전은 좀 찾아보셨나요? 누가 볼까
가래침으로 단단히 풀칠한 편지
남자는 뜯고 개자식은 물로 헹굴 때
비로소 나는 악마와 천사 놀이를 한다,
이 풍경의 한순간을 시 쓴답시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7』(동아일보. 2013년 0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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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도봉근린공원
―권혁웅(1967∼)
얼굴을 선캡과 마스크로 무장한 채
구십 도 각도로 팔을 뻗으며 다가오는 아낙들을 보면
인생이 무장강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계적응훈련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한 지 몇 년인데, 지갑은 집에 두고 왔는데,
우물쭈물하는 사이 윽박지르듯 지나쳐 간다
철봉 옆에는 허공을 걷는 사내들과
앉아서 제 몸을 들어 올리는 사내들이 있다 몇 갑자
내공을 들쳐 메고 무협지 밖으로 걸어 나온 자들이다
애먼 나무둥치에 몸을 비비는 저편 부부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을 닮았다
영역표시를 해놓는 거다
신문지 위에 소주와 순대를 진설한 노인은
지금 막 주지육림에 들었다
개울물이 포석정처럼 노인을 중심으로 돈다
약수터에 놓인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는 예쁘고
헤픈 처녀 같아서 뭇입이 지나간 참이다
나도 머뭇거리며 손잡이 쪽에 얼굴을 가져간다
제일 많이 혀를 탄 곳이다 방금 나는
웬 노파와 입을 맞췄다
맨발 지압로에는 볼일 급한 애완견이 먼저 지나갔고
음이온 산책로에는 보행기를 끄는 고목이 서 있으니
놀랍도다, 이 저녁의 평화는 왜 이리 분주한 것이며
요즘의 태평성대는 왜 이리 쓸쓸한 것이냐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8』(동아일보. 2013년 0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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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이빨들의 춤
―이수명(1965∼)
집에 돌아오면 늘 이가 빠졌다. 그는 빠진 이빨들을 화장실 물컵에
넣어 두고는 거울을 보며 텅 빈 입으로 웃었다. 아침이면 그것들을 하
나씩 차례로 끼고 외출을 했다.
어느 날인가 몹시 피곤하여 돌아온 날 밤 그는 화장실에서 이상한 소
리가 들려 잠을 깼다. 일어나 가보니 이빨들이 컵에서 나와 똑딱거리며
몸을 부딪쳐 가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참 재미있겠구나. 나도 끼워줘.”
그의 말에 이빨 하나가 대답했다. “어서 들어와.” 그는 춤을 추었다.
그러자 이빨들이 컵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가방 가득 물건을 팔러 다녔다. 언제나 열심히 일했지만 그의 물
건을 사려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가방은 아침이나 저녁이나 무거웠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가방과 가방 속에 있던 물건들은 이리저리 흩어
졌지만 화장실에 있던 이빨들은 그와 함께 묻혔다. 그는 밤마다 이빨들
과 함께 춤을 추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9』(동아일보. 2013년 0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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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치매 걸린 시어머니
―진효임(1943∼)
눈도 못 맞추게 하시던 무서운 시어머니가
명주 베 보름새를 뚝딱 해치우시던 솜씨 좋은 시어머니가
팔십 넘어 치매가 왔습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손발은 말할 것도 없고
방 벽에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소변도 못 가리시면서 기저귀를 마다하시던 시어머니,
꼼짝 없이 붙잡힌 나는
옛날에 한 시집살이가 모두 생각났는데,
시어머니가 나를 보고.
엄니, 엄니 제가 미안 허요, 용서해 주시요 잉.
공대를 하는 걸 보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우리 시어머니 시집살이도
나만큼이나 매웠나 봅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0』(동아일보. 2013년 0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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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견딜 수 없네
―정현종(1939∼)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가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1』(동아일보. 2013년 02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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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이러고 있는
―김경미(1959∼)
비가 자운영꽃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젖은 머리칼이 뜨거운 이마를
알아보게 한 날이다 지나가던 유치원 꼬마가 엄마한테 지금 이러고 있
을 때가 아냐 엄마, 그런다 염소처럼 풀쩍 놀라서 나는 늘 이러고 있
는데 이게 아닌데 하는 밤마다 흰 소금염전처럼 잠이 오지 않는데 날
마다 무릎에서 딱딱 겁에 질린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나는데 낙엽이 그
리움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가슴이 못질을 알아본 날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생에 처음 청보라색 자운영을 알아보았는데
내일은 정녕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2』(동아일보. 2013년 02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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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멋진 사람
―김승일 (1987∼)
초인종이 울려서 문을 열었어. 짱깨가 철가방에서 너를 꺼냈지. 너는
그렇게 태어난 거야. 고모가 자주 하는 얘기. 나는 그 얘기를 너무 좋아
해서 듣고 듣고 또 들었다. 나만 그렇게 태어났지? 이것은 오래된 바람.
내가 배달된 해에, 할아버지가 둘 다 죽었다. 집안에 큰 인물이 태어나
면 초상이 난다지. 이것 역시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 나는 얼
마나 유명해질까? 기대가 된다. 그러나
손금이 평범해서 나는 울었지. 그래도 손금이 평범하다고 우는 애는 나
밖에 없을 거야. 있으면 어떡해? 조금밖에 없을 거야. 그렇지? 실컷 울
었더니 손금이 변했어.
지하철 선로로 뛰어들었다. 나는 평범함보다는 평평함이 좋아. 모르는
사람들이 나한테 화를 냈다. 괜찮아요. 열차가 오려면 십 분 남았어. 나
는 이목을 끄는 사람. 나중에 유명해질 때까지 기다리기 싫었어요. 어
쨌든
할아버지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혹독한 현실. 하지만 사명감은
갖지 않을래. 사명감이 없는 애는 나밖에 없을 테니까. 있으면 어떡해?
있으면 좋지. 짱깨가 내 앞을 지나갔다. 폭주족처럼. 이목을 끌며 멋있게.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3』(동아일보. 2013년 02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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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행복
―방민호 (1965∼)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옷 없는 짐승들처럼 골목 깊은 곳에 단둘이 살 때
우리는 가난했지만 슬픔을 몰랐다
가을이 오면 양철 지붕 위로 감나무 주홍 낙엽이 쌓이고
겨울이 와서 비가 내리면 나 당신 위해 파뿌리를 삶았다
그때 당신은 내 세상에 하나뿐인 이슬 진주
하지만 행복은 석양처럼 짧았다
내가 흐느적거리는 도시 불빛에 익숙해지자
당신은 폐에 독한 병이 들어 내 가슴속에 누웠다
지금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
시간이 물살처럼 흐르는 사이
당신을 잃어버린 내게 남은 건
상한 간과 후회뿐
그때 우린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나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백열등 하나가 우리 캄캄한 밤을 지켜주던 나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4』(동아일보. 2013년 02월 08일)
시집『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실천문학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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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눈썹 ―1987년
―박준(1983∼)
엄마는 한동안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빛이 잘 안 드는 날에도
이마까지 수건으로
꽁꽁 싸매었다
봄날 아침
일찍 수색에 나가
목욕도 오래 하고
화교 주방장이
새로 왔다는 반점(飯店)에서
우동을 한 그릇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우연히 들른 미용실에서
눈썹 문신을 한 것이 탈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엄마가 이마에 지리산을 그리고 왔다며
밥상을 엎으셨다
어린 누나와 내가
노루처럼
방방 뛰어다녔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5』(동아일보. 2013년 0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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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님의 노래
―김소월(1902∼1934)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젖어 있어요
긴 날을 문 밖에서 서서 들어도
그리운 우리 님의 고운 노래는
해지고 저물도록 귀에 들려요
밤들고 잠들도록 귀에 들려요
고이도 흔들리는 노랫가락에
내 잠은 그만이나 깊이 들어요
고적한 잠자리에 홀로 누워도
내 잠은 포스근히 깊이 들어요
그러나 자다 깨면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잃어버려요
들으면 듣는 대로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잊고 말아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6』(동아일보. 2013년 0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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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써레봉을 넘어서
―강영환(1938∼)
그대 흥미 없는 생에 무너지고 싶다면
흔적도 없이 무너져 훨훨 날아가고 싶다면
남도 지리산 동녘 써레봉으로 가서
세상을 가르는 칼등을 걸어 보라
눈이 상봉을 향하여 갈증을 풀 때 산등은
눈부신 쪽으로 몸을 끌어가려 하느니
왼쪽은 가물가물 햇살 벼랑이고
오른쪽은 푸르고 깊은 수해 빛이다
그곳에는 영원에 쉽게 닿는 길이 숨어 있다
한번 무너지면 돌아올 수 없는 길 위에서
몸은 스스로 균형을 잡고 가지만
눈에 넣고 가는 상봉이 앞서서
지친 영혼을 손잡고 길을 밝혀주지 않는다면
몸 스스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그렇게
그때 써레봉 가듯 이승을 걸어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7』(동아일보. 2013년 02월 18일)
-시집『불일폭포 가는 길』(책펴냄열린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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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장독대가 있던 집
―권대웅(1962∼)
햇빛이 강아지처럼 뒹굴다 가곤 했다
구름이 항아리 속을 기웃거리다 가곤 했다
죽어서도 할머니를 사랑했던 할아버지
지붕 위에 쑥부쟁이로 피어 피어
적막한 정오의 마당을 내려다보곤 했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떠나가던 집
빨랫줄에 걸려 있던 구름들이
저의 옷들을 걷어 입고 떠나가고
오후 세 시를 지나
저녁 여섯 시의 골목을 지나
태양이 담벼락에 걸려 있던 햇빛들마저
모두 거두어 가버린 어스름 저녁
그 집은 어디로 갔을까
지붕은, 굴뚝은, 다락방에 모여 쑥덕거리던 별들과
어머니의 슬픔이 묻은 부엌은
흘러 어느 하늘을 어루만지고 있을까
뒷짐을 지고 할머니가 걸어간 달 속에도
장독대가 있었다
달빛에 그리움들이 발효되어 내려올 때마다
장맛 모두 퍼가고 남은 빈 장독처럼
웅웅 내 몸의 적막이 울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8』(동아일보. 2013년 0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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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익숙지 않다
―마종기(1939∼ )
그렇다. 나는 아직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익숙지 않다.
강물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눈빛을 열고 매일 밝힌다지만
시들어가는 날은 고개 숙인 채
길 잃고 헤매기만 하느니.
가난한 마음이란 어떤 삶인지,
따뜻한 삶이란 무슨 뜻인지,
나는 모두 익숙지 않다.
죽어가는 친구의 울음도
전혀 익숙지 않다.
친구의 재 가루를 뿌리는
침몰하는 내 육신의 아픔도,
눈물도, 외진 곳의 이명도
익숙지 않다.
어느 빈 땅에 벗고 나서야
세상의 만사가 환히 보이고
웃고 포기하는 일이 편안해질까.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9』(동아일보. 2013년 0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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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다랭이 논
―오세영(1942∼)
깊은 바다나 옅은 강이나
자고로 물고기는 투망으로 잡았다.
저인망, 안강망, 정치망, 유자망, 채낚기, 통발을 던지고,
끌고, 쳐서 잡는 저
싱싱한 해산물의 펄떡임이여,
어찌 이뿐이겠는가.
나는 새,
기는 짐승 역시 혹은 그물을 치고 혹은
덫이나 올무를 놓아 포획하지 않던가.
무릇
살아 있는 생명은
공중이나 지상이나 물속이나
인연의 끈을 비비고, 꼬고, 묶고, 엮어 만든
매듭에 한번 얽히면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나니
아하, 저 농부,
봄 되어 날 풀리자
논두렁, 밭두렁 손질이 부산하다.
비록 땅에서 소출하는 작물이라 하나
그 역시 뭍에서 사는 생물일시 분명할지니
어찌 투망치지 않고서 거두어 낼 수 있으랴.
봄에 던져
가을에 걷어 올릴 논둑의 저 성긴
저인망 그물이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0』(동아일보. 2013년 0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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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러시앤캐시
―김연희(1981∼)
시로 쓰기에 적합한 소재가 아닐지 모른다
시가 안 될지도 모른다
시를 써야 하는데
시가 아닌 글을 쓰게 되더라도
이건 꼭 써야겠다 싶어서
러시앤캐시는 나쁘다
신용등급 9, 10등급도 대출을 해준다고
전화번호 끝번호를 ‘친구친구’로 해놓고
지하철 안에 지면 광고를 하고 있다
너무 나쁘다
왜 그 사람들이 돈을 빌릴까
집에 누가 많이 아픈가
사업을 너무 크게 벌였나
누구한테 사기를 당했나
캐시로 러시하게 된 사람들
캐시로 러시하게 된 사람들
캐시로 러시하게 된 사람들
러시 러시 러시 러시
캐시 캐시 캐시 캐시
러시 러시 러시 러시
캐시 캐시 캐시 캐시.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1』(동아일보. 2013년 0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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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와온(臥溫)
―송상욱(1939∼)
마을 뒷산이 누워 계신 와불(臥佛)같다
품 안의 젖내음 나는
짐승들 누운 산이 따스하다
빈 속 쓸어내는 저녁답, 이맘때면 으레 그러듯
동네 삽살개 한 마리가 나룻배 닿는 갯가로 내려가
저만치서 뻘밭을 나오는 아낙들을 마중한다
바다 건너 화포 마을 포구에는 닻을 내린 어부들이
막사발 부딪는 소리, 뱃전에 끼륵이는 갈매기들 소리
귓전에 아련히 들려오다 파도에 쓸린다
해 저물어 누울
바다의 잠 자리 와온(臥溫)
속옷 갈아입는 듯
맨살 드러낸 뻘밭에 바닷물이 든다
갯펄에서 조개를 잡던 아낙들이
갯가로 나온 갯바구니 속, 바지랭이들이
뻘물 짜뜰름에 숨결 보챈다
밤이 되면 포구에 든 바다는
밤새 깊은 고뇌에 찬 듯 쏴아 쏴아
한숨을 내쉰다. 그러다
아침이면 고기잽이 배들 제 등에 둥둥 싣고 떠난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2』(동아일보. 2013년 03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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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수취인이 없다
―한석호(1958∼)
시간은
땅거미에 이끌려 한 발짝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다가설수록 무거워지는 나의 걸음 앞에서
마을과 길들은
공손하게 허리를 꺾고 있었다.
지상의 모든 황홀과 빛남이
저처럼 낮게 엎드려 온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나는, 내 안에 품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리라 마음먹었다.
누군가에게 보낸 나의 마음들은
밤하늘 광활한 백지에 활자가 되어 빛나고
억새의 늦은 울음을 한 아름씩
산등성이에 뿌리고 있었다.
입동(立冬) 지나면
나의 그리움도 고뇌에 찬 나의 시편들도
억새풀처럼 날려 사라져 가겠지만
살얼음처럼 투명하게 번져가는 밤하늘은
또 누가 쓰고 누가 반송한 소식들로 쌓이는지
나는 그 어둠의 겉봉을 접고 있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3』(동아일보. 2013년 03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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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심었다던 작약
―유희경 (1980∼)
네가 심었다던
작약이 밤을 타고 굼실거리며 피어나, 그게 언제 피는 꽃인지도 모르
면서 이제 여름이라 생각하고, 네게 마당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그게 아니면, 화분에다 심었는지 그 화분이 어떻게 허연빛을 떨어뜨리
는지 아는 것도 없으면서 네가 심은 작약이 어둠을 끌고 와 발아래서
머리 쪽으로 다시 코로 숨으로 번지며 입에서 피어나고, 둥근 것들은
왜 그리 환한지 그게 아니면 지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가르쳐주
지도 않으면서, 봄은 이렇게 지나고 다시 여름이구나 몸을 벽에 붙여보
는 것이다 그러니 작약이라니 나는 그게 어떻게 생긴 꽃인지도 모르고
나도 아니고 너는 더구나 아닌 그 식물의 이름이 둥그렇게 떠올라 나는
네가 심었다는 그것이 몹시 궁금하고 또 그런 작약이 마냥 지겨운 건
무슨 까닭인지 심고 두 손을 소리 내어 털었을 네가, 그 꽃이, 심었다던
작약이 징그럽게 피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4』(동아일보. 2013년 03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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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봄밤
―최승호(1954∼)
창호지로 엷은 꽃향기 스며들고
그리움의 푸른 늑대가 산봉우리를 넘어간다.
늘 보던 그 달이 지겨운데
오늘은 동산에 분홍색 달이 떴으면.
바다 두루미가 달을 물고 날아 왔으면.
할 일 없는 봄밤에
마음은 멀리 멀리 천리(千里) 밖 허공을 날고
의지할 데가 없어 다시 마을을 기웃거린다.
어느 집 핼쓱한 병자가
육신이 나른한 꽃향기에 취해
아픔도 없이 조용히 죽어가나 보다.
아름다운 용모의 귀신들이
우두커니 꽃나무 그늘에 서서
저승에도 못 가는 찬기운의 한숨을 쉬고
인간축에도 못 끼는 서러운 낯짝으로
누가 좀 따뜻이 나를 대해줬으면 하고
은근히 기다리는 봄밤
때에 절은 묵은 솜뭉치처럼
짓눌린 혼(魂)들을 꾸겨 담은 채
저승열차는 내 두개골 속을 지난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5』(동아일보. 2013년 03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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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물소리 / 황동규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6)
물소리
―황동규(1938∼)
버스 타고 가다 방파제만 바다 위에 덩그러니 떠 있는
조그만 어촌에서 슬쩍 내렸다.
바다로 나가는 길은 대개 싱겁게 시작되지만
추억이 어수선했던가,
길머리를 찾기 위해 잠시 두리번댔다.
삼십 년쯤 됐을까, 무작정 바닷가를 거닐다 만난 술집
튕겨진 문 틈서리에 새들이 둥지를 튼
낡은 해신당 아래 있었다.
저쯤이었나?
나무판자에 유리도 없이 뚫어논 사각(四角) 창에
섬 하나 떠 있고
섬 뒤로 짧고 분명했던 수평선과 식힌 소주
생선 맨살과 주모의 낮은 말소리
그리고 아 물소리가 좋았다.
바다의 감각이 몸부림치며 바위에 몸을 던져
몸부림을 터는,
터는 듯 다시 몸을 던지는 소리.
다른 아무것도 안에 들이지 않고
저물던 바다의 실루엣,
원근 따로 없이 모두 한가지로 저물었다.
바로 이쯤이었지?
술집 사라지고 해신당 걷히고
나무 쪼가리 하나 보이지 않는 바위 사이로
물소리만 철썩이고 있었다.
머뭇거리자 부근 어디에 사는 물샌가
보이지는 않지만 꽤 똑똑한 소리로 끼룩댔다.
더는 없어.
‘더 물소리’는 없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6』(동아일보. 2013년 0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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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농약상회에서 / 함민복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7)
농약상회에서
―함민복(1962∼ )
치마 아욱
마니따 고추
장한 열무
제초대첩 제초제
부메랑 살충제
아리랑 쥐약
먹을 것 생산해줄 씨앗들과
먹을 것 먹어치우는 것들 죽일 약들
극명하게 갈라놓았다
향기롭던 음식도 먹을 수 없게 되면
역한 냄새로 판별하는 내 감각
반성해보다
슈퍼 옥수수
슈퍼 콩
슈퍼 소
꼭 그리해야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다면
차라리
사람들이 작아지는 방법을 연구해보면 어떨까
앙증맞을 집, 인공의 날개, 꼬막 밥그릇
나뭇가지 위에서의 잠, 하늘에서의 사랑
무엇보다도 풀, 새, 물고기들에게도 겸손해질 수 있겠지
계산대 앞에서
푸른빛 쏟아질 듯
흔들리는 아욱 씨앗 소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7』(동아일보. 2013년 0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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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메리 올리버(1935∼)
나는 학교에서 나온다 재빨리
그리고 정원들을 지나 숲으로 간다,
그리고 그동안 배운 걸 잊는 데 여름을 다 보낸다
2 곱하기 2, 근면 등등,
겸손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법,
성공하는 법 등등,
기계와 기름과 플라스틱과 돈 등등.
가을쯤 되면 어느 정도 회복되지만, 다시 불려간다
분필 가루 날리는 교실과 책상으로,
거기 앉아서 추억한다
강물이 조약돌을 굴리던 광경을,
야생 굴뚝새들이 통장에 돈 한 푼 없으면서도
노래하던 소리를,
꽃들이 빛으로만 된 옷을 입고 있던 모습을.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8』(동아일보. 2013년 0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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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앙상블
―황병승(1970∼)
골방의 늙은이들은 우물쭈물하지
죽음이 마치 올가미라도 되는 양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울음을 터뜨리는 아가들
인생이 마치 가시밭길이라도 되는 양
알약을 나눠먹고 밤거리를 배회하는 소녀들
환각이 마치 지도라도 되는 양
편지를 받아든 군인들은 소총을 갈겨대지
이별이 마치 영원이라도 되는 양
술에 취해 뒹굴며 자해하는 노숙자들
육체가 마치 실패의 원인이라도 되는 양
각별하고 깊은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침묵이 마치 그 해답이라도 되는 양
놀람 속에서 바라보는 시인들
순간이 마치 보석이라도 되는 양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9』(동아일보. 2013년 0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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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블
황병승(1970∼)
골방의 늙은이들은 우물쭈물하지
죽음이 마치 올가미라도 되는 양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울음을 터뜨리는 아가들
인생이 마치 가시밭길이라도 되는 양
알약을 나눠먹고 밤거리를 배회하는 소녀들
환각이 마치 지도라도 되는 양
편지를 받아든 군인들은 소총을 갈겨대지
이별이 마치 영원이라도 되는 양
술에 취해 뒹굴며 자해하는 노숙자들
육체가 마치 실패의 원인이라도 되는 양
각별하고 깊은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침묵이 마치 그 해답이라도 되는 양
놀람 속에서 바라보는 시인들
순간이 마치 보석이라도 되는 양
월간『현대시』(2013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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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뜻하고 명쾌하게 읽힌다. 과연 황병승은 재기 넘치는 시인!
각 연이 두 행씩인데, 늙은이와 죽음, 아가와 가시밭길, 배회하는 소녀들과 환각, 노숙자와 실패, 깊은 감정과 침묵 등등으로 위 행과 아래 행이 앙상블을 이룬다. 위 행 시구들은 실제 삶의 면모들이고 아래 행 시구들은 시인의 혜안으로 꿰뚫어 본 그 이면이다. 참, 이러고들 산다. 실상 그렇지 않아? 아닌가? 죽음 앞에서 벌벌 떨고 이별 앞에서 상욕을 하고, 좀체 감정의 올가미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사연 넘치는 인생이여! 시인은 울적한 풍경들을 ‘쇼트컷’으로 전개하는데, 그 시각과 필치가 예리한 만큼이나 어딘지 조롱기가 느껴진다. (시인, 당신은 이렇게 인생을 잘 아는군요. 그래서 ‘쿨하게’ 사시나요?) 그 조롱기는 문장을 둥글게 매듭지으며 후렴구처럼 되풀이돼 음악성을 높이는 ‘되는 양’이란 시어에서도 오는 것 같다.
‘놀람 속에서 바라보는 시인들/순간이 마치 보석이라도 되는 양’, 이 구절을 얻고 시인은 보석이라도 되는 양 미소 지었으리.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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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승, 황인숙 두 시인에게
두 사람의 황 시인들이 잘못 보고 지나친 맞춤법 하나 정정. 사실 이 말은 둘뿐만 아니라 많은 시인들이 잘못을 범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발표할 때의 잘못인데, 2연 1행에 '내딛으며'라는 정서법의 오류를 '내디디며'로 바로잡습니다.
(옮겨 적는 이가 바르게 정정하면 좋았을 걸)
기본형이 '내디디다'입니다. 줄임말 '내딛다'를 쓴다면 '내딛고', '내딛지' 같은 경우에 한합니다. '내딛며'는 쓸 수 없지요.
또한 어미 '~며'가 연결될 때에는 '내딛으며'라는 이상한 줄임말을 쓸 수 없습니다. 줄지 않은 그대로 '내디디며'로 써야 합니다.
그건 마치 '가지고'의 준말 '갖고'가 허용되는 것을 이용하여, '가지고'라고 써야 할 것을 엉뚱하게 '갖이고'라 쓰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줄임말은 말(발음)의 경제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음절 수가 똑같은 줄임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_강인한
<다음 카페 푸른시의 방>
http://cafe.daum.net/poemory/H5qF/1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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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하염없이
―양선희(1960∼)
누가 반쯤 가린 세상을 보려고 나는
창을 닦기도 하고
일간지와 주간지와 월간지와 계간지를
정기구독해서 숙독하기도 하고
라디오와 텔레비전 뉴스를 경청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소주를 나눠 마시며
역사와 광기를 얘기하기도 하고
담배연기로 혀끝에 감기는
하루를 곁눈질해 보기도 하고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곳으로
총알택시를 타고
휙, 휙, 휙, 휘익
풍경들을 스쳐 보내고 가보기도 하고
처진 걸음으로 돌아와 다시 내 몫의 죄를 끌고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다가
짓무른 다리에 약을 바르며 나는
누가 어디론가 보내 버린 이곳의 절반 이상이
내용증명으로 배달되어 오길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0』(동아일보. 2013년 0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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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철새 / 윤후명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1)
철새
―윤후명 (1946∼)
철새들 乙乙乙 날아간다
乙乙乙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러나 乙乙乙
고개를 들라고 날개를 친다
모름이 곧 앎이니
날아갈 뿐이니
삶이 곧 낢이니
날개를 친다
너는 어느 땅에 붙박혀 있는가
묻는 상형문자 乙乙乙
음역하여 내 삶에 숨을 불어넣는다
을을을을을을을을을을을을을…의
소리글자 날개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1』(동아일보. 2013년 03월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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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지상의 방 한 칸
―이시영(1949∼)
신림 7동, 난곡 아랫마을에 산 적이 있지. 대림동에서 내려 트럭을 타고 갔던가, 변전소 같은 버스를 타고 갔던가. 먼지 자욱한 길가에 루핑을 이고 엎드린 한 칸 방. 누나와 조카 둘과 나의 보금자리였지. 여름밤이면 집 앞 실개천으로 웃마을 돈사의 돼지똥들이 향기롭게 떠가는 것을 보며 수제비를 먹었지. 찌는 듯한 더위에 못 이겨 야산에 오르면 시골처럼 캄캄하던 동네. 개천 건너 그 동물병원 같은 보건소는 잘 있는지 몰라. 눈이 커다란 간호원에게 매일 아침 붉은 엉덩이를 내리고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대씩 맞고 다녔지. 학교가 너무 멀어 오전 수업을 늘 빼먹어야 했던 집. 아니 결핵을 앓던 나를 따스히 보살펴 주던 집. 겨울이면 루핑이 심하게 울어 조카의 어린 몸을 난로처럼 안고 자던 방. 아니 봄을 기다리던 누님과 나의 지상의 좁은 방 한 칸.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2』(동아일보. 2013년 03월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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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매의 눈
―이학성 (1961∼)
언제부턴가 내 눈에 매가 들어와 있다 그것은 내 눈동자 속에서 사납게 이글거린다 하는 수 없이 난 매의 눈으로 세상을 쏘아본다 그러니 다들 내 눈을 피한다 그럴수록 내 눈은 세상 구석구석을 매섭게 찌른다 차갑고 날카로운 매의 눈, 난 그런 눈 따위 바란 적 없다 눈곱만큼도 누구에게 해 끼치고 싶지 않았다 매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들어왔다 누군가는 그 사나운 매를 꺼내 어서 날려 보내라고 내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걸 꺼내 날려 보낼 수 있었다면 매가 눈으로 들어오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겠는가 매는 무엇 때문에 내게 들어왔는가 난 언제까지 매의 눈으로 세상을 떠돌아야 하는가 매의 눈으로 세상을 지켜보는 건 참으로 지난한 일이다 언젠가 매는 허공으로 고요히 물러나겠지 난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3』(동아일보. 2013년 03월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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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활짝 편 손으로 사랑을
―빈센트 밀레이(1892∼1950)
활짝 편 손에 담긴 사랑, 그것밖에 없습니다.
보석 장식도 없고, 숨기지도 않고,
상처 주지 않는 사랑.
누군가 모자 가득 앵초 꽃을 담아 당신에게
불쑥 내밀듯이,
아니면 치마 가득 사과를 담아 주듯이
나는 당신에게 그런 사랑을 드립니다.
아이처럼 외치면서
“내가 무얼 갖고 있나 좀 보세요!
이게 다 당신 거예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4』(동아일보. 2013년 03월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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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대본 읽기
―김창완 (1954∼)
햇살 뿌연 회의실에 둘러앉아 대본을 읽는다
오리털 파카를 입고 임금을 읽고
빨간 추리닝을 입고 대감을 읽는다
백정은 운동화를 신었고
며느리는 슬리퍼를 달랑거리고 있다
대사가 없는 노복은 문자를 보내고 있고
조연출은 읽는 사람들을 눈동자로 좇아다닌다
공주는 계속 연필만 돌리고 있고
성질 급한 감독님은 지문을 읽다
배우들 대사도 따라 읽는다 더 큰 소리로
중전이 읽으면 대궐이 된다
할아범이 읽으면 초가집이 되고
의원이 읽으면 약방이 되고
포졸이 고함치면 포도청이 된다
바람이 불고 비 오고 눈 오고 세월 흐르고
말이 달리고 화살이 날아가고
영감이 죽고 아기가 나온다
그러나 바로 거기도 바로 그때도 바로 그 사람도 아니다
그저 한낮의 풍경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5』(동아일보. 2013년 04월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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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뱀이 된 아버지
―박연준(1980∼)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
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
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
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
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
나처럼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6』(동아일보. 2013년 04월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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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모과꽃잎 화문석
―공광규(1960∼)
대밭 그림자가 비질하는
깨끗한 마당에
바람이 연분홍 모과꽃잎 화문석을 짜고 있다
가는귀먹은 친구 홀어머니가 쑥차를 내오는데
손톱에 다정이 쑥물 들어
마음도 화문석이다
당산나무 가지를 두드려대는 딱따구리 소리와
꾀꼬리 휘파람 소리가
화문석 위에서 놀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7』(동아일보. 2013년 04월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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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발의 고향
―최문자 (1943∼)
내가 나라는 때가 있었죠
이렇게 무거운 발도
그때는 맨발이었죠
오그린 발톱이 없었죠
그때는
이파리 다 따 버리고
맨발로 걸었죠
그때는
죽은 돌을 보고 짖어 대는
헐벗은 개 한 마리가 아니었죠
누구 대신 불쑥 죽어 보면서
정말 살아 있었죠
그때는
그때는
세우는 곳에 서지 않고
맨발로
내가 나를 세웠죠
그때는
내 이야기가 자라서
정말 내가 되었죠
불온했던 꽃 한철
그때는
맨발에도 별이 떴죠
그 별을 무쇠처럼 사랑했죠
날이 갈수록
내가 나를 들 수 없는
무거운 발
가슴에서 떨어져 나간 별똥별이죠
발도 고향에 가고 싶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8』(동아일보. 2013년 04월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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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아침
―이상(1910∼1937)
캄캄한 공기(空氣)를 마시면 폐(肺)에 해(害)롭다. 폐벽(肺壁)에 끌음이 앉는다. 밤새도록 나는 몸살을 앓는다.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 실어내가기도 하고 실어들여오기도 하고 하다가 잊어버리고 새벽이 된다. 폐(肺)에도 아침이 켜진다. 밤사이에 무엇이 없어졌나 살펴본다. 습관(習慣)이 도로 와 있다. 다만 치사(侈奢)한 책이 여러 장 찢겼다. 초췌(憔悴)한 결론(結論) 위에 아침햇살이 자세(仔細)히 적힌다. 영원(永遠)히 그 코 없는 밤은 오지 않을 듯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9』(동아일보. 2013년 04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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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지우개
―김경후 (1971∼ )
1
자정의 책상엔
지우개 또는 얼룩진 종이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운다
한때 사람들은 빵 조각으로 글씨를 지웠지
빵이 아니라 망각을 달라
2
지우개, 외딴 성당의 고해소
그것에겐 흙바닥에 떨어진 미사보
끊어진 장미 묵주 냄새가 난다
어둡게 피 흘리는 기억들
내 혀에서 떨어져 가루로 흩어져라
모든 기억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지웠다는 기억
입속에서 잿빛 성체가 부서져 떨어진다
3
핏자국을 핥는 혓바닥, 지우개
흉터들의 감옥이자 숙성실
문지르고 문지르고 또 문지른다
이제 지우개가
나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그린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0』(동아일보. 2013년 0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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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나의 연봉
―김요아킴(1969∼)
세상의 모든 가치는 몸이다
월요일 새벽 출근을 서두르는
신문 가판대로 비싼 몸을 보았다
FA 시장에 나온 거물급의 한 타자
프로가 뭔지를 보여 주는 값을
1면으로 채웠다
땀으로 퇴적된 실력은 범접조차 힘든
연봉으로 관중들을 불러 모으고
아쉽게 어제 경기를 비긴 나는
얼핏 내 몸값을 더듬어 보았다
한국인 평균보다 모자라는 키에
약간 넘쳐나는 몸무게
어린 시절 동네 야구에서 틔운 싹을
석삼년 사회인 팀에서 꽃 피우는
나의 연봉은 마이너스
유니폼을 맞추고 글러브를 사고
꼬박꼬박 회비를 부으며
경기의 승패에 상관없이 기울이는 술잔의 수
덤으로 일요일을 차압당한
마누라의 잔소리와 딸들의 원성
나의 통장에 찍히는 몸값은 확실한 마이너스
여전히 세상의 가치는 몸이 지배하지만
센터를 가르는 시원한 안타와
역동적으로 아슬하게 아웃시킬 송구를 꿈꾸며
다음 경기가 또 설레어지는 나에겐
사실 연봉이란 말은 사치일 뿐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1』(동아일보. 2013년 0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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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낡은 유모차와 할머니
장대송
이 골목의 아침은 자기 말만 늘어놓고 슬그머니 사라진 흔적들이 나뒹굽니다. 고되고 고된 것들이 뱉어낸 구겨진 말들, 조합해보려고도 했지요. 구겨진 담뱃갑, 카드 영수증, 무가지 뭉치, 대리운전 광고물, 정말이지 지나가고 싶지 않은, 사라지기도 뭐한 좁음과 넓음, 허허벌판, 어디 감당이나 하겠는지요.
담뱃갑을 굳이 구겨 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눈을 슬쩍 감으면 이 허접한 곳은 그대가 살던 곳, 이미 사라진 길을 낡은 유모차를 끄는 할머니가 지나가곤 합니다. 어떤 예쁜 당나귀가 타고 다녔는지 할머니는 가만히 밀고 와서는 전봇대 표시판에 끼인, 배수구에 반쯤 걸린, 불법 주차된 차의 윈도 블러시에 걸어놓은 허접한 것들을 수거해가곤 합니다.
일용할 양식. 할머니의 낡은 유모차에 실린 미치도록 가벼운 것들은 정말이지 일용할 양식이겠지요. 골목은 다시 좁음과 넓음, 허허벌판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린이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귀걸이를 한 여자와 다크 서클이 얼굴 전체로 흘러내리는 남자가 서로 바라보듯 허허롭기만 한데요. 저승 같기도 하고 이승 같기도 하고 산처럼 멈춰 있기도 한 이 뒤숭숭한 골목을 어떻게 지나가야 잘 지나갔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당치도 않은 이 한평생.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2』(동아일보. 2013년 0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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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리미티드 에디션
―김박은경(1965∼ )
통화 중인 명품 실리콘이다 출렁거리는 마놀로 블라닉이다 빛나는 샤넬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임계까지 보톡스다 거꾸로 달려가는 여우다 춤추는 노란 머리 레게 스타일이다 피어싱한 입술의 코카콜라다 속성 발효 중인 근육 속으로 팡팡 터지는 힘줄들이다 권총과 해골의 타투다 금발의 늑대 본좌다 동물적 본능의 타이밍이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야릇하게 흔들리는 길고 흰 꼬리, 손가락을 들어 프리덤을 우주로 날려주는 웨스트사이드 힙합 센스다 하나 둘 하나 잽싸게 구르는 지구다 변종의 히어로, 발톱과 발성의 발정이다 무국적의 혼종이다 오, 마이 허니 러버 그렇고 그렇지 백미처럼 흰 토끼새끼다 토끼똥처럼 발사하는 붉은 눈알들이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신상 해골들이다 얽히고설킨 꼬리들이다 놀라 떨어뜨리는 신형 폰이다 나뒹굴어 쪼개지는 세계적인 사과 반쪽이다 베어 물기도 전에 닳고 닳은 에디션, 여우와 늑대가 만나 토끼를 낳다니 평화로운 비둘기 가족이라니 다 함께 붉은 발을 들어 중얼중얼, 구구(求求)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3』(동아일보. 2013년 0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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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나의 싸움
―신현림(1961∼ )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4』(동아일보. 2013년 0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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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꺼진 불
―윤성근(1960∼2011)
죽음에 대해서도 농담을 하고
내리는 빗줄기를 타고 쿨하게 가고 싶다.
의연하게 인격을 지키고 통증을 다스리고
칭찬받는 환자이고 싶다. 난처한 물음도 안 던지고
회진이 늦어도 불평하지 않고
초연하고 싶고, 물러나 있고 싶고, 객관적으로 보고 싶다.
누가 한 세기를 더 살다 가는가.
누가 예술 작품을 위해 순교하는가.
저 건강한 세상에 장애를 느끼는 이가 한둘이든가.
불 보듯이 꺼진 불을 만져서 재차 확인하듯이
그런데 왜 그것이 나는 이렇게 어려운가.
그것이 나는 왜 안 되는가. 왜 안 좋아졌다고
삐치고, 차도가 있다는 그 말을 듣기 원하는가.
아내의 표정을 훔쳐보고
문병객의 눈길로 바로 치어다보기 어려워하는가.
왜 이런 걸 적어 새로운 무덤을 또 짓는가.
마음의 거처? 슬픔의 집적소?
왜 쿨하지 못하고 왜 농담도 못 받아넘기는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5』(동아일보. 2013년 0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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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한마디의 말
―고트프리트 벤(1886∼1956)
한마디의 말, 한 편의 글―. 부호로부터 올라오는
삶의 인식, 의미의 돌출,
태양은 뜨고, 대기는 침묵하네.
모든 것들이 그 한마디에 몰리듯 굴러가네.
한마디의 말―. 한 개의 빛남, 한 번의 비상, 한 개의 불,
불꽃 한 번 튕기고, 흐르는 한 번의 별빛―.
다시 어둠이 오네, 이 세상과 내 둘레의
텅 빈 공간에 무섭게 내리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6』(동아일보. 2013년 0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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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사랑 또는 두 발
―이원 (1968∼)
내 발 속에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져 있다
벼랑처럼 감추어져 있다
달처럼 감추어져 있다
울음처럼 감추어져 있다
어느 날 당신이 찾아왔다
열매 속에서였다
거울 속에서였다
날개를 말리는 나비 속에서였다
공기의 몸 속에서였다
돌멩이 속에서였다
내 발 속에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져 있다
당신의 발자국은 내 그림자 속에 찍히고 있다
당신의 두 발이 걸을 때면
어김없이 내가 반짝인다 출렁거린다
내 온몸이 쓰라리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7』(동아일보. 2013년 0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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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어떤 음계에서
―문동만 (1969∼ )
자주 자는 집은 컨테이너이거나 달세를 주는 여관방,
자주 먹는 밥은 함바집의 백반이었던 그가
삼십년 객짓밥으로 얻은 만년 셋방에 곰팡이꽃을 피워놓고
밥상을 차려 기다렸다
늘 막막했던 그가 용돈까지 쥐어준다
‘아무려면 혼자 사는 내가 낫지’가 그의 잠언
창을 열면 집 밖도 실내인 작은 집
소소한 몇 개의 반찬 냄새는 이 집을 벗어나지 못한다
빗방울은 허공에 걸린 거미줄을 튕긴다
이십오년 된 창고형 상가를 털어 칸칸이
허술한 담을 쌓고 그것을 아파트라 부르는 곳에
그가 살고 있다 그는 살 수 있었다
그가 만든 수많은 집들의 바깥에서만
빗방울을 견디는 거미줄, 오로지 가볍고 질긴 장력으로
살았던 탁음이 깊은 말라깽이 사내의 집
복도엔 그만그만한 사람들의 생이 얽힌 물발자국
발바닥으로 부르는 노동가, 따라 부르기 버거워
어떤 음계에서 나는 미끄러지고 만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8』(동아일보. 2013년 05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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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폐선에 기대어 / 남진우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9)
폐선에 기대어
―남진우(1960∼)
이른 아침 눈뜨면
머리맡에 배 한 척 밀려와 출렁이고 있네
찢긴돛폭사이말간햇살들바삭거리며부서져내리고있네
그 배 문가에 기대어 놓고
바람이 부는 쪽으로 한없이 걸어가
하루 종일 이 일 저 일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오면
어디론가 가고 없는 배
잠들기 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종이를 접어 배를 만드네
한 척 두 척 내 손을 떠난 배는
내 방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떠나가고
험한 물살에 시달리다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버리고
다시 누워서 눈을 감으면
이 밤도 저 멀리서 흔들리며 다가오는 배가 보이네
물살에 실려 그 배는 이리저리 떠돌다
잠에서 깰 무렵이면 어느덧 내 머리맡에 와 있네
배를 얻고 잃기를 되풀이하며
매일 낮 매일 밤 나 세상을 떠돌았네
닿을 길 없는 부두를 찾아 덧없이 헤매 다녔네
어느덧 늙고 지친 내가 눈을 뜨면
어김없이 머리맡에 와 나를 굽어보고 있는 낡은 배 한 척
부서진 뱃전에 머리 기대고
나 다시 떠나야 할 하루의 먼 길을 헤아려보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9』(동아일보. 2013년 05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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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사랑의 동전(銅錢) 한 푼
―김현승(1913∼1975)
사랑의 동전 한 푼
위대(偉大)한 나라에 바칠 수는 없어도,
사랑의 동전 한 푼
기쁘게 쓰일 곳은 별로 없어도,
사랑의 동전 한 푼
그대 아름다운 가슴을 꾸밀 수는 없어도,
사랑의 동전 한 푼
바다에 던지는 하나의 돌이 될지라도,
사랑의 동전 한 푼
내 맑은 눈물로 눈물로 씻어
내 마음의 빈 그릇에 담아
당신 앞에 드리리니……
사랑의 동전 한 푼
내 눈물의 곳집 안에 넣을 때,
이 세상의 모든 황금(黃金)보다도
사랑의 동전 한 푼
더욱 풍성히 풍성하게 쓰이리니…….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0』(동아일보. 2013년 05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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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강으로 나간 사람 / 조용미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1)
강으로 나간 사람
―조용미(1962∼)
아무 일 모르고 강가로 가는 사람은
흰 아그배꽃 핀 걸 알게 되고
바람부는네시를모르고강가로가는사람은
바람 많은 다섯 시를 가지게 되고
거북한 속을 달래려 강가로 나가는 사람은,
아무 일 모르는 흰 아그배꽃은
강가 걷는 걸음걸일 알게 되고
바람 많은 강은 바람 많은 다리를 만들고
물무늬를 그리고,
흰 아그배꽃을 피우고 강은
찬바람을 줄이느라 강물은
깊어 혼자
아무 일 모르고 강으로 나간 사람을
세워 두고, 세워 두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1』(동아일보. 2013년 05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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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잔
―이경례(1962∼)
접동길 산 번지에 때죽나무 칵테일바,
쏙쏙 입점하였네 느티나무 상호야
느티나무 독서실 느티나무 식당
느티나무 슈퍼, 나무에
잎사귀 달리듯 하지만
바람의 기척에도 철렁,
가슴 쓸어내리는 꽃숭어리 잔들이
물구나무서기로 매달린
때죽나무 스탠드바에 앉아
이국 향기 물씬한 칵테일, 치치,
바랄라이카, 모스코 뮬을 거푸
마시는 오후
가장 향기로운 한때를 채웠다
비운 잔들의, 하얀 꽃무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2』(동아일보. 2013년 0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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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이력서
―오은(1982∼)
밥을 먹고 쓰는 것.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나는 잘났고
나는 둥글둥글하고
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
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밤에는, 그리고
오늘밤에도
내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달콤한 혀로 속삭이듯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다음 버전이 언제 업데이트 될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 쓰고 나면 어김없이 허기.
아무리 먹어도 허깨비처럼 가벼워지는데
몇 줄의 거짓말처럼
내일 아침 문서가 열린다.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3』(동아일보. 2013년 0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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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오래간만이다 522번
―김영승(1958∼ )
오래간만이다 522번
이 겨울비 내리는 밤
나는 실내(室內)에서
밖의 너를 본다
비 맞는 마을버스를
오래간만이다 522번
우중(雨中) 마을버스는
비행기 같고
포장마차 같고
선술집 같고
선실(船室) 같다
17년 전에 처음 타봤지만
이번엔 정말 오래간만이다 522번
마을버스야
입김에
성에에
착하게만 흘러내리는
네온 간판
명성치과도 김재준 약국도 안녕?
나는
고공(高空) 비행기 객실 같은
실내에 앉아
몇 년 전
어느 벚꽃 만발한 날
벚꽃 사이를 뚫고 달리는 너에게
손짓을 한다
오래간만이다
나의 522번 마을버스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4』(동아일보. 2013년 0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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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푸른 도화선 속, 꽃을 몰아가는 힘이
―딜런 토머스(1914∼1953)
푸른 도화선 속, 꽃을 몰아가는 힘이
푸른 내 나이 몰아간다, 나무뿌리 시들리는 힘이
나의 파괴자다.
하여 말할 수 없구나, 허리 굽은 장미에게
내 청춘도 똑같은 겨울 열병으로 굽어진 것을.
바위틈으로 물 몰아가는 힘이
붉은 내 피를 몰아간다, 요란한 강물 말리는 힘이
내 피를 밀랍처럼 굳힌다.
하여 말할 수 없구나, 내 핏줄들에게
산(山) 샘물에 똑같은 입이 빨고 있는 꼴을.
웅덩이 휘젓는 손이
뻘모래를 움직인다, 부는 바람을 얽매는 손이
나의 수의(壽衣) 돛폭을 감는다.
하여 말할 수 없구나, 매달린 사람에게
형리의 회무덤이 내 진흙으로 만들어진 꼴을.
시간의 입술이 샘 머리에 거미처럼 빨아댄다.
사랑은 뚝뚝 흘러 모인다, 그러나 떨어진 피가
그녀의 상처를 달래리라.
하여 말할 수 없구나, 기후의 바람에게
시간이 별무리 둘레에 하늘을 재깍거려 놓은 꼴을.
하여 말할 수 없구나, 애인의 무덤에게
내 홑이불에 꼭 같은 굽은 벌레가 기어가는 꼴을.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5 (동아일보. 2013년 0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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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백주대낮에 여자들이 칼을 들고 설치는 이유
―문성해(1963∼ )
이 시절에는요
여자들이
시렁 위에 얹힌 작지만 앙칼진 칼 하나씩 손에 들고 나오는데요
여자들이 칼을 들고 설쳐도 암말 못하는 건
지천에 내걸린 풋것들을 오살지게 베어다
서방과 새끼들을 거두기 때문인데요
이 시절에는요
세상 모든 여자들은 코밑이 거뭇해지고
팔뚝 속에 알이 차올라서는
지천에 돋는 풋것들이 아까워라, 아까워라
저도 모르게 들판과 한판 엉겨붙게 되는데요
난생처음 억세디억센 수컷이 되는데요
가끔씩 그 독한 칼날에
논배미가 잘리고 칡뿌리가 잘리고 수맥이 잘리기도 하는데요
이 시절 여자들은요
푸줏간 안주인이 내걸린 고기들을 슥슥 잘라가듯
이 나무 이 바람 이 구름을
훌훌 베어 망태기에 담아서는
종다리처럼 지저귀며 언덕을 넘어가는데요
하늘도 암말 못한다는데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6』(동아일보. 2013년 0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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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문태준(1970∼)
오늘은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길을 가다 우연히 갈대숲 사이 개개비의
둥지를 보았네
그대여, 나의 못다 한 말은
이 외곽의 둥지처럼 천둥과 바람과 눈보
라를 홀로 맞고 있으리
둥지에는 두어 개 부드럽고 말갛고 따뜻한
새알이 있으리
나의 가슴을 열어젖히면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나의 말은
막 껍질을 깨치고 나올 듯
작디작은 심장으로 뛰고 있으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7』(동아일보. 2013년 05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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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길
김기림(1908∼?)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 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뿍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 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8』(동아일보. 2013년 05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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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보름
―장승리(1974∼)
설익은 감이 옥상 계단 위로 떨어진다
쿵, 쿵쿵 누가 누굴 때리는 소리 같다
자고 있던 강아지들이 벌떡 일어나
동시에 짖어댄다
썩은 과즙이 누렇게 변색된 감 주위를
달무리처럼 에워싸고 있다
어느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일까 저 달은
썩는 순간부터 눈부셔지는 달빛을 뭐라고
부르나요 당신은
자고 있던 사람도 벌떡 일어나
컹컹 짖게 만드는
그 옛날 끝없는 계단으로 떨어진
오늘 밤 저 달은
누가 누굴 계속 때리는 소리 같은데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9』(동아일보. 2013년 0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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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없는 나라
―함기석(1966∼ )
없는 초원에서
없는 말들이
없는 갈기를 휘날리며
없는 꿈길을 달려 내게로 온다
없는 안장에 나를 태워
없는 나라로 간다
없는 나라에 도착해 보니
없는 사람들이 보인다
없는 길들이 보인다
없는 시계들이 걸어다닌다
없는 거울들이 나무들이 걸어다닌다
없는 시인들이 없는 시를 쓴다
없는 화가들이 0차원 그림을 그린다
없는 영화관에선 없는 영화가 상영되고
없는 개들이 없는 담배를 피며 내게 묻는다
없는 당신!
없는 삶을 끌고 왜 여기까지 왔소?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0』(동아일보. 2013년 0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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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기차표 운동화
―안현미(1972∼)
원주시민회관서 은행원에게
시집가던 날 언니는
스무 해 정성스레 가꾸던 뒤란 꽃밭의
다알리아처럼 눈이 부시게 고왔지요
서울로 돈 벌러 간 엄마 대신
초등학교 입학식 날 함께 갔던 언니는
시민회관 창틀에 매달려 눈물을 떨구던
내게
가을 운동회 날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단풍이 흐드러지고 청군 백군 깃발이
휘날려도
끝내, 다녀가지 못하고
인편에 보내준 기차표 운동화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토닥토닥
집으로 돌아온 가을 운동회 날
언니 따라 시집 가버린
뒤란 꽃밭엔
금방 울음을 토할 것 같은
고추들만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지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1』(동아일보. 2013년 0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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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지붕 아래의 잠
―백현(1946∼)
언덕 위에 서서 재개발지역 끄트머리에 남아있는
기와지붕을 인 한옥들을 본다
부신 봄볕 아래 소멸을 예감한 듯
검은 지붕들이 어둡다
기왓골에 한 뼘 넘게 풀들이 자라고
아직은 그 아래 깃든 삶을 덮어주는 온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 한 대가 낙타처럼
꾸부정하게 좁은 길을 내려간다
남은 사람들도 곧 묵은 살림살이를 모아
오랜 터전을 떠날 것이다
잠 속으로 부드럽게 스미던 빗소리와
꽃밭과 장독대가 있는 작은 마당을 두고
사막처럼 퍼져 있는 길을 지나
해가 들지 않는 공동주택에서
천장을 지나는 물소리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2』(동아일보. 2013년 06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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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여름의 자세
―김성대(1972∼)
여름, 물속에서 안고 있던 자세를 어느 날, 기억해 냈다
여름, 물속에서 안고 있던 자세로 잠이 들었다
모래알이 물결에 씻기는 여름,
잠 속으로 떠내려온 모래알
따뜻한 물결 위를 떠다녔다
발이 닿지 않았지만
많은 여름은 놓아두고
잠깐 동안의 자세가 여름으로 떠오르는지
하나의 해바라기를 위해 모두가 푸른
여름,
오래전 빛 속에서
물결 가득한 빛 속에서
잠시 그가 되는 일
모래는 하나의 여름을 향하여 흐르고
그 여름의 나는 오늘을 이해한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3』(동아일보. 2013년 06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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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이것은 사람이 할 말
―김소연(1967∼)
늙은 여가수의 노래를 듣노니
사람 아닌 짐승의 발성을
암컷 아닌 수컷의 목울대를
역류하는 물살
늙은 여가수의 비린 목소리를 친친 감노니
잡초며 먼지덩이며 녹슨 못대가리를
애지중지 건사해온 폐허
온몸 거미줄로 영롱하노니
노래라기보다는 굴곡
노래라기보다는 무덤
빈혈 같은 비린내
관록만을 얻고 수줍음을 잃어버린
늙은 여가수의 목소리를 움켜쥐노니
부드럽고 미끄러운 물때
통곡을 목전에 둔 부음
태초부터 수억 년간 오차 없이 진행되었던
저녁 어스름
그래서 이것은 비로소 여자의 노래
그래서 이것은 비로소 사람이 할 말
그래서 이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우노니
우리가 발견한 당신이라는
나인 것만 같은 객체에 대한 찬사
살면서 이미 죽어본 적 있었다던
노래를 노래하노니
어차피 헛헛했다며
일생이 섭섭하다며
그럴 줄 알았다며 그래서 어쩔 거냐며
늙은 여가수의 노래에 박자를 치노니
까악까악 까마귀
훌쩍훌쩍 뻐꾸기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4』(동아일보. 2013년 06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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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동해남부선
―백무산(1955∼)
바닷가가 보이는 작은 역에 기차는 서네
이제 막 다다른 봄볕을 부려놓고
동해남부선은 남으로 길게 떠나는데
방금 내 생각을 스친, 지난날의 한 아이가
바로 그 아이가, 거짓말처럼 차에서 내려
내 차창을 지나가고 있네
아이를 둘씩이나 걸리고 한 아이는 업고
양손에는 무거운 짐을 들고
내가 오래전 이곳 바닷가에서 일하던 때
소나기에 갇힌 대합실에서 오도 가도 못할 때
우산을 씌워주고 빌려주던 저 아이
작은 키에 얼굴은 명랑한데
손은 터무니없이 크고 거칠었던 아이
열일곱이랬고 고무공장에 일 다닌댔지
우산을 돌려주려 갔다 빵봉지를 들려주다
잡고 놓지 못했던 손
누가 저 아이 짐 좀 들어주오
기차는 떠나는데
봄볕이 저 아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데
누가 제발 저 아이 짐 좀 들어주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5』(동아일보. 2013년 0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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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날마다 설날
―김이듬(1969∼)
올해는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리
올해는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리
계획을 세운지 사흘째
신년 모임 뒤풀이에서 나는 쓰러졌다
열세 살 어린 여자애에게 매혹되기 전 폭탄주 마셨다
천장과 바닥이 무지 가까운 방에서 잤다
별로 울지 않았고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날마다 새로 세우고 날마다 새로 부수고
내 속에 무슨 마귀가 들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주문을 외는지
나는 망토를 펼쳐 까마귀들을 날려 보낸다
밤에 발톱을 깎고 낮에 털을 밀며
나한테서 끝난 연결이 끊어진 문장
혹은 사랑이라는 말의 정의(定義)를 상실한다
설날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서럽고 원통하고 낯선 날들로 들어가는 즈음
뜻한 바는 뺨에서 흘러내리고
뜻 없이 목 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일은
백 사람을 사랑하는 일보다 어려운 이성의 횡포
수첩을 찢고 나는 백 사람을 사랑하리
무모하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며
마실 수 있는 데까지 마셔보자고 다시 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6』(동아일보. 2013년 0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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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꽃싸움
―김요일(1965∼)
달빛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당신을 안고 붉은 밤을 건너면,
곱디곱다는 화전(花田)엘 갈 수 있나요?
화전(花田)엘 가면
노랗고 파란 꽃그늘 아래 누워
지독히도 달콤한 암내 맡으며
능청스레 꽃싸움할 수 있겠지요?
당신은 새벽 별보다 찬란하게 웃고
나는 밤새 문신(文身) 그려 넣으며
환장할
노래를 부를 테지요
화전(花田)이면 어떻고, 화전(火田)이면 어때요
아침가리 지나 곰배령이면 어떻고,
별꽃 피는 만항재면 또 어때요
잃을 것 뺏을 것도 없는 빈 들에 가서
꽃집 지어 벌 나비 들게 하고
수줍은 미소에도 찰랑거리는 도라지꽃처럼
속살속살 지저귀며
하루만, 하루만 더 살아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7』(동아일보. 2013년 06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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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내가 바라보는
―이승희(1965∼)
처마 밑에 버려진 캔맥주
깡통, 비 오는 날이면
밤새 목탁 소리로
울었다. 비워지고 버려져서 그렇게
맑게 울고 있다니.
버려진 감자 한 알
감나무 아래에서 반쯤
썩어 곰팡이 피우다가
흙의 내부에 쓸쓸한 마음 전하더니
어느 날, 그 자리에서 흰 꽃을 피웠다.
그렇게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
한 세상을 끌어가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8』(동아일보. 2013년 0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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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시상식 모드
―박상수 (1974∼)
처음 만났지만 차라리 고백을 해버린다면 어떨까? 블랙 미니 드레스에, 펄 립글로스를 바르고는
예전부터 당신을 존경해왔어요
샹들리에 불빛 속에서, 당신은 짓밟혀왔고 평생 자신과 싸워왔군요, 그래요, 알아요, 당신이 내게 오신다면 척추가 무너진 것처럼 인사할 거예요
하지만 상이라는 것은 이제 너에겐 내리막길만 남았다는 저주일 텐데
내내 눈감았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네요, 무례하군 참으로 마이너한 에너지다, 오늘 이 자리는 묘하게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있어서, 모아놓으면 병이 돌 것 같은데, 나무들은 비틀립니다 새들은 낮게 날아요 비바람 속 미친 노파가 욕을 해대지만 여기는 스카이 그랜드볼룸
나에 대해 좀더 얘기해주겠어요?
사람들과 손키스를 나누며 당신, 드디어 당신! 녹음한 내 목소리를 억지로 들은 것처럼 벌써 오줌이 마려워, 나는 힙을 조금 들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대만족해주겠다는 표정으로.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9』(동아일보. 2013년 0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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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외계(外界)
―김경주(1976∼)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 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0』(동아일보. 2013년 0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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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바다 등나무
―데릭 월컷(1930∼)
내 친구의 반은 죽었다
네게 새 친구를 만들어 주지, 땅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옛 친구들을 그 모습대로 돌려주오,
결점이랑 모두 함께. 난 외쳤다.
오늘 밤 나는 등나무 숲을 스쳐 오는
희미한 파도 소리에서 친구들의
말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달빛 어린 수없는 잎새 같은 바위 위를
걸어서 저기 하얀 길을 혼자 갈 수도 없고,
지상의 짐을 벗어나는 부엉이의
꿈꾸는 동작으로 떠다닐 수도 없다.
아, 땅이여, 네가 가두어 둔 친구들이
내 사랑하는 이승의 친구보다 많구나.
절벽 옆 바다 등나무는 푸른빛 은빛으로 번득인다.
이 나무들은 나의 신앙을 지켜주는 천사의 창이었다.
그러나 상실 속에서 더 굳건한 것이 자라나서
그건 돌 같은 냉철한 광채를 띠어,
달빛을 견뎌내고, 절망보다 더 멀리,
바람처럼 굳세어져 바다와 경계를 이루는 저 등나무
숲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옛 모습대로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니,
결점이랑 모두 함께, 옛날보다 고상하진 않아도,
그냥 그대로.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2』(동아일보. 2013년 0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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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단 하루라도 좋으니
―박영희 (1962∼)
단 하루라도 좋으니
형광등 끄고 잠들어봤으면
누군가와 밤이 새도록 이야기 한 번 나눠봤으면
철창에 조각난 달이 아닌 온달 한 번 보았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따뜻한 방에서 한숨 푹 자봤으면
탄불 지핀 아랫목에서 삼십 분만 누워봤으면
욕탕에 들어가 언 몸 한 번 담가봤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흠뻑 비에 젖어봤으면
밤길 한 번 거닐어봤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잠에서 깨어난 아침 누군가 곁에 있어 주었으면
그리운 이의 얼굴 한 번 어루만질 수 있었으면
마루방 구석에서 기어 나오는 벌레들 그만 죽였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딸에게 전화 한 통 걸어봤으면
검열 거치지 않은 편지 한 번 써봤으면
접견 온 친구와 한 시간만 이야기 나눠봤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단 하루라도 좋으니
내 방문 내 손으로 열 수 있었으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2』(동아일보. 2013년 0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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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슬픈 로오라
―이문재(1959∼)
길을 바다의 끝까지 데려다 주고 교실로 들어선다
오전에 읽던 죽은 사람들의 책은 아직 열려 있고
칸나는 한 발짝도 여름에서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봉화촌의 아이들
산에서 멀거니 아버지를 잃어버리는 아이들
오늘은 굿당이 조용하고
수평선은 일전의 자리로 돌아가 있다 소나무 숲이
아주 많은 날들을 매어 달고 외로움에 지친
여자들의 헝겊을 아직 매달아 주고
달을 바라보는 칸나
분교의 지붕에는 소금기가 많이 남아 있다
방금 바다에서 올라간 구름들이 서성거리고
가까운 집에서 기침소리가 난다
깨진 유리창으로 들어서는 바다는 발이 퉁퉁 불어 있고
선착장까지 데려다 준 길들이 고개를 들어 힐끗
교실을 바라보고 있다
칸나의 뿌리 속으로도 해풍에 녹스는
어둠이 자리잡고
이곳을 떠나면 죽음의 나라
나는 낡은 풍금의 페달을 밟으며 로오라를 이름
부른다 낮은 구름들이 웅성거리며
섬의 주위로 내려온다
풍향계를 바라보면 바람은 나에게 들키고 페달을 밟고 있는
나의 리듬이 자꾸 어둡고 깊어질 때
바다는 잠시 그의 품안에 들어서는
물고기나 여름의 난류를 허락하고 있는 것 같다
로오라 나는 언제 온몸의 외로운 이끼를 씻고
그대의 낯익은 고장으로 달려갈 것인가
봉화대는 늘 어둡고
어두워져 있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3』(동아일보. 2013년 06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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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1967∼)
어느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하지 않았다
십수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고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4』(동아일보. 2013년 0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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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그저 그런
―백상웅(1980∼)
가방이 뜯어졌다.
속에 든 모든 게 쏟아졌다.
언제 집어넣었는지도 잊은 영수증, 책, 동전,
너무나도 익숙한 흔들림이나 덜컹거림까지도
쏟아졌다.
게을러서 여태 내가 기대고 살았다.
장대비에 젖고 눈발에 얼고 한 날은 햇볕도 쬐고
하면서, 가방은 울상이었다가 펴지기도 하면서.
연애도 하고 이별도 했다.
이력서도 쓰고 면접에서 떨어져도 봤다.
인조가죽이라 망조가 오래전부터 보였다.
짐승이 되려다가 만 가방, 짖다가 그만둔 가방,
소처럼 여우처럼 악어처럼 고래처럼
착하지도 나쁘지도 못하는 가방.
가방이 제 밑바닥으로 입을 벌렸다.
찢어지면서 이빨의 형상까지 만들었다.
이제 이 가방의 시대는 끝났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5』(동아일보. 2013년 0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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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너바나
―리산(1966∼)
언덕을 넘어 외곽으로 가는 마지막 전차의 종소리도 그친 자정이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입술을 가진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손톱을 가진 여자가 모여드는 자정 너머 술집에 불이 켜지지
누군가와 어깨를 걸고 먼 곳에서 먼 곳으로 가고 싶은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남자와 금이 간 청동의 술잔에 제 손금을 비추어 보는 여자가 있는 그곳에는, 유효기간이 지난 달력을 찢어 불이 꺼진 화덕에 불씨를 살리고 밀봉된 병 속의 시간을 헐어 작고 단단한 주전자 가득 끓여내는 뜨겁고 진한 국물이 있지
지금 막 일인분의 따뜻한 음식을 사기 위해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는 남자와 뜨거운 김이 오르는 노점 식당 앞에 서서 청어 향수가 뿌려진 손수건으로 지워지지 않는 이마의 허기를 닦는 여자
멀리 가는 밤새들 울음 우는 긴 모퉁이 지나 자정 너머 술집에는, 낡은 앨범 속 램프에 그을린 가수의 목소리 흥얼흥얼 타오르는 자정 너머의 화덕, 오래도록 식지 않을 한 스푼의 온기가 있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5』(동아일보. 2013년 0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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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그리며 사색하는 이 순간
―월트 휘트먼(1819∼1892)
홀로 앉아 그리며 사색하는 이 순간
다른 나라에도 그리며 사색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만 같다.
멀리 바라보면 도이칠란트,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혹은 더 멀리 중국, 러시아, 일본에서 그 나랏말을, 지껄이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만약 그들을 알 수만 있다면 내 나라의 비슷한 사람들에게 끌리듯이 그들에게 끌릴 것만 같다.
아 우리는 형제가 되고 애인이 되리라
그들과 함께라면 나는 행복하리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7』(동아일보. 2013년 0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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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차단기 기둥 곁에서
―서대경(1976∼)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내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이어서, 엄마, 쓸쓸한 내 목소리, 내 그림자, 하지만 내 작은 발굽 아래 풀이 돋아나 있고, 풀은 부드럽고, 풀은 따스하고, 풀은 바람에 흔들리고, 나의 염소다운 주둥이는 더 깊은 풀의 길로, 풀의 초록, 풀의 고요, 풀의 어둠, 풀잎 매달린 귀를 간질이며 기차가 지나고, 풀의 웃음, 풀의 속삭임, 벌레들의 푸른 눈, 하늘을 채우는 예배당의 종소리, 사람들 걸어가는 소리,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 어두워져가는 풀, 어두워져가는 하늘, 나는 풀 속에 주둥이를 박은 채, 아무래도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어릴 적 우리 집이 있는 철길 건너편,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8』(동아일보. 2013년 0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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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버스에서 자는 어머니
―고형렬(1954∼)
흰 양말에 남자 고무신을 신었다.
통치마 아래 반들거리는 정강이
항포돛색 보자기로 네 귀를 묶고
풀다라를 안고 졸고 있었다.
엷은 구름에 바다는 훤한 새벽
불켜고 버스는 북쪽으로 간다.
자식들의 늦은 등교 찻간에서
나는 동해안 어머니를 자주 보게 된다.
옆구리에 혹마냥 불거진
흔들리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보고
나는 해송 달아나는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관광 여름 한철을 따라서
어머니는 주문진으로 나가시는가 보다.
언덕바지나 동구에 삑 설 때마다
찰싹찰싹 어린 파도 소리 들린다.
저러고 눈만 감은 어머니를
나는 바람결에 알고 있다,
어머니는 해변가 여자가 아닌가.
그러나 지금 조으는 6척 어머니
짚또아리 드신 장사 같은 어머니는
아무 표정도 없이 자고 계신다.
더 위로 위로 오늘은 가시나 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9』(동아일보. 2013년 0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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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강가
―이용악(1914∼1971)
아들이 나오는 올 겨울엔 걸어서라도
청진으로 가리란다
높은 벽돌담 밑에 섰다가
세 해나 못 본 아들을 찾아오리란다
그 늙은인
암소 따라 조밭 저쪽에 사라지고
어느 길손이 밥 지은 자췬지
그슬린 돌 두어 개 시름겹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0』(동아일보. 2013년 0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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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것들
―이하석(1948∼ )
바다는 우리의 것들을 밖으로 쓸어낸다
우리 있는 곳을 밖이라 할 수 없어서
생각들이 더 더러워진다 끊임없이
되치운다
우리가 버린 것들을 바다 역시 싫다며 고스란히 꺼내놓는다
널브러진 생각들, 욕망의 추억들, 증오와 폭력들의 잔해가 바랜 채 하얗게 뒤집혀지거나
검은 모래 속에 빠진 채 엎어져 있다
나사가 빠지고 못도 빠져나가 헐겁지만
그것들은 우리 편도 아니다
더욱 제 몸들 부스러뜨릴 파도 덮치길 겁내며
몇 번이나 우리의 다리를 되걸어 넘어뜨린다
여름 홍수에 그런 것들 거세게 바다 파고 들지만
바다는 이내 그 모든 것들을 제 바깥으로 쓸어 내놓는다
우리 있는 곳을 밖이라 할 수 없어서
우리 생각들이 더 더러워진다 끊임없이
되치워야 한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1』(동아일보. 2013년 0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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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상수리나무들아
―이은봉(1953∼)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너희들이 좋구나 너무 좋아 쓰다듬어도 보고, 끌어안아도 보고, 그러다가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나, 너희들 들쳐 업는구나 너희들, 나 들쳐 업는구나
우거진 잎사귀들 속, 흐벅진 저고리 속
으흐흐 젖가슴 뭉개지는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그렇구나 네 따뜻한 입김,
부드러운 온기 속으로
나, 스며들고 있구나 찬찬히
울려 퍼지고 있구나
너희들 숨결, 오래오래 은근하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껍질들아
껍질 두툼한 네 몸속에서 작은 풍뎅이들, 속날개 파닥이고 있구나 어린 집게벌레들, 잠꼬대하고 있구나
그것들, 그렇게 제 몸 키우고 있구나
내 몸에서도 상수리나무 냄새가 나는구나
쌉쌀하구나 아득하구나 까마득히 흘러넘치는구나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2』(동아일보. 2013년 0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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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파리
―장석주(1955∼)
비굴했다,
평생을
손발 빌며 살았다.
빌어서 삶을 구하느라
지문이 다 닳았다.
끝끝내 벗지 못하는
이 남루!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3』(동아일보. 2013년 0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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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가족의 힘
―류근(1966∼)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을 봐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대한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4』(동아일보. 2013년 0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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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떨어뜨린 것들
―김행숙(1970∼)
여름 과일은 물주머니지
겨울에 물은 얼지
강물이 단단해지고 있어
10센티쯤……
내 얼굴에도 눈이 쌓였으면……
나의 시체처럼
그것은 내가 볼 수 없는 풍경이겠구나
아이들은 흙장난을 하다가 이상한 것들을 발견하곤 하지
어느 날은
야구공이 굴러간 곳에서 이상한 것을 줍지
손을 잃어버린 손가락 같은 것
뭐지?
찾았니? 저쪽에서 한 아이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어
과일을 깎다가 둥근 과일을 떨어뜨리지
향기로운 벌레가 기어 나왔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5』(동아일보. 2013년 0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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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환상의 빛
―강성은 (1973∼)
옛날 영화를 보다가
옛날 음악을 듣다가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생각했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생각했다
명백한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몇 세기 전의 사람을 사랑하고
몇 세기 전의 장면을 그리워하며
단 한 번의 여름을 보냈다 보냈을 뿐인데
내게서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6』(동아일보. 2013년 0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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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탱자는, 탱자가 아닙니다
―장옥관(1955∼)
탱자는, 탱자가 아닙니다
탱자처럼 올라붙은 불알 가진 수캐가 아닙니다 꽃핀 암캐 항문이나 쫓는 수캐가 아닙니다
갓 피어난 채송화 꽃밭 휘저으며 나비를 쫓다가도
눈동자에 뭉게구름을 담아냈지요
비록 늘 굶주렸지만, 이웃의 후한 대접에는
밭고랑에 숨은 생쥐 잡아 현관에 갖다놓는 염치도 있었어요
장맛비에 허적이며 온 동네 쏘다니는 그를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요
앞산 능선이 완만한 것은 개의 등이 굽었기 때문이며 그의 등이 굽은 것은 사무침 때문입니다
탱자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이불 홑청 빨다가 구름에게 손등을 깨물린 날
마을 뒷산 오르는 이웃들 따라 올라가 영영 내려오지 않았어요
주머니에 든 돈과 입은 옷으로 대문 나서서
몇 년째 돌아오지 않는 제 주인처럼
사무침이 구름을 피우고 사무침이 방금 다렸던 와이셔츠를 다시 다리게 만듭니다
한번 흩어진 구름은 왜 다시 뭉쳐지지 않을까요 한번 지나간 물소리는 왜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요
푸른 가시마다 총총한 흰 꽃
탱자 울타리에 탱자가 올해에도 걸어와 매달리는데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7』(동아일보. 2013년 0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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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음악들
―박정대 (1965∼)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8』(동아일보. 2013년 08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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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바람
―다카하시 아유무(1972∼)
나와 사야카 그리고 바테루텐(홈스테이 집의 아들)
세 사람이 양을 몰고 초원을 한없이 걸었다.
나는 하모니카로 밥 딜런의 ‘바람의 소리’를 불었다.
장난을 좋아하는 바테루텐이 내 손에서 하모니카를 뺏는다.
“하모니카 불 줄 알아?”라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젓는다.
그는 내 하모니카를 바람에 맡겼다.
후∼ 후∼ 화∼ 화∼
바람이 하모니카를 불고 있다.
강하게 가늘게, 미세한 비브라토를
주면서바람은 절묘한 톤으로 하모니카를 불었다.
인간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소리…
열 개의 음이 동시에 울리는 소리…
1분 정도 바람의 연주를 들려준
뒤바테루텐은 살짝 웃으며 나에게 하모니카를 돌려준다.
‘바람의 연주가 어때?’라는 듯.
맞아, 네가 이겼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9』(동아일보. 2013년 08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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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근황
―김남호(1961∼)
요즘은 자꾸 웃음이 나
달리던 타이어에 펑크가 났는데도 웃음이 나고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면서도
보험회사 직원이 지금, 거기가
어디쯤이냐고 묻는데도 웃음이 나고
도대체 여기가 어디쯤이지?
웃음이 나고,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도
장례식장이 어디냐고
발인은 언제냐고 웃음이 나고
얌마, 너 왜 그래?
엄마가 치매라는데도 웃음이 나고
누구세요, 나를 못 알아보는데도 웃음이 나고
울고 싶은데도 웃음이 나고
여보, 나 이러다 미치는 거 아냐?
무서워 죽겠는데 웃음이 나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0』(동아일보. 2013년 08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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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나의 빈티지
-박도희(1964~)
나쁘지 않은 시
늦가을을 닮고 싶은 의자
배터리가 다 된 시계
죽은 매미들이 새 배터리를 만들고 있다는 상상
장난의 운명을 믿는 헝겊 뼈다귀를 물고 오는 강아지
제 속도감을 즐기는 햇살
50% 세일 아이스크림
각종 펜 사랑
시선이라는 행위 예술을 위하여
막대사탕을 물고 타는 버스
모자란 슬픔
현혹=과제
패, 경, 옥 같은 택배물
늙기로 한 터널
오후 찻잔에 담는 비
기어코 찾으려고 하는 눈물에 관하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1』(동아일보. 2013년 08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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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섬진강변에서
―천금순(1951∼)
비로소 강물은
지리산 고원분지 운봉 땅에 고리를 박고
줄을 매달아 동편제 판소리 한가락으로 흐른다
내가 발자국으로 걸어온 몇 백리 길
거대한 동그라미 하나 그리며 흐르고 흐른다
산내, 운봉, 주천, 구례, 하동으로
싸리꽃 찔레꽃 흐드러지게 핀 산속
막걸리주막의 외롭기만 하다는
할머니의 긴 넋두리도 흐른다
쌍계사 화개장터를 내려와
막차표를 끊어놓고 잠시 남도대교 아래
강을 거슬러 오르는 은피라미떼를 본다
강 건너 초록의 대숲 시퍼런 낫으로 산죽을 치는
소리 휘어 활시위소리 내며 흐른다
강물에 뜬 둥근 낮달에 늙은 내 얼굴을 비추어본다
멀리 있는 그대에게 흐르는 물로 초록의 편지를 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2』(동아일보. 2013년 08월 0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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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그 여자의 남편
―테드 휴즈(1930∼1998)
일부러 석탄가루를 뒤집어쓰고 집에 돌아와
싱크대와 수건을 더럽히며 그 여자로 하여금
빨래솔과 빨래판으로써
돈의 완강한 성질을 알게 한다.
또한 어떤 종류의 먼지 속에서
갈증이 생겼고 그것을 풀 권리를 얻으며
어떤 땀을 그가 돈과 바꿨고
돈의 피나는 무게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한다. 그는 그 여자의 의무를
새삼 일깨워 그 콧대를 꺾으리라.
오븐 속에 두 시간을 데운 튀겨진 나무쪽 같은 감자튀김은
그 여자의 대꾸의 일부일 뿐.
나머지 대꾸를 마저 듣고 그는 불 속에 내팽개치고는
울리는 함석판 같은 목청으로
<돌아오라 쏘렌토로>를 부르며
집 모퉁이를 돌아가 버린다.
모욕 때문에 그녀의 등은 구부러져 혹이 생긴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겐 자기네의 권리가 있을 테니까.
배심원들은 작은 검댕부스러기들로부터
소집될 것이다. 그들의 소장(訴狀)은 곧장
하늘로 올라가 아무런 소식이 없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3』(동아일보. 2013년 0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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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기하학적인 삶
―김언 (1973∼)
미안하지만 우리는 점이고 부피를 가진 존재다.
우리는 구이고 한 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있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게 멀어지면서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변함없는 크기를 가진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칭을 이루고 양쪽의 얼굴이 서로 다른 인격을 좋아한다.
피부가 만들어내는 대지는 넓고 멀고 알 수 없는
담배 연기에 휘둘린다. 감각만큼 미지의 세계도 없지만
삼차원만큼 명확한 근육도 없다. 우리는 객관적인 세계와
명백하게 다른 객관적인 세계를 보고 듣고 만지는 공간으로
서로를 구별한다. 성장하는 별과 사라지는 먼지를
똑같이 애석해하고 창조한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나왔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자연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메바처럼
우리는 우리의 반성하는 본능을 반성하지 않는다.
우리는 완결된 집이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우리의 주변 세계와 내부세계를 한꺼번에 보면서 작도한다.
우리의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고향에 있는
내 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간다. 거기
누가 있는 것처럼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한 점을 찾는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3』(동아일보. 2013년 0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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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10개의 강아지 인형을 지키는 옷장 속의 인간
―박상순(1961∼)
창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가슴에 있네요.
문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발 아래 있네요.
창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등 뒤에 있네요.
문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나는,
그대의 창백한 얼굴이, 나는, 열 개나 있네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5』(동아일보. 2013년 0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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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삼 분 전의 잠
―이장욱(1968∼)
용서를 빌러 그곳에 갔네 발밑으로 흘러내리는 모래들 내 잠 속에 쌓이고 있었네 삼 분 전의 잠에서 깨어 삼 일 전의 잠을 추억하는 자 삼 일 전의 잠에서 깨어 삼 년 전의 잠을 추억하는 자
그때 그 오래된 눈빛은 우연한 것이었으나 아, 이런 바람은 괜찮은데, 모든 우연을 우리는 미리 알고 있었네 삼 년 전의 문 열리고 삼십 년 전의 그대, 마른 등 보이네 눈뜨면 그때인 듯 상한 눈발 날리고 모래처럼 우연한 노래들 내 잠 깊은 모래산, 모래산에 쌓이네
용서를 빌러 그곳에 갔네 그곳에 오래 앉아 있었으나 깔깔한 모래들 아직도 내 잠 속 떠나지 않네 삼 분 전의 잠에서 깨어 삼 일 전의 기슭을 배회하는 자 삼 일 전의 잠에서 깨어 삼 년 전의 독백을 기억하는 자 그리고 모래산 바람 부는 그대의 모래산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6』(동아일보. 2013년 0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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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구름에 대하여
―엄원태(1955∼)
이 가을엔 구름에 대해 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구름에 대해서라면 누가 이미 그 불운한 가계의 내력과 독특한 취향까지 세세히 기록한 바 있고 심지어 선물상자라며 하늘수박을 제멋대로 담아본 이도 있다지만, 구름은 뭣보다도 오리무중에 암중모색이 본색이자 기질이다.
그래선지 구름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물론 양떼구름이니 새털구름이니 뭉게구름이니 하는 종류는 조금 안다. 하지만 그것들 또한 다만 형상일 뿐 구름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도 안다.
내가 아는 것은 또 한 가지, 구름이 환절기를 틈타 내 무릎이며 발목, 손가락 마디에까지 들어왔다. 산이마에 걸린 안개구름 속을 오래 걸었던 탓인지, 구름께서 친히 내게 왕림하셨다.
구름은 역시 가을 하늘이 제격이다. 허공이 모태이자 고향이며 무덤이기 때문이다. 서리 내린 가을 하늘만큼 새파랗게 쓸쓸해지면, 누구나 구름의 심정을 약간은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7』(동아일보. 2013년 0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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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소매의 자세
―이제야 (1987∼)
지내려다가
지나는 때가 있다
너와 지내려다
너를 지날 때,
심장으로 손을 뻗었다가
계절 속으로 너를 집어넣기도 했다
새벽과 지내려다
새벽을 지날 때,
망각을 위한 노래를 부르다
선명해진 악보를 다시 읽기도 했다
한사코 지내려던 것들이
스르르 지나는 때가 있다
여름아, 부르면
소매 밖으로 팔이 나오듯
나와 지내려다
나를 지날 때,
물음표들을 수없이 피우다
마침표 없이 문장을 닫기도 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7』(동아일보. 2013년 0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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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끈질기게 나를 찾아다니는 전화
―고옥주(1958∼)
몇 개의 숫자 속에서 나는 숨지 못한다
무수한 기억을 뚫고 네가 나를 추적해 올 때
뇌세포보다 더 많이 입력된 정보와 영상 사이로
나는 아무 기억도 상상력도 없다
파묻힌 찬 세월 속에
얼음공주 미이라 손가락의 문신처럼
움찔거리며 살아나는 네 그리움을 이해할 수 없다
죽었던 모기가 다시 살아난다면
해체된 지뢰가 다시 폭발한다면
끝난 사랑이 다시 불붙는다면
나는 갈갈이 찢어지고 말리
날 찾지 마
빠득빠득 잊혀지고 싶어
부족함이 가득한 이 세상
지난 시간을 내게 남겨 줘
묻힌 인연들이 제가 세운 둥지를 틀어 안고
흘러간다
흐르는 대로 흘러가면 좋으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9』(동아일보. 2013년 0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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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토끼
―유홍준(1962∼)
커다란 귀때기 두 개를 말아쥐고 들어올린다 빨간 눈알 두 개를 들여다본다 하얀 눈밭에서 토끼를 움켜잡은 사람이, 두 귀를 붙잡힌 토끼가, 버둥거린다 허공중에 버둥거리며 네 발을 휘젓고 있다
오오, 누가 귀때기를 움켜쥐고
저울질하듯
한 생명의 전부를 들어올리는가
오오, 이 세상 어떤 영혼 또 어떤 영혼의 전부가 저렇게 꼼짝없이 붙잡혀 들어올려져 버둥거리는가
두 눈 가득 빨갛게 피가 몰린 토끼의, 생명의, 무게의
눈알이여
커다란 귀때기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0』(동아일보. 2013년 0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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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가을의 노래
―폴 베를렌(1844∼1896)
가을날
비올롱의 가락
긴 흐느낌
하염없이
내 마음 쓰려라
종소리
가슴 메여
나 창백히
지난날 그리며
눈물 흘리네
쇠잔한
내 신세
모진 바람 몰아치는 대로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낙엽 같아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1』(동아일보. 2013년 09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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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전어
―김신용(1945∼)
참, 동전 짤랑이는 것 같기도 했겠다
한때, 짚불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구워지던 것
비늘째 소금 뿌려 연탄불 위에서도 익어가던 것
그 흔하디흔한 물고기의 이름이 하필이면 전어(錢魚)라니―
손바닥만 한 게 바다 속에서 은빛 비늘 파닥이는 모습이
어쩌면 물속에서 일렁이는 동전을 닮아 보이기도 했겠다
통소금 뿌려 숯불 위에서 구워질 때,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그 구수한 냄새가 풍겨질 때, 우스갯소리로 스스로 위로하는
그런 수상한 맛도 나지만, 그래, 이름은 언제나 상형(象形)의 의미를 띠고 있어
살이 얇고 잔가시가 많아 시장에서도 푸대접 받았지만
뼈째로 썰어 고추장에 비벼 그릇째 먹기도 했지만
불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냄새는, 헛헛한 속을 달래주던
장바닥에 나앉아 먹는 국밥 한 그릇의, 그런 감칠맛이어서
손바닥만 한 것이, 그물 가득 은빛 비늘 파닥이는 모습이
그래, 빈 호주머니 속을 가득 채워주는 묵직한 동전 같기도 했겠다
흔히 ‘떼돈을 번다’라는 말이, 강원도 아오라지쯤 되는 곳에서
아름드리 뗏목 엮어 번 돈의 의미를, 어원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바다 속에서, 가을 벌판의 억새처럼 흔들리는 저것들을
참, 동전 반짝이는 모습처럼 비쳐 보이기도 했겠다
錢魚,
언제나 마른 나뭇잎 한 장 같던 마음속에
물고기 뼈처럼 돋아나던 것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2』(동아일보. 2013년 09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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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당신의 차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심재상(1955∼)
헐떡이며 가파른 오르막길을 기어 올라온 관광버스들이 줄줄이 휴게소로 들어온다. 그늘 한 점 없는 마당 한복판 펄펄 끓는 콘크리트 위에서 그만, 혼절해버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 안의 좁은 통로에 몰려나와 팔뚝을 걷어붙인 채 겅중겅중 뛰고 있는 중년의 아낙네들. 대체 무슨 힘이 닫힌 차창을 꿰뚫고
빤짝, 빤짝, 이느은 희미이한 기어억 속에
한번 보라니까 저 아래
8월의 햇살 폭포처럼 쏟아져내리는
막무가내의 오르막길 저속 차선도 없는
속수무책의 내리막길 이날 이때껏
칡넝쿨이 되어 호박덩굴이 되어
휘감으며 매달리며 기어온 내 인생
용서 못해 절대로 용서 못해
이날 이때껏
그 무슨 낙으로
그 무슨 열병으로
옘병할
말해보라니까 대체 무슨 수로
오늘 미소 지을 줄도 모르는 당신이
내일 앞산이 출렁이게 웃을 수 있겠냐구
만날 수 없어도 잊지는 말아욧
당신을 사랑했어욧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3』(동아일보. 2013년 09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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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검색
―오성일 (1967∼)
벌들도 가끔 부부 싸움 하는지
꽃들에게 물어보렴
어떤 감자는 왜 자주꽃을 피우는지
농부에게 물어보렴
바람도 잘 때 잠꼬대를 하는지
떡갈나무 잎들에게 물어보렴
예쁜 아가씨를 지나칠 땐 새들도 날갯짓을 늦추는지
구름에게 물어보렴
해가 바다에 잠길 때 신을 벗는지 안 벗는지
노을에게 물어보렴
비 오는 날 그림자들은 어디 선술집에라도 몰려가는지
빗방울에게 물어보렴
겨울밤 지하철 계단 할머니의
다 못 판 채소는 누가 사주는지
별들에게 물어보렴
궁금한 것 죄다 인터넷에 묻지 말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4』(동아일보. 2013년 09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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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물방울
―오두섭(1955∼)
시작은 모른 채
여기까지 달려온 길
소매 끝 꽉 붙잡았다
숨죽이며 벼랑 떠받는 바람
시간이 잠시 숨쉬기를 멈춘다
더 이상 터질 곳 없는
꽃의 절정인 듯
절체절명인 듯
빌 공!
사이 간!
목까지 올라온 숨
놓치지 않고 머금고 있다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만들고 있는 듯이
깜짝 순!
틈 간!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5』(동아일보. 2013년 0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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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공터의 사랑
―허수경(1964∼)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6』(동아일보. 2013년 09월 13일)
―시집『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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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번역의 유토피아
―김재혁 (1959∼)
이곳엔 사랑이 넘실대지요.
고통도 바지를 걷고 함께 개울을 건넙니다.
수초들은 뒤엉켜 있고,
가끔 미끄러운 돌이 딛는 발을 밀쳐 내는군요.
모두 사연을 갖고 사는 세상입니다.
사연들은 글자로 서서 머릿속을 헤맵니다.
글자들에게 사연을 물으면
모두 담배나 피워 물 뿐,
수초 속에 숨은 그리움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건넌다는 것은
늘 실패한 첫사랑입니다.
그래서 아쉽지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6』(동아일보. 2013년 0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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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초저녁 달
―박형준(1966∼)
내게도 매달릴 수 있는
나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침에는 이슬로
저녁에는 어디 갔다 돌아오는 바람처럼
그러나 때로는
나무가 있어서 빛나고 싶다
석양 속을 날아온 고추잠자리 한 쌍이
허공에서 교미를 하다가 나무에 내려앉듯이
불 속에 서 있는 듯하면서도 타지 않는
화로가의 농담(濃淡)으로 식어간다
내게도 그런 뜨겁지만
한적한 저녁이 있었으면 좋겠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8』(동아일보. 2013년 0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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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월부 장수
김사인
진눈깨비는 허천나게 쏟아지고
니미
욕만 나오고
어디로 갈까
평촌을 거쳐 옥동으로 가볼까
코흘리개 새끼들이 아슴아슴 눈앞에 밟혀오는데
즈어매는 이제쯤 돌아왔을지
빈 속에 들이부은 막걸리 몇 잔에
실없이 웃음만 헤퍼지누나
어디로 가서
몇 개 남은 밥솥을 마저 멕이나
바람은 바짓자락을 붙잡고 핑핑 울어쌓는데
저무는 길가에 철 놓친 수레국화 몇 송이
꺼츨하게 종아리 걷었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9』(동아일보. 2013년 0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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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가을나무의 말
―김명리(1959∼)
맹세는 깨어졌다
그해 가을이 다 저물도록
오마던 사람 오지 않았다
멍투성이 핼쑥한 가을하늘이
기다리는 사람의
부러진 손톱 반달 밑에 어려서
반 남은 봉숭아 꽃물이
버즘나무 가로수
단풍진 잎자락을 좇아가는데
붉디붉은 붉나무
샛노란 엄나무
그 물빛에 엎어지는
저 또한 못 믿겠는 사람 심사를
목마른 가을나무들이 맨 먼저
눈치 채지 않겠는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0』(동아일보. 2013년 0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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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미라보 다리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 깊이 아로새기리
기쁨은 늘 고통 뒤에 온다는 것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자
우리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결이
저렇듯 천천히 흐르는 동안.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나날은 흘러가고 달도 흐르고
지나간 세월도 흘러만 간다.
우리들 사랑은 돌아오지 않는데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1』(동아일보. 2013년 0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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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보 다리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 내린다.
내 마음 속에 깊이 아로새기리
기쁨은 언제나 괴로움에 이어옴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면
우리네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결이
저렇듯이 천천히 흘러 내린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사랑은 흘러간다 이 물결처럼.
우리네 사랑도 흘러만 간다.
어쩌면 삶이란 이다지도 지루한가
희망이란 왜 이렇게 격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나날은 흘러가고 달도 흐르고
지나간 세월도 흘러만 간다.
우리네 사랑은 오지 않는데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김희보 편저『세계의 명시』(종로서적,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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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마흔 살
―송재학(1955∼)
미나리와 비슷하게 습지 따라가거나
잎과 줄기를 삶아 먹기 때문에 나온
미나리아재비란 이름에는 마흔 살의 흠집이 먼저다
제 이름 없이 더부살이한다는 의심이 먼저다
다섯 장의 꽃잎이 노란 것도
식은 국물같이 떠먹기 쉬운
약간은 후줄근한 아재비란 촌수 탓이다
저 풀의 독성이란 언젠가 다시 켜보려는 붉은 알전구들
돌아갈 수 없는 열정이
저 풀을 이듬해에 또 솟구치도록 숙근성으로 진화시켰다
노란 꽃 찾는 꿀벌의 항적(航跡)도 명주나비 얼룩무늬도
미나리아재비 살림의 쓴맛 단맛
막무가내 번식하는 미나리아재비 군락을 지나간다면
일장춘몽 쓸개는 곰비임비 햇빛에 널어라
양지에 피어난 것이 어디 미나리아재비뿐이냐
누구를 기다리지도 않고 누군가 다가오지도 않는
마흔 살 너머!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2』(동아일보. 2013년 0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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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그 창
―양애경(1956∼)
그대 살았던 집 근처를 지나면
눈은 저절로 그 쪽으로 쏠려
귀도 쫑긋 그 쪽으로 쏠려
이 각도에선 그 집 지붕도 보이지 않지만
그 창도 물론 보이지 않지만
온몸이 그 쪽으로 쏠려 세포 하나하나가 속삭여
온몸의 솜털이 일어서 나부껴
이제 그대 거기 살지도 않는데
그런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
길들여지지 않는 눈은… 보고 싶은 것을
보게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립다고 날마다 말할 수 있었으면 안 그랬을까?
아침마다 밤마다 살 부비며 살았으면 안 그랬을까?
그리워라… 이제는… 다른
사람이 사는… 그 창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3』(동아일보. 2013년 10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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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혼자
―이병률(1967∼)
나는 여럿이 아니라 하나
나무 이파리처럼 한 몸에 돋은 수백 수천이 아니라 하나
파도처럼 하루에도 몇백 년을 출렁이는
울컥임이 아니라 단 하나
하나여서 뭐가 많이 잡힐 것도 같은 한밤중에
그 많은 하나여서
여전히 한 몸 가누지 못하는 하나
한 그릇보다 많은 밥그릇을 비우고 싶어 하고
한 사람보다 많은 사람에 관련하고 싶은
하나가 하나를 짊어진 하나
얼얼하게 버려진, 깊은 밤엔
누구나 완전히 하나
가볍고 여리어
할 말로 몸을 이루는 하나
오래 혼자일 것이므로
비로소 영원히 스며드는 하나
스스로를 닫아걸고 스스로를 마시는
그리하여 만년설 덮인 산맥으로 융기하여
이내 녹아내리는 하나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5』(동아일보. 2013년 10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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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폐결핵
―박후기(1968∼)
날은 어둡고,
가는 비 내리고 가는귀먹는다
무심결에 뒤척이는 젖은 꽃잎,
골방의 한숨 섞인 수음처럼
납작 엎드린 채 부란(腐爛)하다
음란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비 내리는 날
아무도 없는 집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6』(동아일보. 2013년 10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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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폐가 노래한다
―하야시 후미코(1903∼1951)
새가 빛난다.
도시 위에서도 빛난다
새가 하얗게 빛난다
거리엔 꽃가루가 흩날리고, 전신주의 꼭대기가
흔들려요 흔들리고 있어요
머물 곳이 없다.
폐가 노래한다, 짧은 경치 노래인 걸.
갈색 빗속을
나는 귀를 막고 걷는다
귀가 아파, 아파요
빗속에서 새가 빛난다
발버둥치면서 난다
아득한 황야에 바람의 꿈
폐가 노래한다, 짧은 경치 노래인 걸.
나는 무엇 때문에 걷는 걸까
새의 운명이다
새처럼 어딘가에서 나는 태어났다
머물 곳이 없는 밤
반짝이며 난다
내가 빛나는 것이 아니다
사방의 광선이 와아 하고 웃는 것이다
나의 폐가 노래한다 그뿐인 거다….
혼자 사는 고양이, 혼자 사는 개
아무도 없는 길의 자갈돌
이슬이 사라진다
새의 하늘, 빛나는 새
못을 빼듯 매끄러운 빛
비틀거리며 비틀거리며 다만 빛나는 새
폐가 노래한다. 폐만이 노래할 뿐이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7』(동아일보. 2013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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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달콤한 인생
―권현형(1966∼)
이마 흰 사내가 신발을 털고 들어서듯
눈발이 마루까지 들이치는
어슴푸른 저녁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마루에 나앉아
밤 깊도록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설탕을 타 마신 막걸리는 달콤 씁쓰레한 것이
아주 깊은 슬픔의 맛이었습니다
자꾸자꾸 손목에 내려 앉아
마음을 어지럽히는 흰 눈막걸리에 취해
이제사 찾아온 이제껏 기다려 온
먼 옛날의 연인을 바라보듯이
어머니는 젖은 눈으로
흰 눈, 흰 눈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초저녁 아버지 제사상을 물린 끝에
맞이한 열다섯 겨울
첫눈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며
나는 다가올 첫사랑을 기다리며
첫눈 내리는 날이면
댓잎처럼 푸들거리는 눈발 속에서
늘 눈막걸리 냄새가 납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8』(동아일보. 2013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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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들국화
―천상병(1930∼1993)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쳐진 이 순간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9』(동아일보. 2013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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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천상병
산등성 외따론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시집『천상병 전집』(평민사, 2007)
■
·70. 6.『창작과 비평』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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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밤의 공벌레
―이제니(1972∼)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 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 깜빡였다.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하염없이 얼음을 지칠 테다. 지칠 때까지 지치고 밥을 먹을 테다. 한 그릇이 부족하면 두 그릇을 먹는다. 해가 떠오른다. 꽃이 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음독의 시간. 지금이 몇 시일까. 왕만두 찐빵이 먹고 싶다. 나발을 불며 지나가는 밤의 공벌레야. 여전히 너도 그늘이구나.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죽었던 나무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알았다. 틀린 맞춤법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부끄러움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0』(동아일보. 2013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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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창이란 창을 다 열어 놓고
―한기팔(1937∼)
사면이 유리(琉璃)의 벽(壁) 같은
깊은 고요 속
낮은 산자락에
푸른 대문이 있는
그 집
빨랫줄엔
빨래가 다 마르고
바지랑대 높이
구름 그림자 지나가니
하늘은
그대로 환한 거울 속인데
창이란 창을 다 열어 놓고
온종일
사람이 그립습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1』(동아일보. 2013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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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물소리
―조정권(1949∼)
“그럼 저녁 6시 마로니에에서 보십시다”
퇴근 후 식어가는 찻잔을 앞에 두고
두 시간 여를 기다리다가
한 시간을 더 기다려보다가
어둠 속으로 나와 전철 타러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그 밤 어둠 속 마로니에 나무 밑에. 아!
이성선 시인이었다.
“조형이 마로니에라 하기에 이 나무 아래서 만나자
는 줄 알았지요.”
속초에서 예까지 짊어지고 온 몸이
계곡물소리를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 물소리가 나를 씻어주고 있었다.
그 밤, 몸은 내게 무슨 말을 전하려고 했을까
갯벌처럼 무겁게 누워 밤새도록 뒤척이다 그냥 간
몸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2』(동아일보. 2013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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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길에 누운 화살표
―최정례(1955∼)
네 비행기 날아가고
지금쯤 구름 속에 있겠다
바다 위에 떴겠다
드디어 땅바닥에 닿았겠다
그러나 생각 않기로 한다
대신 네 호흡인 구름에게
푸른 사과와 붉은 사과가 있다고 전한다
좌판에 푸른 사과와 붉은 사과
서로의 볼을 맞대고 있다고
내 앞에 트럭이 지나간다고
굵은 대파가 책처럼 높다랗게 쌓였고 밧줄에 묶였고
뿌리는 뿌리끼리 푸른 잎은 잎끼리
서로가 서로를 꽉 채우고 빈틈 하나 없이 저렇게
묶여 실려간다고
허공 속의 공책에
사과를 사과나무를
다 마셔버리고 싶다고 쓴다
사과나무 한 채를 다 마시고
지금쯤은 구름 속인지 바다 위인지 땅바닥인지
길바닥에 누운 화살표에게 묻는다
좌로 꺾인 하얀 화살표 따라간다고 쓴다
희망은 난폭해서
날마다 쫓기며 가보게 한다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3』(동아일보. 2013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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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옛 이야기 구절
―정지용(1902∼1950)
집 떠나가 배운 노래를
집 찾아오는 밤
논둑길에서 불렀노라.
나가서도 고달프고
돌아와서도 고달펐노라.
열네 살부터 나가서 고달펐노라.
나가서 얻어 온 이야기를
닭이 울도록,
아버지께 이르노니-
기름불은 깜박이며 듣고,
어머니는 눈에 눈물을 고이신 대로 듣고
니치대든 어린 누이 안긴 대로 잠들며 듣고
웃방 문설주에는 그 사람이 서서 듣고,
큰 독 안에 실린 슬픈 물같이
속살대는 이 시고을 밤은
찾아온 동네 사람들처럼 돌아서서 듣고,
-그러나 이것이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어떤 시원찮은 사람들이
끝맺지 못하고 그대로 간 이야기어니
이 집 문고리나, 지붕이나,
늙으신 아버지의 착하디착한 수염이나,
활처럼 휘어다 붙인 밤 하늘이나.
이것이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전하는 이야기 구절일러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4』(동아일보. 2013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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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나의 시(詩)
―약한 너에게 기대어
―김정란(1953∼)
그가 왔다. 살금살금, 자신없어하며, 나의 눈치를 보며. 얘, 하고 그가 불렀다, 얘, 나 좀 볼래? 내가 말했다. 넌 누구니, 주눅 들어 있는, 영양실조의 너는?
그애는 정말로 고개를 떨구고, 쩔쩔매면서, 손을 쥐어뜯으며, 땀을 뻘뻘 흘리며, 금방 눈물이 터질 듯한 눈으로, 말했다.
“그런데 말이지”
“하기는 말이지”
나는 너의 자신 없음을 지킨다, 아, 제대로 자라지 못한 나의 짝궁이여.
늘상 어쩌면 이렇게 해거름의 시간에 우리는 외로이 한 의자에 앉는 것일까. 쓸쓸하게, 그 쓸쓸함으로 서로를 알밖에 없는 것처럼.
“얘 하지만 얘”
우리는 가만히 서로에게 기댄다. 세상은 빛으로 빛나는 것을, 눈뜨는 법만 배우면, 우리의 시간은 신나게 번쩍이는 강인 것을,
나는 그애를 토닥거려준다, 자, 배워야지, 안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말이야. 다행히도 살아 있는 동안 말이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5』(동아일보. 2013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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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뒷굽
―허형만(1945∼)
구두 뒷굽이 닳아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수선집 주인이 뒷굽을 뜯어내며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하는 말이
참 오래도 사시네요 하는 말로 들렸다가
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 하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
수선집 주인이 좌빨이네요 할까봐 겁났고
우빨이네요 할까봐 더 겁났다
구두 뒷굽을 새로 갈 때마다 나는
돌고 도는 지구의 모퉁이만 밟고 살아가는 게 아닌지
순수의 영혼이 한쪽으로만 쏠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사코 한쪽으로만 비스듬히 닳아 기울어가는
그 이유가 그지없이 궁금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6』(동아일보. 2013년 11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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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흔들릴 때마다 한잔
―감태준(1947∼)
포장 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한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살아 있는 참새를 굽고 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도 꾼이 판 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불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풀린 꾼들은 빈 술병에도 얽히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 수 없이, 다만 다 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7』(동아일보. 2013년 11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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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릴 때마다 한 잔
감태준
포장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한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살아 있는 참새를 굽고 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도 꾼이 판 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불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수없이, 다만 다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몸 바뀐 사람들』.일지사. 1978 )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빨갛색 부분이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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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늙은 소
―정래교(1681∼1759)
힘 다해 산밭 갈고 난 뒤에
나무 그루터기에서 외로이 우네.
어떻게 해야 개갈(介葛)을 만나서
네 뱃속의 말을 할 수 있을거나.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8』(동아일보. 2013년 11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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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얼룩
―이사라(1953∼)
검버섯 피부의 시간이 당신을 지나간다
시간을 다 보낸 얼룩이 지나간다
날이 저물고 아픈 별들이 뜨고
내가 울면
세상에 한 방울 얼룩이 지겠지
우리가 울다 지치면
한 문명도 얼룩이 되고
갓 피어나는 꽃들도 얼룩이 되지
지금 나는
당신의 얼룩진 날들이 나에게 무늬를 입히고
달아나는 걸 본다
모든 것을 사랑하였어도
밤을 떠나는 별처럼 당신이 나를 지나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라진 문명이 돌연 찾아든 것처럼
내 벽에는 오래된 당신의
벽화가 빛나겠지
천년을 휘돈 나비가 찾아들고
다시 한바탕 시간들 위로 꽃잎 날리고
비 내리고 사랑하고 울고 이끼 끼고
나의 얼룩도
당신처럼 시간을 지나가겠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9』(동아일보. 2013년 11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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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오늘의 커피
―윤성택(1972∼)
갓 내린 어둠이 진해지는 경우란
추억의 온도에서뿐이다
커피향처럼 저녁놀이 번지는 건
모든 길을 이끌고 온 오후가
한때 내가 음미한 예감이었기 때문이다
식은 그늘 속으로 어느덧 생각이 쌓이고
다 지난 일이다 싶은 별이
자꾸만 쓴맛처럼 밤하늘을 맴돈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 해도 우리는
각자의 깊이에서
한 그루의 플라타너스가 되어
그 길에 번져 있을 것이다
공중에서 말라가는 낙엽 곁으로
가지를 흔들며 바람이 분다
솨르르솨르르 흩어져내리는 잎들
가을은 커피잔 둘레로 퍼지는 거품처럼
도로턱에 낙엽을 밀어보낸다
차 한 대 지나칠 때마다
매번 인연이 그러하였으니
한 잔 그늘이 깊고 쓸쓸하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0』(동아일보. 2013년 1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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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겨울 이야기
―김상미(1957∼)
천 년 전 겨울에도 오늘처럼 문 열고 있었다
문 밖 짧은 해거름에 주저앉아 햇빛
제대로 이겨내지 못하는 북향,
쓸쓸한 그 바람소리 듣고 있었다
어떤 누구와도 정면으로 마주보고 싶지 않을 때
문득 고개 들어 바라보는 창
나뭇잎 다 떨어진 그 소리 듣고 있었다
세상 모든 추운 것들이 추운 것들끼리 서로 모여
내 핏속 추운 것들에게로 다가와
똑 똑 똑
생의 뒷면으로 가는 문
두드리는 소리 듣고 있었다
물결치는 겨울 긴 나이테에 휘감긴 울창한
숲 향기와 지저귀는 새소리와
무두무미한 생의 입김들이
다시 돌아올 봄 문턱에다 등불 환히
켜는 소리 듣고 있었다
마치 먼 길 혼자 달려온 천 년 전 겨울
천천히 가슴으로 녹이는 것처럼
내 몸 안의 겨울 이야기들이
소리 없이 내리는 함박눈에 실려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기억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 듣고 있었다
천 년 전 겨울에도 오늘처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1』(동아일보. 2013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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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주님의 기도
―니카노르 파라(1914∼)
온갖 문제를 짊어지신 채
세속의 보통사람처럼
오만상을 찌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더는 저희를 생각하지 마소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괴로워하시는 걸 이해합니다.
당신께서 세우시는 것을 부수면서
악마가 당신을 괴롭힌다는 것도 압니다.
악마는 당신을 비웃지만
저희는 당신과 함께 눈물 흘리오니
낄낄대는 악마의 웃음소리를 괘념치 마소서.
불충한 천사들에 둘러싸여
어딘가에 계시기는 하는 우리 아버지
진심으로, 더는 저희 때문에 고통 받지 마소서.
당신은 아셔야 합니다.
신들도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며
저희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것을.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2』(동아일보. 2013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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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정릉 산보
―최동호(1948∼)
새벽 언덕길,
사지가 굳어 거동이 불편한 아들에게 아침체조를 가
르치는 젊은 어머니가 있다
좁은 산길,
중학생 영어를 암기하다 얼른 등 뒤에 책을 감추고
내려오는 중년여성이 있다
봄 언덕길,
꽃아 예쁘다 새야 반갑다 손뼉 쳐 햇빛 가르며 올라
가는 꼬부랑 할머니가 있다
점심 산보길,
소풍 온 유치원 아이들 새처럼 포르르 날아오르는 노
랫소리가 있다
저녁 산보길,
빛나던 대낮의 햇살들 다 서풍에 실어 보낸 나뭇잎들
이 실개천에서 반짝이며 놀던 물비늘 찾아오라고 초
저녁 하늘 멀리 있는 별들을 부르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3』(동아일보. 2013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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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형편대로
김주대
술파는 여자를 사랑했다
그녀는 내 형편을 사랑했고 한동안
나는 외로움을 잊었지만
형편이 어려워지자 그녀는 떠났다
형편 좋은 사람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시집『나쁜 사랑을 하다』(답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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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비밀정원
―정용주(1962∼)
다래 덩굴처럼
산속으로 이어진 오솔길
죽어 쓰러진 나무들 스스로 껍질을 벗겨내고 있다
엉킨 덩굴에 매달려 쪼그라든 몇 개 산열매처럼
지워져가는 길의 가지 끝에서
돌무더기 쌓아놓은 흔적만 남아 있는
화전민들의 옛 집터
증거해야 할 아무 자랑도 없이
부서져 내리지 못하는 이끼 덮인 돌 위의 돌
언제부터 자란 오미자 덩굴이
쓸쓸한 흔적의 정원에 공중 그물을 엮었다
스웨터를 장식하는 구슬 같은
오미자 송이가 주렁주렁 열렸다
햇살의 정적을 빨아먹으며 몸을 붉혀가는 오미자 열매
스스로 제 고독을 완성시켜가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5』(동아일보. 2013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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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박주택(1959∼)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었다 작은 저녁이었다
우유를 먹은 배가 슬슬 부글거릴 때쯤
부딪쳐서 돌아올 것이 없는 초원이었다
오지 않을 것 같은 날짜는 돌아온다
벌레들이 풀과 풀 사이를 건너뛰고 개 짖는 소리는
어디에서나 같다는 사실
(듣기를 달리 들을 뿐이지!)
작은 저녁이, 노을이 파고든 자리 어둠이 파고들어서
사람들이 자신 속으로 걸어가 자신이 되는 저녁
여기에도 사람이 살아 긴 옷을 끌며
맨발로 흙 위를 걸으며 돌아가는 법을 배우지
초원을 건너오는 멀리 기차 지나가는 소리
딱 하고 옆방에서 커피포트 멈추는 소리
벌레들의, 까마귀들의, 목구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
불안도 잠자지 않고 순간에 부딪치는 말처럼
생각들이 칼칼하게 치뜨고 있는데
불안과 불안이 부딪치는 불꽃들
겨우 요양하는 기분인데 날이 갈수록 유배되는 기분
그러나 이곳 날씨는 여름, 꽃들과 함께 놀아, 무엇을 하든
어른이잖아?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6』(동아일보. 2013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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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겨울이 오면
―김갑수(1959∼)
겨울이 오면 맑은 얼음장 지쳐가는
낮은 햇살, 겨울이 오면 배달해주게
지난여름에 다 못 쓴 편지, 우연한 사건들과
몇몇의 사람, 오 겨울이 오면
내게 말해주게 사람과 사람이
어긋난 흔적, 몸부림 따위들, 오래
예정된 결말의 느릿느릿한 진행에
끝끝내 겨울이 오면 그 황황한 뒷모습
서둘러 부려놓는 필연의 짐짝에
겨울이 오면 지친 나뭇가지의 손짓으로
헐겁게 흔들리는 약속들과 다만 몇몇의 사람
어떤 일도 체념하기 위하여 겨울이 오면
맑은 얼음장 지쳐가는 운명의 낮은 햇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7』(동아일보. 2013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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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은혼
―김명인(1946∼)
바닥의 무료까지
지치도록 퍼낼 생(生) 거기 있다는 듯
모든 풍경들 제 색깔을 마저 써버리면
누런 햇빛 알갱이들 강을 싸안고 흩어지는 것 같아
물소리 죄다 흘러 보내더라도
더는 못 가게 마음 방죽 쌓아 너를 가둔다
잎들을 얽으려 할 때 햇살들이 마구 엉겨 붙어서
초록 기억으로 흠뻑 젖었던 적은 없느냐?
그때에도 사나운 이목, 다리 아래 격랑보다 더 두려웠다
나는 무슨 워낭으로도 네 베틀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어서
갈바람 낙엽 행낭에 담아 세월이라 부친다
받아 보거든 은하 물살 거세었음을 알리라
머리 위로 깃털 빠진 까막까치들 날아간다
길 아닌 길도 땅 위의 것이라고
이제 내가 겨우 깨쳐서 놓고 있는 징검다리,
저문 혼례 그 언저리나 맴도는
이 가을날 꿈같이, 빛같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8』(동아일보. 2013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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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나의 방랑(환상)
―아르튀르 랭보(1854∼1891)
나는 쏘다녔지, 터진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내 외투는 닳아빠져 관념이나 다름없었지.
창궁 아래 걷는 나는, 뮤즈여, 그대의 충복이었네.
오, 랄라, 나는 눈부신 사랑을 꿈꾸었노라!
내 단벌 바지엔 커다란 구멍이 나고,
나, 꿈꾸는엄지동자,걸음마다각운(脚韻)을떨어뜨렸지.
내 여인숙은 큰곰자리,
하늘에선 내 별들이 다정하게 살랑거렸네.
나는 길가에 앉아 별들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였지.
멋진 9월의 저녁나절, 이슬방울들을
기운을 북돋우는 술인 양 이마에 느끼면서
환상의 그림자들 가운데서 운(韻)을 맞추며
나는 한쪽 발을 가슴까지 들어 올려,
해진 구두의 끈을
리라 타듯 잡아당겼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9』(동아일보. 2013년 12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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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도끼의 시
―손택수(1970∼)
예전의 독기가 없어 편해 보인다고들 하지만
날카로운 턱선이 목살에 묻혀버린
이 흐리멍텅이 어쩐지 쓸쓸하다
가만히 정지해 있다 단숨에 급소를 낚아채는 매부리처럼
불타는 쇠번개 소리 짝, 허공을 두 쪽으로 가르면
갓 뜬 회처럼 파들파들 긴장을 하던 공기들, 저미는 날에 묻어나던 생기들,
애인이었던 여자를 아내로 삼고부터
아무래도 내 생은 좀 심심해진 것 같다
꿈을 업으로 삼게 된 자의 비애란 자신을 여행할 수 없다는 것,
닦아도 닦아도 녹이 슨다는 것
녹을 품고 어떻게 녹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녹스는 순간들을 도끼눈을 뜬 채 바라볼 수 있을까
혼자 있을 때면 이얍 어깨 위로 그 옛날 천둥 기합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오기도 하는 것인데, 피시식
알아서 눈치껏 소리 죽인 기합 소리는 맥이 빠져 있기 마련이다
한번이라도 꽉 짜인 살과 살 사이의 틈에 제 몸을 끼워 맞추고
누군가를 단숨에 관통해 본 자들은 알리라
나무는 저를 짜갠 도끼날에 향을 묻힌다
도끼는 갈고 갈아도 지워지지 않는 묵향을 그리워하며 기꺼이 흙이 된다
뒤꿈치 굳은살 같은 날들 먼지 비듬이라도 날리면
온몸이 근질거려 번쩍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고 싶은 도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0』(동아일보. 2013년 12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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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아픔
―강정(1971∼ )
계절을 잊은 눈비가
땀구멍마다 들어찬다
몸 안에 잠자던 운석이 눈을 뜬다
목탁 구멍 같은 뼈마디 사이로
이승이 밀려 나간다
구름들의 뒤 통로에
짓다 만 집 한 채 스스로 불탄다
마지막 입술이 한참동안 떨린다
나부끼는 재(災)
누군가 텅 빈 문을 열고
타다 남은 햇살을 주워 담는다
뜻 없이 불러본 이름들이 마음보다 길게 늘어서
지나온 이승에서 즐겁게 눈물겹다
보이는 것들은 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된다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어느덧 새 이름을 얻는다
계절이 빠르게 바뀐다
숨을 쉬니 한 세상이 저만치
다른 상처에 다 닿았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1』(동아일보. 2013년 12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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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바다 속 마을
―함성호(1963∼)
눈이 내리는 속초는 바닷가 덕장에 널려 있는, 푸른 명태의 아가미 근처에 있다 아― 하고 벌린 입 미세한 이빨들 사이로 눈이 쌓이고, 그런 날 겨울 바다는 적막이다 명태 아가리에 소복이 쌓인 산송장 같은 눈을 훔쳐 먹으며 아이들이 빈 그물을 흔들고 있다 무너져 내리는 함박눈 맞으며 누군가 환난의 호루라기를 불어 언덕 아래로 뛰어내려온다 사르락사르락 눈 내리는 소리가 낮은 파도 소리와 같이, 얼어붙은 모래사장에서 살을 섞고 있다 긴 목도리를 눈 밑까지 두른 옆집 누나가 슬리퍼를 끌며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다 궂은 날이나 마음 다친 날은 만(灣)을 건너는 사람 없어, 갯배에서 바다로 내린 밧줄 위로도 흰 눈은 쌓이고, 그런 날 속초는 지상에 없는 마을 같다 누군가 아주 멀리서 누군지 모르는 흐린 이름 부르는 소리 들린다 저 배 위로 아무 울림도 없이 흰 눈은 쌓여 바닷가 모래밭과 흰머리 무거운 송림 사이에서 붉은 해당화도 서럽게 설핏, 피다 만 것 같은…… 그런 날 속초는 아가미 호흡을 하는 슬픈 생선 같기도 하다가, 아무래도 그물에서 잘못 건져 올린 죽은 시계 소리 같기도 하다 등대는 뚜우 뚜우 배들을 부르고, 안개등을 흔들며 호응하는 목선이 들어오는 세상의 바다
바다 속 마을에는 흰 눈이 내려, 깊은 바다 속 골짜기에도 하염없이 눈은 내리고,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 유물처럼―눈白은 내리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2』(동아일보. 2013년 12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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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풍선
―황학주(1954∼)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날이 있다
아이에게 풍선을 불어 묶어주려다
갑자기 바람구멍이 열리자
풍선이 갯벌 위로 끌려 날아간다
무슨 말을 저리 온몸으로 하나싶어 문득 소름 돋는다
간간이 대화를 하며 뭔가 부풀리다
열려버리는 바람구멍
묵은 굴레를 하나도 풀지 못한 채
입김처럼 그것이 사라지는 날이 있다
그 사이 나는 얼음장처럼 얼다 녹는다
색색의 풍선이 떠있는 바다
또 하나 풍선이 터지면
부끄러운 입술 하나가 다물어지는 걸까
풍선 속에 하나 둘씩 별을 묶던
여기, 마음은 그때 가난한 밤을 위한 묵념으로 흐른다
말이 나를 끌고 멋대로 날아가도
기절할 정도로 좋았던 시절은 이미 끝난 지 오래인데
아직도 풍선을 불고 있는
슬픈 입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3』(동아일보. 2013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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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하루
―윤명수(1941∼ )
신대방 전철역 아래 도림천 고수부지에는 매주 월요일 새벽이면 뱀이 기어가듯 인간 띠가 늘어선다 꼬부라진 지팡이들이 급식 순번표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더러는 노숙을 해가면서 새벽안개로 아침을 때우고 하품을 입에 문 채 시멘트 바닥을 긁고 있다 오늘은 선착순 오백 명까지다 순번표를 받지 못한 빈손들은 돌계단에 지팡이를 내려놓고 널브러져 있다 이글거리는 햇살만 한입 가득 물고 먼 하늘만 쳐다본다 순번표 속에는 단팥빵 세 개, 이백 밀리리터 두유 한 팩, 현금 천 원이 들어 있다 어떤 이는 빵 한 봉지와 두유를 그 자리에서 천 원을 받고 되팔기도 한다 그 돈으로 라면을 사들고 휘적휘적 허기진 쪽방으로 지팡이에 끌려간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3』(동아일보. 2013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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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언니에 대한 칭찬의 말
―비스와바 심보르스카(1923∼2012)
우리 언니는 시를 쓰지 않는다.
아마 갑자기 시를 쓰기 시작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시를 쓰지 않았던 엄마를 닮아,
역시 시를 쓰지 않았던 아빠를 닮아
시를 쓰지 않는 언니의 지붕 아래서 나는 안도한다.
언니의 남편은 시를 쓰느니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할 것이다.
제아무리 그 시가 ‘아무개의 작품’이라고 그럴듯하게 불린다 해도
우리 친척들 중에 시 쓰기에 종사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언니의 서랍에는 오래 된 시도 없고,
언니의 가방에는 새로 쓴 시도 없다.
언니가 나를 점심식사에 초대해도
시를 읽어 주기 위해 마련한 자리는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녀가 끓인 수프는 특별한 사전 준비 없이도 그럴싸하다.
그녀가 마시는 커피는 절대로 원고지 위에 엎질러질 염려가 없다.
가족 중에 시 쓰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그런 가족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결국 시인이 나왔다면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는 법은 없다.
때때로 시란 가족들 상호간에 무시무시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세대를 관통하여 폭포처럼 흘러간다.
우리 언니는 입으로 제법 괜찮은 산문을 쓴다.
그러나 그녀의 유일한 글쓰기는 여름 휴양지에서 보내온 엽서가 전부다.
엽서에는 매번 똑같은 약속이 적혀 있다.
돌아가면
얘기해 줄게.
모든 것을,
이 모든 것을.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5』(동아일보. 2013년 12월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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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인성의 비교급
―윤병무(1966∼)
영리한 것보다는
정의로운 게 낫고
정의로운 것보다는
착한 게 낫다
하지만
사상체질(四象體質)도 두 가지쯤 섞여 있듯이
인성(人性)도 짬짜면이라 탄식이 이어진다
정의롭지 못한 영리함의 저속함이여
영리하지 못한 정의로움의 허망함이여
착하지 못한 정의로움의 역겨움이여
정의롭지 못한 착함의 막연함이여
그럼에도 굳이 하나만 골라 비교하자면
영리한 것보다는 정의로운 게
정의로운 것보다는 착한 게 낫다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니다
보는 것이 진실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7』(동아일보. 2013년 12월 20)
―시집『고단』(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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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인성의 비교급
―윤병무(1966∼)
영리한 것보다는
정의로운 게 낫고
정의로운 것보다는
착한 게 낫다
하지만
사상체질(四象體質)도 두 가지쯤 섞여 있듯이
인성(人性)도 짬짜면이라 탄식이 이어진다
정의롭지 못한 영리함의 저속함이여
영리하지 못한 정의로움의 허망함이여
착하지 못한 정의로움의 역겨움이여
정의롭지 못한 착함의 막연함이여
그럼에도 굳이 하나만 골라 비교하자면
영리한 것보다는 정의로운 게
정의로운 것보다는 착한 게 낫다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니다
보는 것이 진실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7』(동아일보. 2013년 12월 20)
―시집『고단』(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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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인사동으로 가며
―김종해(1941∼)
인사동에 눈이 올 것 같아서
궐(闕) 밖을 빠져나오는데
누군가 퍼다 버린 그리움 같은 눈발
외로움이 잠시 어깨 위에 얹힌다.
눈발을 털지 않은 채
저녁 등이 내걸리고
우모(羽毛)보다 부드럽게
하늘이 잠시 그 위에 걸터앉는다.
누군가 댕그랑거리는 풍경소리를
눈 속에 파묻는다.
궐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내 생의 그리움
오늘은 인사동에 퍼다 버린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8』(동아일보. 2013년 12월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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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봉숭아 꽃물
―이상교(1949∼)
봉숭아 꽃물
빨강 꽃물
콩콩 찧어
손톱 위에 두고
열 손가락 끝
호호
무명실로 묶어두었다.
밤사이
꿈속에서 꿈을 깨어
풀어볼 때마다
그대로 흰 손톱
안타까운 흰 손톱.
눈뜨자 곧
풀어보았다.
손톱에 핀 봉숭아 꽃물
바알간 봉숭아 꽃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9』(동아일보. 2013년 12월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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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악기
―도종환(1954∼)
언덕 위에서 누군가 트럼펫을 분다
그때 우리가 불었던 악기도 저런 소리를 냈었다
서툴지만 뜨거웠던 소리
열정이 아니면 음악이 아니라고 믿었던 소리
미숙하지만 노래 한 곡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던 소리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소리
몸속으로 악기소리만을 서둘러 채우고는
민망하여 허겁지겁 악기를 챙겨 넣으며
지퍼를 올리던 날들
너무 이르거나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아
스쳐가고 만 사람들
저 악기소리 속에는
그런 순간 그런 얼굴이 들어 있다
이제 나의 악기소리는 매끄럽지만
열정의 뜨거운 숨소리는 없다
내가 뿜어내는 음표들은 세련된 활이 되어 날아가지만
그때 그 풋풋함은 없다
언덕 위에서 누군가 젊은 트럼펫을 분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00』(동아일보. 2013년 12월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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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향긋이 나직이
―앨프리드 테니슨(1809∼1892)
향긋이 나직이, 향긋이 나직이,
서쪽 바다로부터 부는 바람,
나직이 나직이 숨쉬고 불어라.
서쪽 바다의 바람아!
구르는 물결 불어 넘어서
저무는 달 너머로부터
내게 다시 그이를 데려다 주렴.
나의 아기 귀여운 내 아기 잠든 사이에.
자거라 자거라 편히 자거라.
이제 곧 아빠가 네게로 오신단다.
쉬어라 쉬어라 엄마 품속에,
아빠가 네게로 오신단다.
은빛 달 아래 서쪽에서
은빛 돛들 무리져 오면.
자거라 내 아기, 자거라 예쁜 아기, 어서 자거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01』(동아일보. 2013년 12월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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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반복의 이유
―이성미(1967∼)
나는 너를 반복한다. 너를 알 수 없을 때
너의 이름을.
나는 언덕을 반복한다.
반복하면 너는 민요처럼 단순해진다.
반복하면 마음이 놓인다.
만만해 보이고
알 것 같고
반복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법칙이 생길 것 같다. 게임처럼
너에게도 언덕에게도.
반복하다 보면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반복하면 리듬이 생긴다.
리듬은 기억하기 좋고
연약한 선을 고정시킨다.
고개와 어깨에 잘 붙고 발바닥과 손바닥과 친하고
리듬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
리듬은 주술 같고
리듬이 된 것은
일이 어렵기 때문인데
리듬으로 두려움이 줄어들고
낯섦도 줄어든다.
리듬은 폭력과 가깝고
노래와도 가까워서
리듬은 아름다운 노래가 되기도 한다.
노래를 부르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면
마치 형태가 있다는 듯이
손으로 부드럽게 쥐어서
너에게 줄 수 있을 것 같다.
너에게서 건네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02』(동아일보. 2014년 01월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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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서풍부(西風賦)
―김춘수(1922∼2004)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꽃인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온통 풀 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03』(동아일보. 2014년 01월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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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사업
―정복여(1958∼)
집을 한 다섯 채 지어서 세놓을까
한 채는 앞마당 바람 생각가지 사이에, 한 채는 초여름쥐똥나무 그 뿌리에, 다른 한 채는 저녁 주황베란다에, 또 한 채는 추운 목욕탕 모퉁이에 지어,
한 집은 잔물결구름에게 주고, 한 집은 분가한 일개미가족에게 주고, 또 한 집은 창을 기웃대는 개망초흰풀에게, 한 집은 연못가 안개새벽에게 그리고 한집은 혼자 사는 밤줄거미에게 주어,
처음에는 집세를 많이 받겠다고 하다가
다음에는 집세를 깎아주겠다고 하다가
결국은 그냥 살아만 달라고 하면서
거기 모여 사는 착한 이웃 옆에
나도 그렇게 세를 놓을까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04』(동아일보. 2014년 01월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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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잘 가라, 환(幻)
―이규리(1955∼ )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굶어도 배고프지 않은 그런 때가 있다
뭔가 휙, 지나가버린 때
주방 구석에 앉아 상추쌈 먹으며 울었다
쑥갓 두어 잎 얹어 먹으며 울었다
푸성귀처럼 퍼렇게 살아 있으리라 믿지는 않았지만 지나갔다,
막막해서 입 미어지도록 상추쌈 쑤셔 넣었다
혀를 깨물었다 허가 씹혔다
치명적인 오류가 생겼을 때
아무 키나 누르면 회복되기도 하지만
그나마 남은 것 지워질까 봐
노심초사 상추쌈만 꾸역꾸역 넣는다
쌈장에 찰지게 버무려진
환(幻)이라는 것,
마늘 환(幻), 양파 환(幻), 참깨 환(幻)
꼭꼭 씹어 먹는다
내가 먹은 게 너였나
너가 먹은 건 나였나
가부좌 틀고 앉아 들었다 놨다 한 너,
잘 가라, 환(幻)
속치마 레이스 같은 환(幻)을 걷어내면 문득
실핏줄 아른아른 비치는 늙음이 다가와 있을 거다
여기서부터 가파르다
단물 빠진 거친 밥상 위
이제부터 제대로 맛을 아는 때라고
깊은 맛은 씹은 뒤에 안다고
넌지시 또렷하게 말하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05』(동아일보. 2014년 01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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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이명(耳鳴)
강형철(1955∼ )
1980년대 한창 어지러울 때
형사들에게 불려가 조사받느라고 철야는 했지만
워낙 피라미라 별일도 없었는데
어머니는 나라가 조금만 시끄러워도
쉰 중반 션찮은 아들 걱정이 태산이다
여동생이 모시고 사는 인천에
일주일에 한 번씩 문안 가는 일로
장남 일을 때우고 있는데
어느 날은 나를 구석으로 데려가 묻는다
니가 뭔일 저질른 것 아녀
그런디 왜 차코 테레비에서 니 얘기를 허는 거여
무슨 얘기냐는 질문에
누이가 말한다
사대강 예산삭감 문제로 국회예결위원장석을 점거
한 야당을 물리치고
여당이 단독으로 강행 처리했다는 뉴스가 나오자마자
오빠, 너한테 전화혀보라고
엊저녁부터 난리라고
강행처리가 차코 나온다고
큰일이 터졌다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06』(동아일보. 2014년 0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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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부엌 칸타타
―박은율 (1952∼)
저녁을 짓는다
부엌은 나의 제단
일상은 나의 거룩한 구유
나는 부엌의 사제
망사 커튼 드리운 서향 창
저녁놀 아래
희생 제물과 번제물을 마련한다
불과 샘 칼과 도마의 혼성4부합창
압력솥의 볼레로
냄비와 후라이팬과 주전자의 푸가
접시와 사발들의 마주르카
영대 대신 앞치마를 두른
나는 부엌의 제사장
부엌은 성스러운 나의 제단
쉭쉭대는 수증기 설설 끓는 국과 찌개들의 파르티타
당신은 즐겨 흠향 하신다
삶의 싱싱한 비린내와 비루함의 비밀스런 비빔밥
수다스런 푸성귀들의 아삭거리는 음표들
당신이 가장 오래 음미하는 애끓는 간장
말 없는 섬유질의 혀
오늘도 나는 저녁을 짓는다
부엌, 아득할 것도 없는 나의 지평선
맵고 쓰고 짜고 시큼한
넘실거리는 한 잔, 나를 곁들여
참 까탈스런 미식가 당신에게 바친다
공손한 듯 삐딱하게
그래도 두근거리며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07』(동아일보. 2014년 0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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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겨울 편지
―안도현(1961∼ )
댓잎 위에 눈 쌓이는 동안 나는 술만 마셨다
눈발이 대숲을 오랏줄로 묶는 줄도 모르고 술만 마셨다
거긴 지금도 눈 오니?
여긴 가까스로 그쳤다
저 구이(九耳) 들판이 뼛속까지 다 들여다보인다
청둥오리는 청둥오리 발자국을 찍으려고 왁자하게 내려앉고,
족제비는 족제비 발자국을 찍으려고 논둑 밑에서 까맣게 눈을 뜨고,
바람은 바람의 발자국을 찍으러 왔다가 저 저수지를 건너갔을 것이다
담배가 떨어져 가게에 갔다 오느라
나도 길에다 할 수 없이 발자국 몇 개 찍었다
이 세상에 와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것을
땅바닥에 찍고 다니느라
신발은 곤해서 툇마루 아래 잠들었구나
상기도 눈가에 물기 질금거리면서,
눈 그친 아침은, 그래서
이 세상 아닌 곳에다 대고 자꾸 묻고 싶어진다
넌 괜찮니?
넌 괜찮니?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08』(동아일보. 2014년 0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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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1950∼)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09』(동아일보. 2014년 0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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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검은 스웨터를 뜨는 시간
―조혜경(1967∼)
저 별은 고양이
돋아난 털, 반짝 세우고 눈을 빛내지
조종사가 사라진 하늘에 별이 돋는다
비행기가 사라지며 비행기자리가 되고, 잃어버린 장갑 한 짝이 장갑자리가 되어 뜨는
하늘이 점점 복잡해진다
손가락을 미끄러지는 털실
하늘만큼 복잡해지는 방안에서
여자는 뜨개질을 한다
살아있는 것들에게 선물하는 죽은 자의 시간,
죽은 양의 털을 손가락에 걸고 두 개의 바늘을 엇갈려서
꼬이고 엉키다 길어지는 털실 옷
살진 두더지의 발톱에 묻은 까만 흙처럼
네가 그토록 싫어하던 어둠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익숙한 냄새
사라진 자들이 써놓은 책을 얼굴 위에 덮고
너는 울고 있다 두더지의 밤, 두더지의 구석
두더지의 털이 조금씩 자라고 있다
요즘 자꾸 살이 쪄,
귀에도 살이 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잠든 네 몸통의 크기와 팔의 길이를 짐작해보며 이 밤
스웨터의 팔이 길어지고 있다
스웨터의 빈 단추자리를 노려보는
저 별은 너의 고양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10』(동아일보. 2014년 0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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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어느 밤의 누이
―이수익(1942∼ )
한 고단한 삶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혼곤한 잠의 여울을 건너고 있다.
밤도 무척 깊은 귀가길,
전철은 어둠 속을 흔들리고…
건조한 머리칼, 해쓱하게 야윈
핏기 없는 얼굴이
어쩌면 중년의 내 이종사촌 누이만 같은데
여인은 오늘 밤 우리의 동행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어깨에 슬픈 제 체중을 맡긴 채
송두리째 넋을 잃고 잠들어 있다.
어쩌면 이런 시간쯤의 동행이란
천 년만큼 아득한 별빛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잠시 내 어깨를 빌려주며
이 낯선 여자의 오빠가 되어 있기로 한다.
전철은 몇 번이고 다음 역을 예고하며
심야의 지하공간을 달리는데…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11』(동아일보. 2014년 0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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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장소들, 사랑하는 사람들
―필립 라킨(1922∼1985)
아니, 난 한 번도 찾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장소를
이곳이 내게 적당한 곳이야,
여기 머물러야겠어 나는;
또한 한 번도 만난 적 없다
그 즉시 주고 싶은 사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이름까지도 주고 싶은 사람을;
찾았다면 그게 증명인 듯해
우리가 선택권을 바라지 않는다는, 어디에
지을지, 아니면 누굴 사랑할지에 대해서 말이지;
그냥 데리고
가달라는 거지 변경할 수 없게,
그러므로 우리 탓 아니라는 거지
설령 읍이 따분해진단들,
처녀가 멍청이 된단들.
하지만, 그들을 놓쳤으니, 우린
어쩔 수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거야
마치 우리가 정착했던 이유가
우리를 으깨버렸다는 듯이, 사실은;
그리고 더 현명하지 그런 생각일랑
접어두는 게, 우리가 아직도 추적할 수 있다는 생각,
이날까지 부르지 않은
그 사람, 그곳을 말이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12』(동아일보. 2014년 0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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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화이바를 쓰고 머리를 긁었네
―박준범(1978∼)
멋쟁이 화이바를 쓰고
멋쟁이 오토바이를 타고
이 도시를 달린다
바람을 가르며
이 도시를 달린다
아 근데 스치는 바람에 머리가 가려워
아 근데 스치는 바람에 머리가 가려워
머리를 긁었네
아 긁어도 긁어도 머리가 하나도 안 시원해
아 긁어도 긁어도 머리가 하나도 안 시원해
화이바를 쓰고 머리를 긁어서 그런가 봐
화이바를 쓰고 머리를 긁어서 그런가 봐
화이바를 쓰고 머릴 긁었네
화이바를 쓰고 머릴 긁었네
화이바를 벗고 머릴 긁었네
아 머리가 시원해
아 머리가 시원해
화이바를 벗고 머리를 긁어서 그런가 봐
화이바를 벗고 머리를 긁어서 그런가 봐
그래 이제부터는 화이바를 벗고 머리를 긁어야지
그래 이제부터는 화이바를 벗고 머리를 긁어야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13』(동아일보. 2014년 0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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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막고 품다
―정끝별(1964∼)
김칫국부터 먼저 마실 때
코가 석자나 빠져 있을 때
일갈했던 엄마의 입말, 막고 품어라!
서정춘 시인의 마부 아버지 그러니까
미당이 알아봤다는 진짜배기 시인의 말을 듣는
오늘에서야 그 말을 풀어내네
낚시질 못하는 놈, 둠벙 막고 푸라네
빠져나갈 길 막고 갇힌 물 다 푸라네
길이 막히면 길에 주저앉아 길을 파라네
열 마지기 논둑 밖 넘어
만주로 일본으로 이북으로 튀고 싶으셨던 아버지도
니들만 아니었으면,을 입에 다신 채
밤보따리를 싸고 또 싸셨던 엄마도
막고 품어 일가를 이루셨다
얼마나 주저앉아 막고 품으셨을까
물 없는 바닥에서 잡게 될
길 막힌 외길에서 품게 될
그 고기가 설령
미꾸라지 몇 마리라 할지라도
그 물이 바다라 할지라도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13』(동아일보. 2014년 0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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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무슨 소리 ―고비삽화 5
신대철(1945∼)
양떼 따라 나선 길
풍경도 바람도 바뀌지 않는다,
뒤처진 채 지친 다리 끌고
머뭇머뭇 구릉을 내려가다
구멍 뚫린 화강암 괴석을 들여다본다,
고비 처녀는 내게 원시인 같은
녹색돌 하나를 떨어뜨리고 내닫는다
“양떼를 놓치지 말아요”
성난 말발굽 소리에 맞춰
모래바람이 갈기를 세운다
유목민도 수행자도 아니면서
나는 왜 사막에 있는가,
방랑기를 재우려고?
영혼의 갈증을 채우려고?
고비 사막처럼 처절하게 견디려고?
무슨 소리, 양떼를 놓치지 말아야지
사막도 초원도 아닌 곳을
나는 절뚝절뚝 걷는다,
양떼는 구물구물 흘러가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15』(동아일보. 2014년 02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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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대대포에 들다
―천양희(1942∼)
갈대의 등을 밀며 바람이 분다 개개비 몇 발끝 들고 염낭게 갯벌 물고 뒤척거린다 날마다 제 가슴 위에 거룻배 한 척 올려놓는 갈대밭 산다는 건 갈대처럼 천만번 흔들리는 일이었으나 실패한 삶도 때론 무엇인가 남긴다 남긴다고 다 남는 것일까 순천(順天)은 벌써 나를 알아버린 듯 마음의 물결까지 출렁거린다 섬은 발목 잡혀 꿈쩍 않는데 물거품이 해안까지 따라온다 언제 꽃을 바람처럼 피운 갈대들 그들이 환하다 문득 느낀다 내 어둠이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낮게 엎드린 포구 수평선 바라보다 나는 겨우 세상은 공평한가 묻고 말았다 방파제 너머 파도가 밀려간다 밀려간 것은 물결만이 아니다 날마다 내 속으로 밀려온 갈대들 오늘은 대대포에 들고 말았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16』(동아일보. 2014년 02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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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정신의 열대
이기철(1943∼ )
내 정신의 열대, 멱라를 건너가면
거기 슬플 것 다 슬퍼해 본 사람들이
고통을 씻어 햇볕에 널어두고
쌀 씻어 밥 짓는 마을 있으리
더러 초록을 입에 넣으며 초록만큼 푸르러지는
사람들 살고 있으리
그들이 봄 강물처럼 싱싱하게 묻는 안부 내 들을 수 있으리
오늘 아침 배춧잎처럼 빛나던 청의(靑衣)를 물고
날아간 새들이여
네가 부리로 물고 가 짓는 삭정이 집 아니라도
사람이 사는 집들
남(南)으로만 흘러내리는 추녀들이
지붕 끝에 놀을 받아 따뜻하고
오래 아픈 사람들이 병을 이기고 일어나는
아이 울음처럼 신선한 뜨락 있으리
저녁의 고전적인 옷을 벗기고
처녀의 발등 같은 흰 물결 위에
살아서 깊어지는 노래 한 구절 보탤 수 있으리
오래 고통을 잠재우던 이불 소리와
아플 것 다 아파 본 사람들의 마음 불러 모아
고로쇠 숲에서 우는 청호반새의 노래를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말로 번역할 수 있으리
내 정신의 열대, 멱라를 건너가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17』(동아일보. 2014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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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사우나탕에서, 쌀이시여
―차창룡(1966∼ )
화탕지옥에서 사우나로 땀 빼고 나오자 땀 쭉 빼고 나오자
쌀이시여 살아생전 사사건건 도와주신 쌀이시여 땀 쭉 빼고
나와서 내게 사사건건 밥이 되어주신 슬픔이시여 그렇지요 왜 그리
슬픔이었는지요 쌀이시여 당신이 흩어질까 두려웠지요 어머니는 밥이 된 당신
푹 익은 보리쌀 위에 얹어 뜸을 들이면 당신은 겸손하여 보리밥 속으로 묻히려 하지만
어머니의 닳아빠진 정교한 나무 주걱 살며시 떠올리면 새하얀 왜 그리 슬픔이지요 할머니의 밥이
가족 모두의 밥이 될 수 없었음 아니에요 할머니의 밥이
할머니의 밥이 될 수 없었으므로 내 밥이었으므로 어머니가
나무라셨지요 할머니는 손자들의 밥이었으므로 할머니 자다가 돌아가심
쌀이시여 죽음도 밥이지요 당신에겐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밥이지요
화탕지옥에서 아 우리 집 화탕지옥에서 젊어 떠나버린 할아버지
땀 있는 대로 빼고 떠나신 할머니 무쇠솥에 절하옵니다 쌀이시여
밥통에게 절하옵니다 사우나탕 절 받으시옵소서 땀이시여 떠나가는
혼들의 도포자락 밥이옵니다 땀 쭉 빼고 나오자 그 신사는 뚱뚱한 잠이 들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18』(동아일보. 2014년 0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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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환타 페트병
―이윤학(1965∼)
오전 내내 마룻바닥에 굴러
볕을 잘 쬔 1.5리터들이
우그러진
환타 페트병을 집어 든다.
피식 웃고 떠난 네 이름. 네 얼굴.
네 뒷모습 떠오르지 않는다.
정수기 꼭지에 대고 찬물을 채운다.
조금 남은 환타 빛 엷어진다.
어떻게 거기까지 들어갔는지
파리 한 마리
찬물 높이로 떠오른다.
파리가 날아간 뒤
환타 페트병
참았던 숨 울컥 토해놓는다.
장미 화분에 찬물을 주는 동안
환타 페트병 전신이 울렁거린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19』(동아일보. 2014년 0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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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빙하기를 맞다
―조동범(1970∼ )
그녀의 가슴 위로 빙하기 지나간다
백화점 텅 빈 매장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득한 빙원의 골짜기를 떠올리고 있다
빙원을 떠돌다 모습을 드러낸
먼 과거의 죽음처럼
그녀는 선뜩한 고요에 담겨
죽음의 군락을 떠올리고 있다
쇼윈도 안의 그녀는
온몸으로 빙하기의 고요를 견디고 있다
백화점 텅 빈 매장에 앉아
어둡고 긴 빙하기의 끝을 바라보고 있다
백화점은 매일 밤 간빙기를 거쳐
빙하기의 끝을 향해 치닫는다
쇼윈도의 그녀는
결빙의 순간을 지나치며
대빙원의 아득한 깊이를 바라본다
그녀의 선득한 가슴 위로,
빙하기 지나간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20』(동아일보. 2014년 0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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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산 너머 남촌에는
―김동환(190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데.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릿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 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영(嶺)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었다 이어오는 가는 노래는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데.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21』(동아일보. 2013년 2월 17일)
산 너머 남촌에는
김동환
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
2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 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령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나
끊었다 이어오는 가는 노래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데
(『해당화』. 대동아사 1942:『파인 김동환 시집』. 국학자료원. 199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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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봄나무 아래 가을을 심은 날
곽효환(1967∼ )
봄나무 아래에서 가을을 심었다
움트는 산수유나무 아래
꽃샘추위 들고 난 자리에
단풍나무 몇 그루 심은 오후
마른 풀 더미 물어 날라
전봇대 작은 구멍에 둥지를 튼
곤줄박이 한 마리 부산하다
그날 밤 때 아닌 큰 눈이 내리다
초봄의 대설주의보,
발목까지 무릎까지 푹푹
둔촌성당을 지나 한산초등학교 운동장을,
일자산을 뒤덮은 백색의 칼끝은
늦은 밤, 내 명치 끝을 겨누고 차오른다
오―오, 어린 봄나무의 숨결은
작은 박새의 둥지는
나의 순정은
때 이른 사랑이었는가 보다
이 눈 그치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22』(동아일보. 2013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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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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