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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쇠나무에 관한 시 모음 -이원규, 박라연, 정호승, 마경덕, 배우식 등...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 8.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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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쇠나무에 관한 시 모음]

 

고로쇠나무의 항변


이원규

 

 

저도 한 소식 전하고 싶은 것이다
지리산의 봄이 오기도 전에
빨대 꽂고 쪽쪽 피를 빠는 인간들에게
단풍나무과의 고로쇠나무도
한 말씀 전하고 싶은 것이다


무간지옥이 따로 있간디
차라리 죽여달랑께, 할 법도 한데
고로쇠, 고로쇠는 말이 없다
담황색 꽃을 피우고
아기 손바닥 같은 잎은 내저으며
고로쇠는 고로쇠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그해 늦가을
단풍놀이 온 인간들에게
말라비틀어진 검은 잎을 보여줄 뿐
단풍잎 하나 없는 지리산이 곧
아비지옥이란 것을 깨우쳐줄 뿐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8』(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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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고로쇠나무

 

박라연

 


오얏골에 봄이 오면
사람들의 죄 씻어주기 위해
일제히 눈뜨고 팔 벌리는
늙은 고로쇠나무
아무런 생각 없이 예수가 되어
물관부의 오른쪽과 왼쪽에
칼을 꽂고 피 흘린다
우리 아픈 점액질은 밤마다
산을 물어뜯고
더 이상 흘릴 피가 없어서
한 철 내내 속이 쓰린 나무들
전 생애의 옷을 벗는다
벗어버린 고로쇠나무 몇몇 씨앗들이
빛을 향해 뻗쳐오르고
오르던 푸른 팔들이
하늘 끝에 감전됐다 싸늘히
슬픈 눈빛으로 빛나던 수액들은 지금
흐르고 싶다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반야봉 낮은 기슭으로


시퍼렇게 잘려진 산맥 허리마다
깊어가는 죄만큼 슬픔만큼
발목에 붕대를 감고 서서 기다리는
지리산 고로쇠나무 달궁마을에서
산안개 내려와 투박한
그대 어깨를 주무를 때
눈물 흐른다 흐르는 눈물 밟으며
밤새워 걸어가면 만날 수 있을까
떠나온 산 안 잊히는 얼굴들을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문학과지성사. 1990)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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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쇠나무

 

정호승

 

 

나는 너희들의 어머니니
내 가슴을 뜯어가 떡을 해먹고 배불러라
나는 너희들의 아버지니
내 피를 받아가 술을 해먹고 취해 잠들어라
나무는 뿌리만큼 자라고
사람은 눈물만큼 자라나니
나는 꽃으로 살기보다
꽃을 피우는 뿌리로 살고 싶었나니
봄이 오면 내 뿌리의 피눈물을 먹고
너희들은 다들 사람이 되라

 

 


-시집『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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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쇠나무

 

마경덕

 

 

백운산에서 만난 고목 한 그루. 밑둥에 큼직한 물통 하나 차고 있었다. 물통을 반쯤 채우다 말고 물관 깊숙이 박힌 플라스틱 호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둥치에 구멍을 뚫고 수액을 받던 자리. 시름시름 잎이 지고. 발치의 어린 순들, 마른 잎을 끌어다 푸른 발등을 덮고 있었다.


링거를 달고 변기에 앉은 어머니. 기저귀를 갈아주는 자식놈에게 부끄러워 얼른 무릎을 붙이는, 옆구리에 두 개의 플라스틱 주머니와 큼직한 비닐 오줌보를 매단 어머니. 호스를 통해 세 개의 주머니에 채워지는 어머니의 붉은 육즙肉汁. 오십 년 간 수액을 건네준 저 고로쇠나무.

 

 


-시집『신발론』(문학의 전당,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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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쇠나무


배우식

 

 

그녀가 지리산 비탈길에 서 있다


웃통을 벗어젖히고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온
굶주린 봄이
물고기처럼 지느러미를 세차게 친다
그녀의 물살이 빨라지고
굶주린 물고기는
그녀의 뼈 속을 뚫고 지나간다
몸 속 깊이 열쇠를 밀어 넣은
굶주린 물고기가
그녀의 허리띠를 풀어헤친다
뇌관 같은 울먹한 슬픔위로
욕망에 굶주린 물고기가 내려앉는다
그녀의 밑동이 쩍 갈라진다


여자의 젖은 혓바닥이 툭 떨어진다
물소리 흐르는
붉은 구름 하나가 혓바닥에 걸려있다

 

 

 

(2005년 제7회 수주문학상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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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쇠 옆구리


김정애

 


뚫어야만 다스려지는 상처가 있다
뭉툭한 옆구리에 핏물을 가두고
거친 호흡으로 살아가던 나무가
잎사귀의 언어로 조용히 말을 걸어올 때
꿈의 밑동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세상에 저문 울음들을 끌어안고
복수腹水를 다스리는
노모의 시간


살갗 밑으로 가는 뿌리가 자라나고
산을 들어 올릴 듯 무거워진 몸으로
때론,
내 것의 체취도 조금은 빼내고 살자며 옆구리를 들춘다
콸콸콸 쏟아내는 물속에는
어머니의 깊은 한숨과 불면의 시간들이 우러나 있고
혈관을 따라 울려 퍼지는 피의 음악이 스며 있어
꿀떡 삼킬 순간을 놓치고 숲에 안겨본다
바람을 휘저으며 폭포를 향해 뻗어가던 기상과
쇳물을 다스리는 철의 여인 같던 고집이
명치 한복판을 뚫고 뼈의 무늬로 흐르고 있다
우글거리는 잎사귀를 향하여
응달을 다스리고 있다.

 

 

 

(2013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