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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인 수필가·KPR 미디어본부장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입력 : 2013.02.26 21:28
37년 전 군대서 냅다 뺨 맞은 뒤로 내 귀 떠나지 않는 귀뚜라미 소리…
온갖 처방이나 효험도 소용 없어 우연히 딱 마주친 가해자 중대장
‘화풀이해봐야 이명 없어지나’ 참아 이젠 운명처럼 친구 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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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 체험자들은 먼저 자신이 육체적으로 죽었다고 인식한 후 잠시 평화롭고 유쾌한 기분을 느끼며 공중을 떠다니다가 고귀한 빛의 존재를 만난다. 다음에는 자신이 지나온 인생을 생생하게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는데, 일평생이 주마등처럼 휘~익 지나갔다가 하이라이트만 다시 조명된다. 그런데 그 하이라이트라는 게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라 아쉽거나 안타깝고 불행했던 순간들이다.
만약 내가 죽음에 이른다면 어떤 순간들이 명멸(明滅)할까? 아마도 37년째 단 1초도 쉬지 않고 나를 괴롭히고 있는 이명(耳鳴)을 얻게 된 순간과 그 이명의 가해자를 30년 만에 극적으로 마주친 순간일 것이다.
시곗바늘을 1976년 여름으로 돌려보자. 강원도 원주의 한 육군 부대에 근무할 때였다. 사단장기(旗) 타기 중대별 사격대회가 열렸는데, 나는 그날따라 컨디션 부진인지 성적이 시원찮았다. 다른 중대에 비해 단체 기록이 나빠서 화가 난 중대장은 내무반장인 내가 평균보다 못 쐈다며 가까이 오라고 하더니 냅다 뺨을 갈기는 게 아닌가. 자라면서 부모에게도 뺨을 맞은 적이 없어 분한 마음이 일었지만 병영에서 일어난 일이라 애써 잊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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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서 소리가 조금 커진 데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자 '현대 의학이 이런 것도 못 고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비인후과에서는 예전의 대학병원과 똑같은 소리를 해서 양의학은 포기하고 한의원을 찾아가니 "고칠 수 있다"며 침도 놓고 한약도 처방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벌침이 효험이 있다고 해서 벌침도 맞아 보았지만 헛돈만 쓰고 말았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발견한 일본 전래 비법에 따라 서울 경동시장에서 어른 주먹만 한 달팽이를 열 마리쯤 사서 바싹 태워서 그 가루를 하루 한 입씩 두 달에 걸쳐 먹어 보았으나 그 역시 효과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젠 완전히 포기해야지'라고 마음을 편히 먹고 '적(敵)과 동침'에 들어갔다가 어느 월간지의 한의사 칼럼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이명에 관해서 너무나 박학다식한 데다 완치(完治)한 사례들을 열거해 놓았으니 다시 절박한 심정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처방에 따라 특효침에다 태반주사까지 맞았지만 소리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비싼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한 달 보름 만에 치료를 포기하고 양의(洋醫)든 한의(韓醫)든 병원은 다시 쳐다보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는 천형(天刑)이나 다름없는 이명을 안겨준 중대장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원망해 봐야 소용없고 또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데 찾아가 멱살잡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지금부터 7년 전 친구들과 골프를 치려고 서울 송파에 있는 군(軍) 골프장을 찾았다가 입구에서 예비역 대령이 돼 있는 그 중대장과 딱 마주쳤다. 30년이 흘렀어도 나는 한눈에 그를 알아봤지만 그는 운동시간에 늦었는지 헐레벌떡 뛰어가느라 나를 보지 못했다.
그 순간 내 귀에는 악마와 천사의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야! 30년간 네가 괴롭힘을 당한 걸 생각해 봐. 당장 달려가서 어깨를 잡고 주먹이라도 날려 봐!" "이제 와서 화풀이한다고 이명이 없어질까. 중대장 가슴을 괜히 멍들게 하지 말고 모른 체하셔~." 나는 단 3초, 기로의 순간에 천사의 소리를 듣기로 결심했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이명은 언젠가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이롱(耳聾)이 된다고 한다. 이제 육십대에 들어서는 나로서는 난청이 올까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술 마실 때 소리가 좀 높아져 신경이 쓰일 뿐 일상생활은 물론 잠자는 데도 큰 지장이 없으므로 운명으로 여기며 살아갈까 한다. 어느 날 잠에서 깼을 때 내 귀에서 귀뚜라미가 홀연히 사라진 걸 기뻐하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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