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동남부 내륙에 위치한 시.
남으로는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 및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을 경계로 하고, 동으로는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북으로는
하장면, 서에는
상동읍이 위치한다. 동경 129°06'~128°52', 북위 37°03'~37°20'에 위치한다. 면적은 303.52㎢이고, 인구는 5만 1,028명(2008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8개 동이 있다. 시청은
강원도 태백시 황지동에 있다.
태백산맥에서 분기한 태백산(太白山, 1,567m) 영동산악 협곡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매봉산 천의봉을 분수령으로 한 한강, 낙동강, 오십천의 발원지이다. 시의 형태는 중심부에 해발 1,171m의 연화산(蓮花山, 1,171m)이 위치하고 있고, 그 주위는 황지, 장성, 철암, 통리 등 4개 지역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시 전체가 매봉산(1,303m), 백병산(白屛山, 1,259m), 함백산(咸白山, 1,573m), 금대봉 등의 멧봉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해발 650m의 고원분지를 이루고 있다.
특히, 매봉산과 태백산을 중심으로 1,300m 내외의 고위평탄면(高位平坦面)이 발달해 있다.
하천은 시의 중북부에 있는 매봉산을 중심으로 북류하는 남한강(南漢江)의 상류인 골지천(骨只川)과 남류하는 낙동강(洛東江)의 상류인 황지천(黃池川)·철암천(鐵巖川)이 있다. 게다가 동쪽에 동류하는 오십천(五十川)과 가곡천(柯谷川)이 있어 두부침식(頭部侵蝕)에 의한 하천쟁탈(河川爭奪) 현상이 활발하다.
평야는 거의 없으나 비교적 완만한 고위평탄면이 곳곳에 발달해 밭으로 이용된다. 지질은 주로 고생대 조선누층군의 석회암과 평안누층군의 지층이 분포하며, 오랜 지질시대의 지각운동을 받아 지질구조가 매우 복잡하다.
기후는 내륙산간지대의 특징인 고랭지기후와 산지기후가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기온은 비교적 낮으며, 겨울이 길고 봄·가을이 짧다. 태백지역의 기후대는 영동과 영서를 구분하는 태백산맥의 정점에서 영서쪽으로 치우친 고지대 협곡의 고랭지대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엔 추운 산악형 기후를 갖고 있다. 과거 10년간(’94~’03) 연평균 기온은 8.7℃이며, 최고기온은 14.4℃, 최저기온은 3.6℃로 평균기온차가 심하다.
연평균 강수량은 1,336.6㎜로 주로 여름철에 집중되며, 우천일수는 100일 내외, 적설기간은 40일 정도다. 한국의 기후구분상 중부내륙형 기후구와 북부 동안형 기후구, 남부 대륙형 기후구의 경계지점에 위치한다. 연평균기온 9.6°C, 평균최고 15.1°C, 평균최저 4.5°C이다. 극점최고 기온은 32.5°C, 극점최저 기온은 ·20.2°C, 연평균강수량은 1,368.2㎜이다. 연 평균 강수일수는 140일이다.
아직까지 선사시대의 유물 및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탄광지대에서 수십만 년 전의 동식물화석이 간혹 발견되어 주목된다. 삼한시대에는 진한(辰韓)의 실직국(悉直國)의 영역에 속했고, 102년(파사왕 23) 실직국이 신라에 내항함으로써 신라에 편입되었다.
5세기경에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한때 고구려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505년(지증왕 6)에 신라가 회복해 실직주(悉直州)라 하고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았다. 이후 신라가 북진정책을 수행함에 따라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시되었으며, 658년(무열왕 5)에는 북진(北鎭)이 설치되었다.
삼국통일 이후 685년(신문왕 5)에 9주5소경이 정비되면서 하서주(河西州)에 속했고, 757년(경덕왕 16)하서주가 명주(溟州)로 바뀜과 동시에 그 관할을 받는 삼척군(三陟郡)으로 개칭되었다.
995년(성종 14) 지방제도가 정비될 때 척주(陟州)로 승격되고 단련사(團練使)가 파견되었다. 그 뒤 1018년(현종 9)에 다시 삼척현으로 되면서 현령이 두어졌다. 이후 지방제도가 5도양계로 정착되자 동계(東界)의 관할에 포함되었고, 1378년(우왕 4)에는 삼척군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3년(태조 2) 태조의 5대조인 목조(穆祖)의 외향(外鄕)이라 해 삼척부(三陟府)로 승격되었다. 그 뒤 1413년(태종 13)에 다시 각 도의 단부관(單府官)을 도호부(都護府)로 개칭하는 규례에 따라 삼척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지금의 태백시 소도동에서 영월 쪽으로 약 1㎞쯤 떨어진 곳에 어평(御坪)이라는 곳이 있다. 그런데 그 위쪽 마을인 정거리(停車里)에는 단종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1457년(세조 3) 단종이 유배지 영월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지 3일째 되던 날이다. 이 일대에 사는 사람들은 단종이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향하다가 잠시 멈추어 쉬면서 태백산의 산신이 되어가는 꿈을 동시에 꾸었다.
그래서 서로 모여 의논한 결과 꿈속에서 단종이 쉬었던 곳을 정거리, 기거할 땅이라고 한 곳을 어평이라 이름하고 제(祭)를 올려 그 영혼을 위로했다는 것이다.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망경대에서 태백산 정상으로 오르는 100여m 지점에는 단종비각(端宗碑閣)이 세워져 있다. 1662년(현종 3) 부사 허목(許穆)에 의해 편찬된 『척주지(陟州誌)』에 따르면, 삼척도호부의 관내가 9개 이로 나뉘어 있었다. 그 때 현재의 태백시 지역은 삼척군 하장면과 함께 장생리(長生里)에 속하였다.
이 장생리는 『삼척군지(三陟郡誌)』와 『진주지(眞珠誌)』에 따르면, 숙종∼영조 연간에 금대산(金臺山) 동쪽 기슭의 남쪽이 상장성(上長省), 북쪽이 하장성(下長省)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리고 삼척도호부 관내의 9개 이가 12개 면으로 개편되었다. 당시 현 태백시인 상장성면의 호구수는 153호 675인으로 산하에 7개 리를 두고 있었다. 또한, 됨801년(순조 1)상장성면은 상장면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 전국이 23개부(府)로 편제될 때 삼척도호부는 강릉부 관할이 되었다. 이듬 해 도제(道制)의 실시에 따라 강원도 관할로 바뀌었다. 태백지역은 지형이 험준했던 관계로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약 600여 명의 의병들이 은거하면서 1912년경까지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 중 황지리전투가 대표적이며, 철암계곡을 일명 피냇골이라 하는 것도 당시 의병들이 그 곳에 가족들을 피신시켰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당시의 상장면, 즉 태백시의 중학생 124명이 학도병으로 지원해, 휴전이 될 때까지 피의 능선·가칠봉(加七峰)·김일성고지·건봉산(乾鳳山) 등에서의 치열한 전투에 참전하였다.
1961년상장면이 장성읍으로 승격되었고, 이듬 해에는 장성읍 황지에 출장소를 설치하였다.
그 뒤 1973년황지읍으로 승격되었다. 1977년황지읍에 화전·소도 출장소를 설치했으며, 1981년장성읍과 황지읍을 통합, 태백시로 되면서 삼척군으로부터 분리하였다.
1989년 시청사를 황지동으로 위치 변경하였다. 1994년삼척군 하장면의 원동·상사미·하사미·조탄 등 4개 이를 태백시에 편입하고, 사조동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1996년계산동 일부가 화광동에 편입하는 등 행정구역을 조정하였다.
1998년 9월 10일 태백시조례 제1020호로 행정동 통폐합 및 명칭변경에 따라 16개 동이 8개 동으로 줄어들었다. 한때 태백은 640만 톤의 석탄을 생산하여 전국 석탄생산량의 30%를 차지하면서 전국 제1의 광도로서 국가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여 왔으나 1989년부터 시작된 석탄산업합리화사업으로 인해 50여 개이던 광산이 대부분 문을 닫고 소수의 광산만이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면서 급격한 인구감소와 지역경제침체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에 1999년 12월 12일 정부와의 합의 사항에 따라 특별법과 대정부 합의사항을 양축으로 하여 도약의 기회를 마련하였다.
태백시 지정문화재는 국가지정 3개, 강원도지정문화재 4개, 문화재자료 1개, 등록문화재 2개이다. 국가지정문화재는 천연기념물 2개와 중요민속자료 1개이고, 강원도지정문화재는 유형문화재 1개, 기념물 2개, 민속자료 1개이다.
소도동의 태백산 정상에는 단군에 대한 제단인 태백산천제단(太白山天祭壇, 중요민속자료 제 228호)이 있고, 부근에 단종비각(端宗碑閣)이 있다. 단종비각은 팔작지붕에 나뭇살로 짜여져 있으며, 비각 안에는 승려 탄허(呑虛)의 글과 글씨를 새긴 비석이 있다. 앞면에는 ‘朝鮮國太白山端宗大王之碑(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라 씌어 있다. 전하는 바로는 1457년(세조 3)영월로 유배된 단종이 청령포(淸泠浦)에서 죽은 뒤, 그 혼령이 백마를 타고 태백산에 들어가 태백산신이 되었다. 그래서 태백산을 중심으로 한 마을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혼령을 모셔 위로하기 위해 제(祭)를 올렸다. 그런데 비석과 비각이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6·25 사변 때 소실된 것을 1965년에 다시 건립한 것이다.
불교유적으로는 심원사(深源寺)토제불상·백단사(白檀寺)비로자나불·태백산미륵불 등이 있다. 그리고 현존사찰로 장명사(長明寺)·흥복사(興福寺)·유일사(柳一寺)·망경사(望境寺)·관음사(觀音寺) 등이 있다.
화전동에 삼척용연굴(三陟龍淵窟, 강원도 기념물 제39호), 장성동에 태백장성(太白長城)의 삼엽충화석군락지(三葉蟲化石群落地, 강원도 기념물 제57호), 원동에 태백월둔동굴(太白月屯洞窟, 강원도 기념물 제58호), 소도동에 태백산석장승(강원도 민속자료 제4호) 등이 있다.
6·25 때 숨진 학도병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충혼탑이 태백중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다.
전통적인 교육정신의 뿌리는 강릉·삼척지역의 영향을 받아왔다. 1930년대 초 광산 도시로서의 기능을 갖추기 이전까지만 해도 화전민이 살던 빈한한 산촌으로 교육기관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35년 황지초등학교가 개교되었으며, 그 뒤 1938년 장성초등학교, 1941년 철암초등학교, 1948년 동점초등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또한, 1948년 태백중학교, 1951년 태백기술고등학교, 1962년 황지중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2008년 현재 유치원 17개, 초등학교 13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7개 교, 일반계 고등학교 3개 교, 실업계고등학교 2개 교, 그리고 강원관광대학이 있다. 황지고등학교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와 특수학교 태백미래(사)가 있다.
공공 문화시설은 도서관 2개, 태백석탄박물관 등이 있다. 문화 축제는 태백제가 매년 10월에 개최되어 민족통일의 염원 및 향토 고유 문화예술의 계승,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또한, 각종 경연대회를 개최해 시민 참여의식과 긍지심을 고취하고 있다. 기타 문화 축제로는 봄철쭉제, 낙동대제, 여름 쿨시네마페스티발, 여름주말축제, 해바라기축제, 한강대제, 가을철암예술제, 겨울태백산눈축제, 해맞이축제가 있다.
언론매체는 3개의 주간 신문사 있다. 대한석탄공사의 태백훈련원은 광산노동자뿐 아니라, 시민들의 정서순화·문화·교양·교육면에 중추적 구실을 하고 있다.
문화시설은 태백문화예술회관, 여성회관, 태백문화원, 문곡 청소년문화의 집, 상장 청소년의 집 등이 있다.
체육 및 레포츠시설로는 대한체육회선수촌 태백분촌, 가덕산고지대훈련장, 태백종합경기장, 다목적실내체육관, 태백준용씨켓, 고원스포츠타운, 서학레저단지, 태백학생수영장, 황지고 실내체육관, 황지정보산업고 실내체육관, 함태초등학교 실내체육관, 장성복지회관, 태백시 국궁장인 연무정 등이 있다. 수련시설로는 학생현장체험학습장, 국민안전체험테마파크, 태백고원자연휴양림, 태백청소년수련관, 스카이어드벤처 등이 있다.
이 고장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갈풀썰이놀이, 사시랭이놀이, 외나무다리놓기, 맷돼지사냥놀이, 지게싸움 등을 들 수 있다. 이 곳은 원래 깊은 산중으로 화전민이 흩어져 살던 곳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착함에 따라 퇴비만이 유일한 지력 증진의 수단이 되었다.
이에 매년 음력 7월경이 되면 추수 전 농사를 위해 집집마다 돌아가며 퇴비를 장만하는 갈풀썰이놀이가 두레형식으로 펼쳐졌다. 그리고 갈풀썰이가 끝나면 씨름대회를 열어 씨름에 이긴 사람을 지게로 만든 가마에 태우고 징이나 꽹과리 등으로 흥을 돋우며 마을을 돌면서 그 동안의 노고를 서로 치하하고 하루를 즐긴다.
사시랭이놀이는 동점동 전래의 민속놀이이다. 이는 구성진 노랫가락과 함께 개다리소반에 엽전 24닢을 놓고 한 명의 꼬지꾼(패를 돌리는 사람)과 네 명의 패장꾼이 둘러앉아 숫자가 새겨진 엽전을 나눠 받고 숫자싸움을 벌이는 놀이이다.
이 사시랭이놀이는 동점동을 중심으로 삼척시의 도계읍, 가곡면 풍곡리, 하장면 상사미리, 태백시 소도동 어평마을,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 등 반경 50리 안에서만 성행했고, 놀이꾼만 모이면 수시로 사물놀이를 곁들이며 밤을 새워 벌였다.
외나무다리 놓기는 굵은 통나무를 반으로 갈라 좁은 계곡에 가로놓아 사람이 딛고 건너게 하는 아주 원시적인 다리이다. 좁은 하천에서는 긴 널판 하나면 족히 건너다니지만 하천폭이 넓어지면 널판을 여러 개 잇대어 놓아 밟고 다닌다. 이 때 널판과 널판이 이어지는 부분에 구멍을 뚫어 삼발 버팀목을 끼워서 세워 다리발을 삼는다. 강을 사이에 두고 놓여 지기에 양쪽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해 함께 다리를 놓는데 양쪽 강변에서 서로 다리를 놓아 오다가 강 가운데에서 만나 연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산에서 큰 통나무를 베어 내리는 작업과 나무를 큰 톱으로 켜는 작업, 다리를 조립하는 작업 등이 이루어진다.
멧돼지사냥놀이는 겨울철 마을사람들이 모여 사냥할 것을 의논하고 사냥도구인 창, 줄먹, 설피 등을 준비하고 몰이꾼과 창꾼들로 나누어 서로 사냥할 요령을 연습한다. 연습이 끝나면 몰이꾼은 설피를 신고 작대기를 짚고 꽹과리, 놋양푼 등을 치며 몰이에 나서고 창꾼들은 창목으로 돌아간다. 이때 몰이꾼에 쫓겨오는 짐승을 창꾼들이 창으로 찔러 잡는다. 먼저 찌른 사람을 선창꾼이라하며 제일 분배가 많고 두 번째 찌른 사람은 재창꾼이라 하고 세 번째 찌른 사람을 삼창꾼이라 한다. 이때 잡은 짐승을 제물삼아 산신에게 고사를 지내고 마을로 돌아와 노력의 댓가대로 분배한 다음 전체 마을 사람들이 나와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는 한마당 놀이판이 벌어진다.
지게싸움은 양쪽마을 젊은이들이 구봉산 넓은 터에서 만나 서로 좋은 곳의 나무를 베려고 입씨름을 하다가 나이 많은 사람의 제안에 의해 재주부리기와 힘겨루기로 이기는 쪽이 좋은 곳의 나무를 베도록 하자고 한다. 양쪽으로 갈라선 젊은이들은 지게가지 잡고 뛰어넘기, 지게목발 들기, 지게 작대기 잡고 돌기, 지게 타고 걷기, 물지게 돌리기 등의 재주를 겨룬다. 그러다가 마지막엔 개인기로 승부가 나지 않자 여러 사람이 지게틀을 만들어 한 덩어리가 되어 밀고 밀리는 집단 싸움을 하게 된다. 이때 지는 쪽이 깨끗이 승복하고 조건이 나쁜 곳으로 물러난다.
이 고장의 동제에는 태백산제(太白山祭)와 거리제가 있다. 태백산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신라 파사왕 때 태백산 정상에 단을 쌓고 청우(靑牛)를 제물로 하늘에 제사 지냄으로써 비롯되었다. 이후 중사(中祀)로서 나라에서 제를 올렸다.
그 뒤 산정에 천왕당(天王堂)이라 불리는 태백산사를 짓고 경상도와 강원도의 인근 주민들이 봄·가을로 제를 지냈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한말 민족의 수난기를 당하자 하늘과 산신에게 지내던 제사의 대상이 단군으로 바뀌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지금껏 매년 개천절에 봉행하게 되었다.
거리제는 정월 대보름날 저녁 세 갈래 길이나 네 갈래 길에서 지내는 무속적 제의이다. 지금은 동제라기보다는 개인의 기복을 목적으로 행해진다. 그 해 먼 길을 떠나거나, 삼재(三災)가 끼거나, 큰 일을 치를 사람이 있는 집안에서는 그 집안 여자 가운데 제일 어른인 할머니나 어머니가 제주가 되어 거리제를 지낸다.
제를 지낼 때는 제지(祭紙)를 땅에 깔고 그 위에 짚으로 만든 인형을 눕혀 신의 대용으로 삼는다. 그런 다음 그 앞에 달걀·밤·대추·곶감·엽전 등을 올려놓고 한 해의 신수가 대통하게 해 달라고 가신(家神)에게 기원한다. 이 밖에 광산에서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는 산업전사위령제가 매년 10월 중순 위령탑에서 거행된다.
이 시에는 「장자못전설」·「구문소전설」·「자개문이야기」·「험년천전설(驗年泉傳說)」·「연화부수와 며느리의 재앙」 등의 지명전설이 다수 전해진다.
「장자못전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옛날 굉장한 부자이지만 인색하기로 소문난 황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옷차림이 남루한 노승이 찾아와 그에게 시주를 청하였다. 그러나 황부자는 시주는 커녕 오히려 외양간에서 쇠똥을 퍼 시주바랑에 넣어주었다. 노승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손히 인사한 후 돌아섰다.
그 때 마침 아이를 업고 방아를 찧고 있던 황부자의 며느리가 그 광경을 보고 몰래 자기가 찧던 쌀 한 바가지를 노승에게 주며 시아버지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자 노승은 집의 운이 다했으니 화를 피하려거든 자기의 뒤를 따르라 하였다.
이에 아기를 업은 며느리가 노승을 따라 구사리(九士里 : 지금의 道溪) 산마루에 이르자 뇌성벽력이 치면서 황씨의 집에서 물이 솟아올라 순식간에 못으로 변하였다. 지금의 황지(黃池)가 바로 그 때 황부자의 집터였다 한다.
황지천 부근에 있는 구멍소에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 안동에 영호루를 건축할 때 그 대들보를 화전동 금대산(金臺山)에서 마련해 황지천을 통해 운반하였다. 마침 대홍수로 인한 급류에 말려 그 대들보가 석벽을 강타하자 뇌성벽력과 함께 산이 무너지고 구멍이 뚫리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소(沼)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문소전설」의 내용은 이렇다. 옛날 엄종한이라는 사람이 구문소 옆에서 노부모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았다. 구문소에서 고기를 잡아 노부모를 봉양하던 엄종한이 하루는 구문소에 빠져 구문소 밑 용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용왕은 엄씨에게 용궁의 닭을 훔쳐간 죄를 추궁했으나 엄종한은 잘못이 없음을 하소연했다. 뒤늦게 자신이 잡은 물고기가 용궁의 닭임을 깨달은 엄종한은 용왕에게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한 일이였다며 3일 동안이나 잘못을 빌었다. 엄종한의 효성에 감동한 용왕은 주연을 베풀어 주고 되돌려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용왕이 베푼 주연에서 산해진미를 본 엄종한은 두고 온 부모와 자식 생각에 떡 한 조각을 슬며시 주머니에 넣었다. 융숭한 대접을 받은 엄종한은 다시 물 밖으로 나왔다. 용궁에서 3일간의 시간은 지상에선 3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였다. 부모 자식과 상봉한 엄종한은 가져온 떡이 생각나 주머니에서 꺼내어 보니 딱딱한 차돌처럼 굳어 버려 엄씨는 무심코 쌀독에 넣어 두었다. 다음날 쌀독을 열어보니 쌀이 가득했고 그 쌀은 퍼내도 줄지 않는 화수분이 되어 엄씨는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딸이 친정 어머니에게 용궁에서 가져온 떡백병석(白餠石)을 빌려달라고 하자 마지못해 빌려 주었다. 그러나 딸은 백병석을 되돌려 주지 않고 다시 달라는 친정의 성화에 못 이겨 안동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이때부터 엄씨는 몰락하고 안동으로 이사 간 딸네 집안인 조씨네는 잘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구멍소에서 조금 올라가면 자개문이라는 바위문이 있어 지금도 사람과 차량이 통행하고 있다. 이 문은 예전에는 울진·정선·봉화로 통하는 교차점으로 자시에만 열렸기 때문에 기인된 명칭이라 한다.
통동의 험년천은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점칠 수 있었다 한다. 즉, 농사가 대풍이 될 때에는 이른 봄에 사흘 동안 쌀뜨물 같은 고운 탁수가 나며, 평년작이 될 때에는 맑은 물이 나고, 흉년이 될 때는 황토빛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연화산은 봉우리가 둥그런 연꽃 모양을 가지고 있어 붙여진 것이다. 그 산 봉우리에 주봉(主峰)이 아닌 지봉(支峰)에 옛날엔 화전민들이 4, 5집이 살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거기에 연화부수란 연못이 있었는데 그전에 근처에 엄청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 집이 원체 부자니까 손님이 매일 끊이지 않고 오자 여자들은 음식을 대접하랴, 설거지 하랴 그 치닥거리를 해야 하였다. 그 집에 새 며느리가 들어왔는데 손님 접대에 몸서리가 났다. 그런데 어느 날 스님이 시주를 얻으러 오자, 시주를 주면서 며느리가 한숨을 쉬니까 그 스님이 "시주님은 이렇게 풍족한 집에 살면서 왜 한숨을 쉽니까" 이래 물으니 "다른 건 다 좋은데 손님이 좀 안 왔으면 좋겠어요"라고 이러면서 손님이 안 올 비방을 알려달라고 사정을 하였다. 하도 사정을 하니 스님이 “정 그게 소원이라면 비방을 알려주겠소. 연화부수에 가서 물꼬를 트시오. 물꼬를 터 물 이 빠져나가면 손님도 그렇게 빠져 나갈 것이오.”라고 알려 주었다. 그날 밤 며느리가 스님이 알려준 대로 호미를 가지고 가서 물꼬를 터버리자 물이 빠지면서 연못에서 학이 날라가 버렸다. 그리고 연화부수 물이 다 빠져 말라버리자 그 집에 오던 손님 이 뚝 끊어져 버리고 그 집은 망했다고 한다. 그 연못은 지금은 개구리나 몇 마리 살 정도의 작은 연못이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이 밖에도 신선을 감동시켜 인삼을 얻은 「박효자의 효성」, 백일기도를 올려 팔형제를 낳았다는「팔형제터전설」,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신선바위전설」등이 전한다.
이 지방의 특징적인 민요로「갈풀썰이소리」가 전해진다. 이 민요는 퇴비를 장만하기 위해 작두로 갈풀을 썰 때 부르는 노동요이다. 이 갈풀썰이 노동에는 직능에 따라 풀모시·풀아시·작두꾼·뒤풀꾼·풀가리꾼 등으로 불리는데 여러 사람이 동원된다. 「갈풀썰이소리」는 선후창으로 불리며, 가사의 일부분은 다음과 같다.
“……풍덩새가 우는구나/자작자작 걸어온다/자작나무 우리리라/쿡찔렀다 피나무/일시도 마음 놓지마라/낮에봐도 밤나무/십리안에 오리나무/칼로찔러 피나무/무질로같은 미류나무/사시장철 사시나무/방귀꿨다 뽕나무/냄새난다 개똥나무/칭칭울어 칭칭나무/팍팍솟는 팥꽃나무/멀어졌다 머루나무/아하좋다 갈풀이야……”
이처럼 「갈풀썰이소리」는 갈풀썰이되는 여러 나무들의 이름을 쭉 나열해 노래하고 있다. 또한, 통동의 주민들이 가을이 되면 백병산(白屛山)에 도토리를 따러 가면서 불렀다는 노래가 있다.
가사는 “백병산 꿀밤나무 밤이나 많이 열어라/이웃집 아가씨하고 밤이나 주으러 가려나/아리아리 쓰리쓰리 어허야 좋다.”이며, 「아리랑」의 후렴을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 고장과 삼척지방에는 「메놀이」 또는 「묘놀이」라는 민요가 있다. 이는 강릉의 「오독떼기」와 비슷하다.
가사는 “폭이넓고 장찬논은 어느농부가 갈아주며/대호정의 정화수는 어느님이 맛을보나/담배참도 참일러냐 점심참도 참일러냐/돌려라 돌려라 칠제비 돌려라 우여아/우야우야 우야우였사 우후후 우후후/……방울방울 땀방울이 추수끝에 옥백일세/쇠꽃같은 이팔목에 힘을다해 얼른매세/돌려라 돌려라 칠제비 돌려라 우여아/우야우야 우야우였사 우후후 우후후/…….” 등이다.
또 숫자가 새겨진 엽전 24닢을 5명이 돌리며 노는 사시랭이놀이를 할 때 부르는 노래가 있다. 즉, 숫자가 나오면 “일날나리 옥통소/이리갈까 저리가/삼월이둘이면 윤삼월/말많은 사살쟁이/오관천관 관음장/육로로갈까 배로가/칠응칠응 응칠응/파랑나구 강나구/구월국화 굳었네/구질구질 오는비/청룡황룡의 눈물비/장대끝에 돈달고/장터궁터에 말매고/큰술집으로 돌아선다.”를 부른다.
시의 전 지역이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어서 평야가 거의 없다. 따라서 농업적 기반은 매우 미약하다. 경지면적 1,048㏊ 중 밭이 1,045㏊, 논이 3㏊로 밭이 대부분이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감자·콩 및 고랭지채소 등이다.
특히, 매봉산·태백산 등지의 1,000m 내외의 고위평탄면을 중심으로, 무·배추 등의 고랭지채소를 대규모로 해 소득을 높이고 있다. 또한, 주변 산지사면(山地斜面)에는 초지(草地)가 많아 목축에 알맞은데, 젖소·돼지·사슴 등의 사육이 성하고, 양봉도 활발하다.
임야면적 2만 6,821㏊ 중 국유림 1만 8,190㏊, 공유림 2,220㏊, 사유림 6,411㏊이고, 임목지 2만 5,506㏊ 중 침엽수 9,826㏊, 활엽수 9,547㏊, 혼효림 6,133㏊로 침엽수의 비중이 비교적 높으며, 임목축적량도 비교적 많은 편이다.
무임목지는 1,375㏊인데, 광산 주변의 벌목 및 폐석(廢石)으로 인한 삼림의 파괴가 심각하다. 주요 임산물로는 광산용 갱목의 생산이 많았으나, 최근 탄광의 폐광에 따라 감소추세에 있다. 종실류로는 잣·도토리·대추 등이 있고, 표고버섯과 약초 및 산나물의 생산이 많다.
이 지역은 정선의 도계(道溪)탄전과 더불어 태백탄전 지역의 중심지인 동시에 남한 최대의 탄전지대이다. 이 일대에 넓게 분포하는 고생대 평안누층군(平安累層群)에는 질이 좋은 무연탄이 매장되어 있어 일찍부터 개발이 시작되었다.
1933년 일본인에 의해 장성지역에서 탄맥(炭脈)과 매장량이 확인된 뒤, 1936년 삼척개발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개발에 착수하였다. 6·25전쟁 후 대한석탄공사가 발족되면서 국영화되었다. 그 뒤 1960년대 중반 이후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국내 최대의 탄광이자 이 지역 유일한 국영탄전이 되었다.
그러나 1989년부터 추진된 석탄 합리화정책에 따라 영세탄광이 폐광되고, 폐광지역 개발촉진법에 의한 각종 개발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무연탄 외에 석회석과 납석광산 등이 있으나 생산량은 미약하다.
한편, 제조업으로는 채광에 관련된 광산용 기계 수리공장을 비롯해 화학·식품공장 등이 있고, 1990년 12월철암동에 철암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상업활동은 1923년황지리에 황지장이 5·10일에 개설되어 1926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뒤 1938년 4·9일로 바뀌었다. 1963년에는 황지장과 장성장이 5·10일에 개설되었다가 폐쇄되었다. 시로 승격된 이후 상업 및 서비스 기능이 확대되어 2008년 현재 황지자유시장·중앙시장·철암시장 등 3개의 상설시장과 대규모 할인점 1곳, 슈퍼마켓 등이 있다.
교통은 무연탄 수송을 위해 1940년에 철암선(鐵巖線, 철암∼묵호항), 1955년에 영암선(榮巖線, 영주∼철암), 1962년에 황지지선(黃池支線, 백산∼황지), 1963년에 황지본선(통리∼심포리)이 개통되었다.
그리고 1966년 고한선(古汗線)의 증산∼고한, 1973년에 고한∼황지, 1975년에 백산삼각선(栢山三角線, 황지∼백산) 등이 개통되었다. 1970년대 이후 무연탄 소비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대량수송을 위해 전철화가 이루어졌다. 시내에는 추전·태백·문곡·동점·철암·백산·통리 등의 역이 있다.
한편, 도로교통은 산간고원 지대인데도 영월∼태백의 봉화의 31번 국도, 강릉∼태백의 35번 국도, 영월·태백·삼척의 38번 국도가 있다. 그리고 동점∼삼척을 연결하는 423번 지방도가 있어 내륙교통의 중심지를 이룬다. 시내에는 태백산 도립공원을 비롯해 각종 동굴과 사찰 등 관광자원이 많다.
이 시는 고원·산지와 그 인근의 사찰 및 문화재가 주요 관광자원으로 특히 자연관광자원의 보고라 할 수 있다. 태백시는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을 중심으로 태백팔경이 있는데, 태백산천제단과 천제, 태백산 주목 사계, 태백산 눈꽃과 설경, 태백산 일출과 낙조, 황지연못의 사계, 검룡소의 신비, 구문소와 구문팔경, 지하세계 용연동굴 등이 있다.
태백산·연화산 등의 산악경관과 심원사·흥복사·청원사·장명사 등의 사찰, 용연굴·신령굴·현리동굴 등의 석회동굴, 그 밖에 만경대·구문소·자개문·단골계곡·황지·백산도립공원 등의 관광지가 잘 알려져 있다.
연화산유원지는 야영장과 어린이놀이터 및 각종 체육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심신단련과 정서함양을 위한 장소로 가족단위 이용이 용이하다. 당골계곡에는 당골공원이 조성되어, 야영장·주차장·연못과 시민헌장비 등이 있다.
황지는 태백시내 한가운데에 있는데, 3개의 연못으로 되어 있다. 『택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낙동강 1,300리의 발원지로 기록되어 있으며, 가뭄이나 장마에 관계없이 하루에 약 5,000t의 맑은 물이 솟아오른다고 한다.
태백산은 1989년 5월 13일 17.44㎢의 면적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태백산은 천제단이 있는 영봉을 중심으로 북쪽에 장군봉(1,567m) 동쪽에 문수봉(1,517m), 영봉과 문수봉사이의 부쇠봉(1,546m)로 이루어져 있다. 암벽이 적고 경사가 완만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으로 사계절 다양한 절경을 볼 수 있다.
태백산도립공원내 소도집단시설지구에 콘도형인 태백산 민박촌을 비롯하여 숙박시설, 음식점, 야영장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석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태백석탄박물관이 있고, 겨울철에는 대규모의 눈썰매장이 개장된다. 태백산 도립공원 내에는 단군성전·단종비각·용왕각·망부석 등의 유적과 만경사·백단사·만덕사 등의 사찰이 있다.
금대봉(1,418.1m)과 대덕산(1,307.1m) 일대 126만평은 환경부가
강원도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한국특산식물 15종류와 16종류의 희귀식물이 자생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조류인 참매, 새매, 검독수리 등이 발견되었다.
고한 쪽의
두문동 계곡에서는 도마뱀, 한소리 계곡에서는 도롱뇽, 창죽계곡에서 꼬리치레도롱뇽의 집단서식지가 발견되었다. 또한 곤충류중 한국미기록종 13종이 발견되었다.
태백시는 45곳의 탄광 중 현재 42곳이 문을 닫게 된 폐광지역으로 석탄산업합리화 조치 이후 강원랜드의 배후 기반도시이자 고원 관광 휴양도시로 변화하고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태백시통계연보』(태백시, 2008)
-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 『강원향토대관』(강원도민일보, 1999)
- 『태백시지』(태백시, 1998)
- 『태백의 역사』(강원일보사, 1986)
-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4)
-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 『태백의 얼』(태백시, 1983)
- 『태백의 읍면』(강원일보사, 1975)
- 『강원도지』(강원도지편찬위원회, 1959)
- 태백시(http://www.taebaek.go.kr)
- 태백문화원(http://www.taebaekculturalcenter.com)
[관련시청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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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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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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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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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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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사 내용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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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리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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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갈풀썰이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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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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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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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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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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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석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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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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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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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골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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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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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점사시랭이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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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냉지 채소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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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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