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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망록]⑦ 시인 50년 그 끝없는 싸움 / 이수익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9. 30.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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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망록]⑦ 시인 50년 그 끝없는 싸움 / 이수익
이수익 시인
? 1942년 경남 함안 출생. 부산사범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과 졸업.
?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고별〉 〈편지〉 등이 당선되어 등단. 1963년부터 《현대시》동인으로 활동.
? 시집 《우울한 샹송》 《야간열차》 《슬픔의 핵》 《단순한 기쁨》 《그리고 너를 위하여》 《아득한 봄》 《푸른 추억의 빵》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 《꽃나무 아래의 키스》 《처음으로 사랑을 들었다》 등 펴냄.
? 부산시 문화상,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지훈상(문학), 공초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등 수상.

 

나는 시가 좋아서 덤벼들었다

   

이수익 시인

내가 맨 처음 시와 만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받아본 교지 《천마》에는 선생님들과 선배들의 교양적인 글들이 제법 있었고 그다음에는 학생들이 꾸민 문예란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선배들이 쓴 시를 읽어 내려갔다. 제법 그런대로 잘 쓴 작품도 있었지만, 이런 정도의 시는 나도 웬만큼 노력하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1학년 2학기 때 시라는 것을 써서 교지 편집부에 보냈다. 나로서는 당연히 나의 시가 실릴 것이라고 믿고서였다. 그런데 천만뜻밖이었다. 새로 펴낸 《천마》에는 내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교지를 이리저리 뒤적여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과연 내가 쓴 시가 정말 형편없는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직접 내가 시를 써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때는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 수도 없었기에 다른 사람이 쓴 시와 비슷하게 문장을 만들어갔다. 그러다가 2학년 1학기 때 시를 배울 기회가 생겼다. 당시 구필순 여자 선생님이 국어를 가르쳤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시 한 편을 써오라고 했다. 나는 나름대로 〈봄〉이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제출했다. 그다음 시간이 되자, 선생님은 ‘지난번에 제출한 시 가운데서 가장 잘 쓴 시를 소개해주겠다’고 하면서 바로 내가 제출한 시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내가 쓴 시가 가장 잘 쓴 시란 말인가. 나는 마음속으로 뛸 듯이 기뻤다.
그날 이후로 나는 제법 시를 흉내 내는 청소년 문학도가 되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모두 시의 소재로 삼아 시를 썼다. 내일모레가 시험 기간이라고 해도 나의 시 쓰기는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에겐 보여드려서는 안 될 버릇이 하나 생긴 셈이었다.

그래서 ‘제발 그놈의 시를 그만두라’는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나는 줄곧 시에 매달려 있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주로 읽던 《학원》을 샀는데, 거기에서 《학원》이 해마다 뽑던 ‘학원문학상’ 작품공모를 보게 되었다. ‘그래, 거기에다 한번 작품을 보내보자. 내 작품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려면 그런 행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마음이 싹터 올랐다.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찾아가본 고향 함안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서 〈농촌의 오후〉라고 하는 시를 써서 보냈다. 얼마 후 나는 제4회 학원문학상 입상자 발표를 보게 되었다. 감격스럽게도 나는 최종 입상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이던 그 시절에 뜻밖의 행운이 밀어닥친 것이었다.

나는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다만 좋아서 시를 썼다. 이름난 선생님이나 선배가 있다면 더 알기 쉽게 배웠을 테지만 그럴 수도 없고, 때때로 사 보는 《학원》이란 잡지가 가장 멋진 교재였다. 그리고 책방에 가서 신석정 선생이 시집으로 펴낸 《슬픈 연가》를 한 권 샀다. 거기엔 문장이 깔끔하고 소박하게 쓴 전원시의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너무 어렵지 않게 시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작품 속에 담긴 언어를 마치 나의 것처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조그만 흉내가 내겐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되었으니까. 그리고 6‧25 당시 군에 입대해 장교가 된 형님이 휴가차 부산에 왔을 때 나를 위하여 앤솔러지 시집 한권을 사다 주었다. 여러 사람의 시인들이 대표작을 모아서 만든 시집이었다. 1956년 그 당시에 시인들이 그리 많지 않던 때여서 금방 이름을 대면 알 것 같은, 꽤 유명한 시인들이 들어 있어서 시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의 시에 대한 관심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계속되다가 대학 진학 관계로 쉬게 되는데, 그 이전에는 한글날 백일장이나 문예작품 모집에 더러 얼굴을 내밀곤 하였다. 내가 부산사범학교 2학년 때, 《학원》에 우수작으로 실린 나의 작품 〈낙엽〉을 여기에 소개한다.

언젠가는 한 번씩 돌아가야 할
착잡한 계절의 질서 속에 서면
10월을 상실하는 우리들 마음 허전한 사이로
떨어져오는 잎사귀-

이건
오래토록 소망하여 재이던 보람의 사멸인가
아니면 아리운 절후(節候)의 신음에
부치는 나래 짓 같은 것?

시시로 소슬한 갈바람 길에 붉게 달은 나뭇잎 져 내린
뜨락에 겹겹이 쌓인 낙엽을 밟으면
허수히
통곡하고픈 이 오후의 햇빛 아래

오늘은
얼룩진 표정으로 참 슬퍼하는 내 누이 모습을
탓하지 말자

한 점 바람만 스쳐도 목숨 다하는 잎
나뭇가지 끝엔
조용히 흐려가는 내 눈시울


뜨거웠던 문청(文靑) 시절

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과에 입학했다. 국어과엔 정준섭, 유학영 같은 친구들이 있었고 대학 2년 선배인 김원호가 있었다. 이제 새롭게 시를 쓸 기회가 마련된 셈이다. 사대문학회에선 학생들의 시를 모아 시화전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겨울 김원호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작품을 투고해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다. 〈과수원〉이라는 남다른 제목과 따뜻한 관조와 서정이 화제를 끌었다. 당시 신춘문예에는 조국의 분단된 현실을 떠올리는 제목이 너무 많아 그 바람에 식상한 심사위원이 많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2학년이 되자 정준섭, 유학영이 내게 “저쪽 문리대(인문대) 국문과 학생들과 우리가 같이 문학서클을 만드는 게 어떠냐?” 하고 물어왔다. 그리고 당시 문리대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김 훈, 안종관, 이영섭 등과 어울리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모임을 만든 우리는 정말 끈질기게 만나 각자의 작품들을 토론했다. 당시 이영섭의 부친이 의정부지청 검사여서 우리는 아현동에 있는 그 집 응접실에서 모임을 가졌다. 일요일이 되면 주로 시와 단편소설을 준비해서 읽고 비평했다. 아침부터 만나 저녁 무렵까지 고되게 읽고 꽤나 진지하게 토론했다. 저녁이 되어 각자 집으로 돌아오면, 허전한 마음을 시로 적기도 했다. 그리고 그해 12월이 되었다.

나는 그동안 열심히 시로 써온 걸 시험 삼아 신춘문예에 내기로 했다. 〈동아일보〉에는 이미 써둔 〈당신께 드리는 나의 노래〉를 접수시켰다. 그러고 나서 〈서울신문〉에 다시 새로운 작품을 써서 내기로 하고, 하루 종일 다섯 편의 시를 만들어서 마감 직전에 제출했다. 겨울방학을 맞아 나는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1963년 1월 1일까지도 〈동아일보〉나 〈서울신문〉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질 않아 ‘나는 떨어졌구나’ 하고 생각하고 거리에 나가서 신문을 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동아일보〉 가작 입상에 내 이름이 붙어 있고, 서울신문에는 당선작으로 뽑힌 것이다. 그리고 〈서울신문〉에는 내가 보내지도 않았던 당선소감까지 실려 있었다.

나중에 알아봤더니 당시 〈서울신문〉 문화부에 근무하던 박성룡 선생이 나와 연락이 되질 않아 나 대신에 당선소감을 써준 것이었다. 그때의 〈서울신문〉 심사평에는 이런 글들이 적혀 있다.

“〈고별〉 〈편지〉의 이수익은 언어를 세공하는 재간이 비상하다. 차분히 가라앉히고 실수 없이 한 자 한 자 박아가는 균정미와 무리 없는 언어의 구사는 믿음직했다. 다만 스케일이 너무 작아지지나 않을까 염려스럽다.(박남수) 이수익으로 말하면 그 시어의 밝혀진 푼수로 높이 평가 았다. 시어들이 아직도 실생활어와 동떨어진 어려운 특수문화어로서 많이 쓰이고 있는 속에 이 시인의 시어 탐구는 실생활어에 뿌리를 박은 점 마음 든든히 느껴진다.(서정주)”

이렇게 해서 나는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김원호와의 만남도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지낼 것이 아니라, 열심히 발로 뛰면서 또 다른 시단에의 지평을 열어가자는 것이었다. ‘신춘시’ 동인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다. 1963년도에 〈조선일보〉에 당선한 박응석, 〈동아일보〉에 당선한 신명석, 〈서울신문〉에 당선한 내가 있고 그 앞 해에 〈동아일보〉에 당선한 김원호, 〈한국일보〉에 당선한 박이도, 〈조선일보〉에 당선한 신세훈 등이 있어 1962년과 1963년 당선자들만 모여도 여섯 명이나 되었다. 신문사가 어렵게 신춘문예를 통해 인재를 배출해 놓아도 이들을 일일이 뒷받침해줄 수 없는 현실이었던 데다가, 당시로서는 《현대문학》 《사상계》가 발행될 뿐이어서 작품을 써놓고도 발표할 지면이 없다는 것이 젊은 시인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김원호와 나는 청파동에 있던 기독교 기숙사로 가서 박이도를 만나고 신세훈과도 인사를 나눈 다음, 부산으로 가서 박응석, 신명석 등과 만나 ‘신춘시’ 동인이 되자는 것을 약속했다. 그리하여 나는 ‘신춘시’ 동인이 되어 그 첫 번째 동인 시집에 〈별부(別賦)〉 〈저 슬픈 함잉은〉 〈귀향〉 등을 발표했다.

《현대시》에 빠지다

내가 《현대시》 2집을 서울 서대문 근처에 있는 어느 조그만 책방에서 본 것은, 1962년의 가을이었다. 김광림, 조지훈의 산문과 유치환, 박태진, 김종삼, 허만하, 이 중, 김하림, 주문돈, 민웅식, 김요섭, 전봉건 등의 시가 실려 있었다. 그 시절에 이 정도의 이름들을 만나볼 수 있는 시지(詩誌)란 거의 없었다. 책 한 모서리에 〈애독자 여러분에게〉라고 쓴 글귀가 보였다.

“첫째, 좋은 작품을 보내시면 수록하겠습니다. 둘째, 원하시는 분은 《현대시》 집필자의 평을 보내 드립니다.” 등이 눈에 띠었다. 그리고 ‘서울 중구 동자동 39 문선각 《현대시》편집계’ 라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정말 좋은 기회구나 싶었다. 집에 돌아와 그동안 써둔 몇 편의 작품을 《현대시》 편집계로 보냈다. 그리고 그 일은 한참 잊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서울신문〉에 등단한 후 처음으로 신문사에 나가서 인사를 드리는 자리에서 그곳 편집부의 임진수 선생이 반갑다는 듯이 나를 맞이했다. “이형, 내가 《현대시》 편집을 하고 있는데 전에 보내준 작품을 잘 받았어요. 그리고 신춘문예 당선을 축하해요.” 이렇게 해서 임진수 선생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다음 광화문 뒷골목의 〈아리스〉 다방으로 나가 박남수, 전봉건 씨에게 소개되고 김광림, 김종삼, 김요섭, 장만영 선생에게 인사를 드렸다. 그 후로 박목월, 조지훈, 정진규, 김수영, 허만하 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시단의 유명 인사들을 저녁마다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크고 엄숙한 복이었던가. 박남수 선생님한테서는 ‘앞으로 《현대시》에 들어와서 열심히 작품을 발표하라’는 고마운 말씀도 들었다. 그리고 부산에 내려온 나는 그동안 써둔 몇 편의 시를 박남수 선생님께 보내고 며칠 후 이런 엽서를 받았다. “혜서(惠書)와 작품 받았소. 참 질(質) 고운 언어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세 편 다 괜찮습니다. 더 많은 작품을 계속 쓰시오. 동봉한 작품은 《현대시》에라도 주도록 합시다. 3집은 머잖아 책이 돼 나오는 모양이니 4집쯤에. 그러나 더 좋은 작품이 쓰이면 그동안 바꾸기로 하고. 건강하십쇼.” 이런 내용이었다.

문제는 《신춘시》와의 관계였다. 분명히 《신춘시》 1집에 작품을 보냈는데 앞으로 《현대시》에 작품을 발표한다면 이상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신춘시》는 신춘문예 출신들이 모여서 처음 창간하는 동인지인 데 비해 《현대시》는 정작 동인지라기보다는 한국시인협회 소속의 몇몇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사화집 같기도 하고, 반(半)동인지 같은 성격을 지닌 그런 잡지였다.(제1집부터 3집까지는 박남수, 조지훈, 유치환 3인을 편집위원으로 세우고 전봉건 씨가 저자대표로 되어 있는데 4집과 5집에는 박두진, 박목월, 서정주, 장만영 씨가 새로 편집위원으로 추가되었다.) 《신춘시》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현대시》에 작품을 추가 발표할 수가 있었지만 그것도 불편스럽고 해서 나는 《현대시》를 택하고 김원호, 박이도 등 《신춘시》 동인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현대시》 4집에 처음으로 〈남은 悲歌〉 등 5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것은 내 생애 가장 빛나는 날이기도 했다.

1963년 11월이 되자 나는 〈신인특집〉이란 타이틀을 떼고 《현대시》 5집에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다. 이후, 《현대시》는 나이 든 세대는 물러나고 젊은 세대들에게 동인지 제6집을 물려주게 되었다. 이때부터 동인은 주문돈, 허만하, 김영태, 이수익, 정진규, 이승훈, 황운헌, 이유경, 민웅식 등이 되었다. 이 6집에 발표한 나의 〈강변에서〉를 소개한다.

저음의
흑인가수들이
노래 부르는 서러운 이빨같이
저 반짝거리는 잎들,
새로
보겠네.

그것은 잃어버린
유년기의
사진첩
넘어가는 소리,
회상의 어느 小路에다 나를 버려두고
다시
떠나가네.

위로
단속의 햇빛
깔리는 자갈들 相韻하고 있고
그 푸른 육안들 마주칠 때

뼈처럼 삭아버린
내 오뇌의 꽃잎
또 보겠네.

이때 〈아리스〉 다방에서 저녁 만남이 끝나면 전봉건 선생이 앞장서서 우리는 그 맞은편 술집 〈특별주점〉으로 향했다. 김광림, 김종삼, 임진수, 박성룡 시인들과 함께였다. 나는 술에 약했지만 밤늦게까지 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우울한 샹송〉, 그 이후

1963년에 열린 공보부 주최 제4회 신인예술상 시 부문에서 내가 출품한 〈우울한 샹송〉이 수석으로 입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때의 심사위원이 서정주 선생님이었으니까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이어서 새로 맺어진 복이었다. 어쨌든 이 시는 우리말의 실용적 사용이 두드러진 데다가 ‘우체국’이라는 장소가 풍기는 뉘앙스가 그럴듯해서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느낌을 지닌 시였다.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 되어 젖어 있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당시로서는 제법 이국적인, 외부지향적인 이 시가 세월이 가면서 젊은 세대들에게 알려져서 노래와 시 낭송음반, 또는 애송 명시로서 유명하게 되었다.

1966년 3월 《현대시》 9집에 〈우울한 샹송〉을 발표하면서 나는 30개월의 군복무에 들어갔다. 진해에 있는 육군대학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소령급 이상의 장교들이 이곳으로 와서 군사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배우는 곳이어서 바쁠 때는 엄청나게 바빴지만 다소 여유가 있을 때는 작품이라는 것을 기웃거려 볼 수도 있었다.

진해 시절, 특히 고(故) 황선하 시인과의 만남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육군대학에 있는 것을 알고 황선하 시인은 자기 집이 있는 창원으로 초대했다. 나는 번지만을 들고 낯선 창원 땅을 헤맨 끝에 그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마을 중국집으로 가서 술을 꽤 마셨던 것 같다. 정신을 잃은 채, 자고 난 다음 눈을 떴을 때는 벌써 몇 시간이 지난 후였다. 입맛과 술이 그리웠을 젊은 날에 잊을 수 없는 우리의 만남이었다. 황선하 시인은 196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진해와 창원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성격이 워낙 차분하고 깔끔해서 만날 때마다 조심스러워했지만 천성이 워낙 고결한 분이었다.

그리고 진해에서 강계순 시인과의 만남도 잊히지 않는다. 마침 진해에 근무하고 있던 영관급 해군장교의 아내였던 강 시인이 이미 그곳에서 동장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서른 살이 갓 넘은 젊은 시인이, 그것도 아리따운 미모를 갖춘 여성이 동장을 한다는 것은 제법 화젯거리였다. 강계순을 만나서 그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진해해군사관학교를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그가 부르는 청아한 노랫소리에 흠뻑 빠져들곤 했다.

또한 진해 시절엔 〈한글날 백일장〉 심사위원이 되어 푸른 군복을 입고 진해여고 교정에서 심사를 보기도 했다. 내가 시인이라는 것을 알고 진해문인협회 같은 데서 추천을 해서 생긴 일이었다. 그 시절, 〈흑백다방〉의 추억도 잊을 수 없다. 진해 로터리에 자리 잡고 있던 이 다방은 얼굴이 호방하게 생긴, 서양화가 유택열 씨가 주인이었다.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던 다방, 그곳 문화예술인들이 모여앉아 어제의 행사를 거론하고 내일 해야 할 일을 함께 다독여주던 곳이 바로 〈흑백다방〉이었다. 이제는 다방이 없어지고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 아쉽다.

어쨌든 그런 낭만이 있어서였든지 군복무를 마칠 때 나온 《현대시》 16집에까지, 나는 꾸준히 시를 발표할 수가 있었다. 다만 동인지 12집에는 유일하게도 작품을 싣지 못했다.

그리운 부산 시절

1968년 5월 8일, 나는 부산MBC의 프로듀서로 입사했다. 바로 그전에, 부산 국제신문사 입사시험에 합격했지만,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나라가 온통 어수선한 때여서 제대 전 한 달 정도를 군대에서 묵인해주지 않아 입사가 무산되고 말았다. 그 당시 김규태, 이유경 두 사람이 국제신문사에 있었다. 나보다 두 살 위인 이유경은 나와 친하게 지냈다. 서구 부용동에 있던 그의 집이며 동대신동 산비탈에 있던 그의 집, 영주동에 있던 그의 집으로 놀러다니면서 우리는 힘들었지만, 건강하고 푸르고 싱그러운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유경은 서울 조선일보사로 가게 되었다. 글을 쓰는 편집인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김규태 시인과는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나서 신문사로 찾아가 인사했고, 1965년에 《현대시》 동인이 되고 나서 더욱 가까워진 사이였다. 필요 없는 말을 잘 하지 않는 그는, 반드시 해야 할 말은 꼭 하고 마는 소신과 기질이 있어서 우리는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았다. 오랜만에 그를 만나면 만남도 즐거웠고 마치 큰형을 대하듯 자연스러웠다. 그는 참으로 마음이 크고 묵직한 인물이었다.

 

   
왼쪽부터 필자, 김규태, 박성룡, 허만하 시인

 

얼마 후, 나는 한국시인협회 소속으로 아직 한 권도 시집을 발간하지 못한 시인을 골라 처녀시집을 내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돈이 모 여사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지만, 한국시인협회 박목월 회장이 좋은 일에 쓴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시집을 출간했다. 젊은 날 문학으로 번민하고 희열하던 그 시절의 뜨거운 고뇌와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던 시집이었다. 나는 《우울한 샹송》이라고 시집의 이름을 붙였다.
1968년에 허만하 시인이 부산에 왔다. 군의관으로 오래 근무하던 그는 부산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게 된 것이다. 이미 광화문 뒷골목 〈유성다방〉에서 만났던 터라 반가웠는데, 부산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침례병원에서 병리과장을 겸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허만하 선생은 말이 빠르고 정확하며 사물의 핵심을 바로 찔러 얘기했다. 매우 외부 지향적이고 빈틈이 없었다. 저녁 무렵 부산 광복동 뒤쪽 술집에서나 남포동 어느 술집에서든 김규태, 허만하 시인을 만나면 참으로 재미있었다. 문학을 제외하고 나머지 일들, 정치와 사회 문화 과학 등 모든 면에 대하여 술술 얘기를 잘 풀어나갔다.

그리고 1970년부터 부산의 젊은 세대인 이달희, 박지열, 정영태, 이병구 등이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부산대학교 재학생인 이들과는 가끔 방송국 옆 다방에 모여서 그들이 써온 시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는 허만하, 김규태 선생과도 어울려 자갈치 목로에서 정겨운 시간들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이들은 신춘문예와 문예지를 통해 문단에 등단했는데, 그중에서 계간문예지 《시와 사상》을 창간한 정영태가 가장 돋보이는 활동을 하던 중에 뇌졸중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1974년에는 청마 유치환 씨가 부산에서 심야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지 7주기를 맞이하면서 부산의 문인들이 청마 시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시인 손경하 씨가 회장을 맞고 내가 총무가 되어 시인과 독지가들의 도움을 받아 석 달 만에 제막하게 되었다. 땅 소유자 백광덕 씨의 도움을 받아 사하동 에덴공원 산마루에 서게 된 이 시비는 향파 이주홍 씨의 글씨로 〈깃발〉이라는 시가 새겨져 펄럭였다. 1974년 2월 13일의 시비 제막식에는 고인의 미망인과 회장의 제막, 김규태 씨의 비문 낭독, 허만하 씨의 헌시, 부산문화방송 어린이합창단의 청마 작시 〈메아리〉 합창 등이 진행되었다. 그 시절, 김규태 시인과 허만하 시인을 생각하며 서울에서 내가 썼던 시 〈그리움에 기립(起立)하다〉를 다시 읊어본다.

내 몸의 일부는 당신의 것이다
당신과 함께 나눈 음식,
내 영혼의 일부는 당신의 것이다
당신과 함께 나눈 대화,

당신은 달처럼
나도 달처럼

멀리 떨어져서 더욱 환히 보이는
생각,
푸른 추억의 빵 하얀 스푼

죽음은 영원히 깊은 잠

1973년도에는 이형기 선생이 부산 〈국제신문사〉 편집국장으로 내려왔다. 새로운 공기가 부풀어 오르듯 뜻밖의 인물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낙화(落花)〉의 시인이 새롭고 설레는 기분으로 우리 가까이에 다가온 것이다. 그런데 신문사 일이 너무나도 바빠서 좀처럼 시간을 낼 수 없었는지 어쩌다 어렵게 한 번씩 만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듬해에는 언론파동으로 이형기 시인은 국장 자리를 떠나서 논설위원으로 물러앉게 된다.

그래서 술자리엔 김규태, 허만하, 이형기 세 사람이 한 자리에 어울리는 풍경이 자주 만들어졌다. 시인 등단 경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한참 격이 떨어지던 나는 큰 형님을 모시듯 이들 곁에 조용히 앉아서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이들 세 사람의 대화는 참으로 끝이 없었다. 유달리 말이 빠른 이형기 선생과 여기에 질세라 재빠른 언변으로 대화하던 허만하 선생, 천천히 말을 풀어내던 김규태 선생이 남포동과 광복동의 술집을 문화의 거리로 변모시켰다. 나이로 따지면 허만하 선생이 1932년생, 이형기 선생이 1933년생이고, 김규태 시인이 1934년생이어서 비슷비슷한 연령이었다.

1976년에는 이해인 수녀님이 〈민들레의 영토〉라는 시집을 내었다. 그 당시 부산MBC의 오후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던 나는, 젊은 수녀님이 시집을 낸 사실이 무척 새롭고 신선했다. 그래서 수녀님께 전화를 하고, 우리가 함께 방송할 날짜를 잡았다. 하얗고 검은 수녀복으로 나타난 이해인 수녀님은 조용하고도 단정하게 하느님께 바치는 오랜 침묵의 기도를 들려주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러간 것일까. 마침내 수녀님의 〈민들레의 영토〉는 국내 출판가를 뒤흔들며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민들레의 영토〉에 담긴 뜻이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가는 데, 그렇게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그리고 나는 문예진흥원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두 번째 시집 《야간열차》를 준비하게 되었다. 1969년 《우울한 샹송》 후 9년 만에 내는 시집이었다. 나는 43편의 시를 준비하고, 김영태에게 표지화를 부탁했다. 김영태는 독일 병정처럼 날카롭게 서 있는 나의 인물화를 펜화로 그려 주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당시에는 문예진흥원은 문공부 산하기관이었는데, 내가 실리기로 한 작품 〈젊은 사자(獅子)의 추억〉이 반정부적이라 하여 ‘빼라’는 지시가 문공부에서 내려왔다. 그 당시에는 구 상 선생님이 (문예진흥원)에 계셨다. 시집 편집을 맡은 전봉건 씨가 구 상 선생님에게 부탁하여 ‘그 작품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들려주었지만 문예진흥원 담당자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문예진흥원 기금을 받지 않기로 하고 그 작품을 작품집의 맨 첫머리에 실었다. 작품 한 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가져오는 터무니없는 결과를 맛보았던 것이다. 4‧19를 소재로 다룬 〈젊은 사자의 추억〉은 이렇게 시작된다.

죽음은 영원히 깊은 잠,
아직은 결코 죽지 않은 너의 그 입술과
눈빛과
나는 대화한다, 아름다웠던 우리의 젊은 날을.

그때 너는 어디에 있었던가
수많은 군중 속에 너를 찾아 부르던 나의 부름
그 밖에 있었던가,
달리던 네 무릎이 피에 젖고
달려야했던 그 이유가 피에 젖고
4월의 어느 하루가 붉게 피로 물든

그 다음 날, 너는 나를 찾아왔다.
싸리꽃보다 더 외로워진 내 앞에서
오히려 너는 웃고 있었다.

- 〈젊은 獅子의 추억〉 앞부분

1980년에는 이형기 선생이 부산문인협회장을 맡았고 내가 그 아래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지금은 우리 연극계의 중견으로 활약하는 연출가 이윤택이 총무를 맡았다. 그해 나는 부산시문화상 후보로 추천되어, 드디어 상을 받을 수 있었다. 서른아홉의 나이로는 너무 빠른 상이었다.

후배들에게 마음 주며

   
1983년 어느 술집에서-이승훈, 오탁번, 필자
1981년에는 부산 시절을 접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KBS의 라디오 차장 자리였다. 내가 서울로 오기 전에 이승훈은 춘천교육대학을 떠나 한양대 국문과로 왔다. 그 당시 오탁번과 이승훈, 박의상, 오세영, 이유경, 김종해 그리고 나는 광화문에서 자주 어울리면서 40대의 한때를 즐겁게 보냈다. 더러는 박의상이 술을 사느라고 조그만 술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는 제법 마시고 떠들고 휘적거리면서 그날들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1983년 고려원출판사에서 시문학 총서를 기획하면서 나의 세 번째 시집이자 시선집인 《슬픔의 핵(核)》을 내게 되었다. 조병화 시인의 《벼랑의 램프》, 전봉건 시인의 《새들에게》, 박의상 시인의 《오늘은 내일》에 이어서 나의 《슬픔의 핵》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동안 시에 대하여 조금씩 알아가던 중 제법 커다란 시선집을 마련하게 되니까 기쁨이 컸다. 또한 고려원에서는 나의 네 번째 시집을 함께 만들어 보자고 했다. 1986년 겨울에 내놓은 시집 《단순한 기쁨》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집으로 이듬해, 1987년에는 현대문학상을 받게 되었고, 1988년에는 나의 다섯 번째 시집 《그리고 너를 위하여》(문학과비평사)를 펴내 대한민국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오랜만에 상복이 터진 셈이었다.

 

현대시 동인들은 1994년 문학세계사에서 시선집 《현대시 94’》를 만들면서 이듬해인 1995년부터 매년 한 사람씩 현대시 동인의 이름으로 ‘현대시 동인상’을 시상하기로 하였다. 시인이 된 지 5년 이내의 신인 중에서 ‘지난해부터 올 5월까지’ 발표한 시들을 두고 동인들 각자가 심의한 결과를 가지고 거침없이 토론하는 방식이었다. 현대시 동인이 선배 시인답게 좋은 후배들을 길러내는 이 일이 정말 바람직스러웠다. 그래서 제1회 수상자로 강연호, 제2회 박상순, 제3회 이대흠, 제4회 연왕모, 제5회 김 참, 제6회 권혁웅, 제7회 조말선, 제8회 심재휘, 제9회 손택수, 제10회 길상호 등이 선정되었다. 이 일이 젊은 세대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주는 사업이어서 더 오래 지속될 수도 있었겠지만, 동인들의 사정이 넉넉지 못해 그만두게 된 점이 아쉬웠다.

 

   
2006년 10월 태백산 정상에서-오세영 이건청 필자
1998년에는 내가 KBS 라디오 주간에서 라디오 국장이 된 해였다. KBS에 재직 중인 시인 백학기, 손현철, 안덕상, 유성식, 박해선 등 8명과 함께 앤솔러지 《밥 보다 더 큰 슬픔》(푸른숲)을 펴냈다. 방송과 시를 함께 하는 우리의 마음이 시집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시와 도예의 만남전’을 KBS 신관 로비에서 가졌다. 정지현 도예가의 솜씨와 정창기 서예가의 붓놀림이 시와 함께 어울리는 그런 자리였다. 그 후로 SBS에서 유자효, 박건삼, 박준영 그리고 MBC에서 김주태가 참여해 모임은 제법 커졌다. 우리는 13인의 앤솔러지 《붉은 추억과 나무》를 펴내기도 했다.

 

2001년이 되자 협성대학교 최문자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더러 시간을 좀 내서 문예창작학과에서 시창작을 강의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수업이지만 열심히 준비해서 강의를 했다. 이듬해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김현자 교수가 시창작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을 해서 그렇게 했고, 2003년도에는 다시 협성대학교에서 부탁을 해와 강의를 맡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려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갑작스럽게 시창작 강의를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오탁번 교수의 청이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알고 보니 지금까지 그 시간을 맡았던 임영조가 타계해서 생겨난 자리였다. 그래서 시작한 고려대학교 사회교육원 시창작반 자리는 시에 관심과 애정을 가진 사람들과 내가 한자리에 만나 어울리는, 조그만 사랑방 같은 모임이었다. 5년 동안의 만남을 통해 직간접으로 10여 명의 신인을 배출했다. 그리고 2004년부터 2006년까지 2년 6개월 동안에는 최동호 교수가 맡고 있는 ‘시사랑문화인협회(지금의 문화 아카데미)’에서 시창작을 지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2007년 11월 18일, 뜻밖의 일로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부정맥 질환이 생겨난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해서 곧바로 시술을 받았다. 그것이 공식적인 사회생활의 마지막 일정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집안에서 책도 보고 시를 쓰고 운동을 하면서 세월이 재빠르게 흘러감을 바라보고 있다. 시인 50년, ‘참으로 끝없는 싸움’을 내가 하고 있는 중이다.

[55호] 2012년 01월 10일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