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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후진적 글쓰기의 종언을 위하여 ─『작은 산』(실천문학사, 2013) / 박철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1. 21.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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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후진적 글쓰기의 종언을 위하여
─『작은 산』(실천문학사, 2013)

                                                                     박 철

 

 

   한 권의 시집을 묶을 때 가장 난감한 건 동어반복이다.
   그 얘기가 그 얘기고 그 얼굴이 그  얼굴이면 독자로선 읽는 게 시간 낭비로까지 느껴질 것이다. 사람의 습성은, 어쩌면 천성일지도 모르는 필치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짧은 글을 쓰는 시인조차 부단히 정진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문학은 수렁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작은 산이 큰 산이라는 단순한 명제를 다시 되내기 위해  산에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시의 도처에 돌부리처럼 걸려 넘어지는 '작은 산'이란 시니피앙은 우수마발 아니 해당되는 곳이 없다. 나아가 산시산 수시수(山是山 水是水)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작은 산은 그 너머에 오는, 그러니까 이후에 오는 어떤 담대한 망각덩어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팔만대장경을 달달 외운다 해도 결국 정각(正覺)은 잊으라는 말과 같다.
   확실한 불확실성은 그저 말장난에 불과 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우리가  미시와 거시의 중간에 놓였듯이 진리와 혼돈의  황금비례에 안주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걸 쉽게 표현하자면 작은 산이 높은 산이고 낮은 산이 오래 된 산이다. 멀리 다녀오고, 높게 나는 이들에게 시시비비 딴죽을 걸기 위해 비대칭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마지막 아날로그 시집이라는 거창한 얘길  들었을 때 역시, 난감 했지만  그 풀이를 수긍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디지털 시대의 시가 뭔지는 정확이 모르겠으나 일단 그 반대편에 서야한다는 믿음도 있다.
   요즘 시는 우리 스스로를 너무 위축 시킨다.
   일요일 저녁 방송되는 일요음악회의 가수들이 얼굴만 가리면 모두 같은 목소리라 할 때 얼마나 웃기는 장면인가. 그 중에서도 한국문학의 가장 큰 문제는 중장년 세대의  과욕이다. 시는 철학으로서의 용기(用器)가 큰 데 그건 연륜과 안목이다. 그러니까 사람에 따라서 살아온 이력에 따라 시는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어느 시대부턴가 시는 노력에 의한 ‘모양’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삼십 년 시를 써온 사람들이 신인 투고하듯 눈치를 보며 글을 쓰는 것은 오류다. ‘젊은 그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과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은 수치다. 오십 년 넘게 살아온 이라면 그만의 소리와 모양이 필요하다. 당연히 있을 것이고 그걸  감추거나 스스로 비하시키는 것은 올바른 문학이 아니다.
   또 하나, 시니피에에 관한 문제다.
   이번 시집을 내고 새로 쓴 시에는 이런 것이 있다.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 지는
   화장장에 가보면 안다

 

   그 북새통에서
   더위 속에서
   통곡 속에서
   절전을 한다며 꼭
   에스컬레이터를 멈춰야 할까

 

   우리가 얼마나
   이별에 서툰 지는
   화장장에 가보면 안다
               ―「가난」 전문

 

   이번 시집뿐 아니라 나의 모든 글에는 가난과 외로움이 등장한다.
   내 글에 무수히 나오는 가난과 외로움은 개인적인 사유의  결과가 아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다거나 누군가 그리워, 가령 친구가 별로  없어 외롭다는 것이 아니다. 위의 글을 먹고 사는 게 척박하여 외치는 비명으로 알아듣는다면 정말 넌센스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땅의 많은 독자들은 그렇게 읽는다. 그런 오독은 오해를 낳고 오해가 논리의 모순을 낳으면 사회는 반목 속에 황폐해진다.
   허구한 날 동어반복적으로 싸우는 정치꾼들의 쇼 역시 기초 논리학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다. 아, 정말 지겹지 아니한다.
   시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가 아직 뚫지 못한 소통의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그저 무책임한 가장의 에피소드로 풀이되는 현실은 오롯이 우리 문학인의 과오가 크다.
   평소 사람은 ‘왜’라는 심장을 오른쪽에 하나 더 달고 다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한국사회의 모든 모순은 그 연원의 중간 지점에 ‘분단’이라는  암초가 있다. 어느 누가 어둔 골목길에 토해놓은 오물부터 하루에 사십 명씩 자살을 하는 우리가 모르는 진실도 모두 분단에서 오는 악취다. 왜 그럴까. 거듭 말하거니와, 분단체제의 해소만이 우리 사회를 조금 더 사람 사는 세상으로 만들고 나의 불면도 줄인다. 편히 잠들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이번 시집에서 역시 분단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테제로 자리를 내주었다.
   후진적이라고? 우리가 후진국에 살아있는 한 이 후진적 글쓰기는 계속되어야한다고  믿는다. 하루키의 신간 소설이 발간 일주일 만에 백만부가 팔렸다는 뉴스는 확실히 뉴스거리다. 그러나 돈이 들어간 만큼 빼내기 위해 홍보를 한다거나 그의 작품성을 논하기 전에 왜 우리에겐 그런 작가가 없는 가 반성해봐야 한다.
   실제로 그만한 작품성을 지닌 이들이 없었거나, 없는가. 천만의 말씀.
   “소외감과 고독은 몇 백 킬로미터 길이의 케이블로 변했고 거대한 윈치가 그것을 팽팽하게 조였다…… 그 소리는 나무 사이를 불어 가는 질풍처럼 강도를 바꾸어 가며 웅웅 단속적으로 그의 귀를 찔렀다”
   이 정도의 문장은 사실 우리나라에선 어휘력이 부족한 신출내기가 마구 쏟아내는  은유의 남발에 불과하다.
   그런, 저런 모순의 극복을 위한 제언과 충만이 이번 시집의 외마디이다.
   그럼 공명은 있는가. 반향은 있는가. 그게 있다면 그 순간부터 나의 후진적 글쓰기가 힘을 잃게 되는 바른 세상이 오는 것이다. 아,

   —계간 『시에』 2013년 가을호


 

박 철
서울 출생. 1987년 『창비』로 등단. 시집 『김포행 막차』,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사랑을 쓰다』, 『불을 지펴야겠다』 등

 

<가져온 곳 : 시에/시티에카>

http://cafe.daum.net/sieriver/SLyh/15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