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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기획] 묵매(墨梅)에 쓰다 / 이선이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4. 1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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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기획] 묵매(墨梅)에 쓰다 / 이선이
시인이 사랑한 봄꽃
[71호] 2014년 03월 01일 (토) 이선이 budatree@khu.ac.kr

묵매(墨梅)에 쓰다

달이 동지를 건너올 무렵
그녀는 유리창에 빈 꽃송이들 빼곡히 그렸네
폭설이 검은 동공에 얼음바늘 찌르고 달아나면
제 눈에 꽂힌 바늘 하나씩 뽑아들고
밤마다 한 잎 두 잎 색을 입혔네

 

그녀의 눈동자는 붉은 팔레트
심장을 올려놓고 혀를 올려놓고 마지막으로
입술을 올려놓았네, 하지만
뜨거운 핏물 덧입혀도 꽃에 물드는 색은 여린 흰빛
흰색은 숨을 삼키는 색, 오래 들여다보면
바라보는 자의 눈동자에 천 길 단애가 생겨나기도 한다는데
어둠은 마르지 않는 물감  
제 눈을 찌른 바늘만 한 붓이 어디 있으랴

 

철필로 매화의 꽃빛을 새기는 밤
달은 육중한 문고리, 어둡게
그녀를 가두었네

 

홍매(紅梅)에 젖다

   

이선이

나는 봄을 좋아하지 않는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심해 봄이면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봄이 오면 미친년 널뛰듯이 불어대는 봄바람에 몸살을 앓거나 두통과 불면에 시달리기 일쑤이다. 이런 물리적 아픔뿐만 아니라 심리적 불안이나 원인불명의 초조함도 봄이 요구하는 통행료이다. 다투어 피던 꽃이 지고, 참새 혓바닥 같은 새잎이 얼굴을 내밀어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건 피할 수 없는 내 봄의 현실이다. 둘러보면 이런 종류의 인간이 세상에는 적지 않다. 봄이면 연락 두절인 친구가 한참 후에 나타나 몸살 앓다 죽을 뻔했다는 식의 푸념을 늘어놓는 것은 흔해 빠진 봄의 일화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꽃무늬 팬티를 좋아하게 되는 것처럼 봄꽃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사실인 듯하다. 봄마다 저승 문턱까지 다녀오던 친구들도 이제는 전화를 걸어와 꽃놀이 가자고 졸라대는 것을 보면 세월의 변덕을 절감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유혹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봄을 회피하고 있다. 봄에 대한 나의 이런 심드렁함은 어떤 무의식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곽화는 내 큰어머니의 이름이다. 이십 세기 초의 촌구석에서 태어난 여성임에도 ‘화’라는 멋진 외자 이름을 가졌다. 행동이나 말무새 모두가 하나 버릴 데 없는 양반이셨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남살댁이라 불렀다. 마을의 북쪽에 위치한 산청군의 남사마을에서 시집을 와 붙여진 택호였다. 내 유년은 그녀의 치마폭과 함께했다. 그녀는 이십 대 초반에 혼자되어 평생 과부로 수절했다. 그녀보다 조금 먼저 과부가 된 할머니를 혼자 모시는 게 마음에 걸렸던지 부모님은 도시로 이사하며 나를 큰댁에 맡겼다. 다섯 살 때부터 나는 할머니와 큰어머니 그렇게 셋이 살았다. 마을은 지리산 자락에 있는 산 깊고 물 맑은 청정지역이었다. 하지만 이런 풍광보다는 큰어머니야말로 내 유년의 청정지역일지도 모르겠다. 이 무의식의 흐릿한 풍경 하나를 펼쳐보면 이렇다.

 

시골의 겨울밤은 길어서 자다가 한두 번은 깨어나 화장실을 다녀와야 했다. 무섬증이 많던 나는 화장실 가는 일이 두려워 한밤중에 요기를 느끼면 새벽까지 오줌을 참으며 선잠을 자곤 했다. 어느 겨울인가는 눈이 많이 내렸다. 지리산에 근접해 있어 그랬는지 남쪽이지만 폭설이 내리기도 했다. 새벽에 잠을 깨보니 큰어머니는 문고리에 숟가락을 꽂아두고 앉은 채 밤을 새우고 있었다. 달이 환한 밤이라 큰어머니의 작은 체구가 달빛 속에 다 젖어 있었다. 그 시절의 겨울밤이면 과부 따먹으러 다니는 사내가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마을에 퍼지곤 했다. 어느 해 봄에는 그런 큰어머니와 그녀의 친정집에 함께 갔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봄바람이 드세서 돌풍이 일 때면 큰어머니는 치마로 나를 감싸주었다. 그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저물녘에서야 남사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는 고혹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매화꽃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큰어머니는 유독 붉은 홍매화 그늘에 한참을 서 계셨다. 그때 붉은 꽃잎이 흩날렸는지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여든을 넘겨 노인요양원에서 그녀는 홀로 영면하셨다. 아직은 매화도 기억도 시리고 아프다.

 

 

 

이선이 budatree@khu.ac.kr / 1991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으로 《서서 우는 마음》 평론집 《생명과 서정》 《상상의 열림과 떨림》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유심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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