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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문학] 고독과 결핍이 낳은 문학 열병 / 송수권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4. 17.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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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문학] 고독과 결핍이 낳은 문학 열병 / 송수권
[70호] 2014년 02월 01일 (토) 송수권 시인

   
등단작 〈산문(山門)에 기대어〉

얼마 만인가, 이 산문 안에 다시 온 것이…… 젊은 날의 한 해를 여기서 보냈다.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비승비속의 나날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 자신의 영혼을 추스를 길이 없었을 때 영혼이 울고 거기서 시혼이 솟고 그 끝에 〈산문에 기대어〉가 있었다.
산문(山門). 그것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경계의 문이다. 윤회의 끝없음과 부활(환생)이다. 시력 40여 년을 돌아보면 나의 첫 출발은 이 문을 하나 짊어지고 나섰던 것이다. 여기엔 한 생명의 부활과 윤회가 끝없이 한(恨)의 가락을 이루고 있다.

 

엊그제 폭설이 내리는데 멀리서 온 독자와 함께 선암사에 올라갔다. 일주문을 들어서다 말고 한 발은 일주문 안에 한 발은 일주문 밖에 두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승이 곧 저승이고 저승이 곧 이승인 불이문(不二門)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그 경계 허물기가 곧 산문이 아닐까. 이승과 저승을 뒤집어 놓는 체험 없이 시를 쓴다는 것은 상처가 없는 행복한 시 쓰기로 시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 졸시 〈산문에 기대어〉

 

이 시에서 내가 쓴 그 ‘눈썹’이야말로 한의 끈적끈적한 덩어리이다. 즉, 무주고혼이다. 야산 같은 데서 이장을 하다 보면 뼈는 다 삭아 내렸는데 머리칼과 눈썹만 그 음습한 웅덩이에 고여 있음을 본다. 백발이 아니라 그것이 검은 터럭일 경우 얼마나 섬뜩하고 한에 젖어 있는 터럭들인가? 그래서 이따금 화장실 출입을 하다 수세식 좌변기에 묻어 있는 ‘털’ 하나를 보았을 때, 그 터럭은 공포의 대상이 된다. 이런 날은 오래 잠자던 불면증이 다시 겹친다.

 

뱃길에서 죽은 자의 혼풀이를 할 때, 무당들이 식기를 흰 띠에 매달아 물속에 처넣었다 건져 올린 후 열어 보면 거기에 들어 있는 것 역시 터럭이다. 출가할 때에는 머리를 깎는다. 땅속에서도 삭지 못하는 그 원한이 젊은 죽음일 때 이 무주고혼은 가을산 그리메에 떠도는 넋이 아니겠는가? 이 덧없는 죽음 위에 돌로 눌러서라도 복수를 하고 싶은 부활 의지, 그 부활 끝에 누이는 이제 산다화를 꺾어 나에게 스스럼없이 건네주는 생명의 인과법칙과 윤회 속에 환생하여 있음을 본다.
휴지통에서 나온 시인

 

 이 시는 바람 부는 늦가을, 기러기가 공중에 길을 내는 것만 보아도 누이(자살한 남동생)의 선험적 이미지인 눈썹(동생은 숱이 짙은 눈썹이었음)의 행방을 보게 되고, 동생의 무덤을 찾아가 술 한 잔을 나란히 따라 놓고 그가 와서 나의 빈 잔을 채워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의 넋두리는 내가 살아서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기다림의 넋풀이라 할 수 있다. 이 대화체 형식의 독백 속엔 설움이 깊게 배어 있는 재생적 의지가 짙게 깔려 있다. 이는 곧 넋풀이로서 해한이며 역동적인 생기로 피는 한의 극복 의지이다.

 

〈산문에 기대어〉는 제1회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당선작인데, 당시 나는 서울을 떠돌며 생존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어느 여관방에서 갱지에 갈겨쓴 채 10편을 응모했는데, 원고지에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휴지통에 넣은 것을 심사 과정에서 다시 보게 되어 당선작이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 주간으로부터 “자넨 휴지통에서 나온 시인이야”란 우스갯소리를 심심찮게 듣는다. 주소도 이름도 낯설어 그 1년 후에야 수소문 끝에 시인을 찾아내게 되었다. 197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당선작이 나의 이 시를 표절했다 하여 취소된 사건은 열병을 앓는 문학도의 주가를 엄청나게 상승시켰다. 이 시는 1966년 봄, 24세 남동생이 제대한 그 다음 날 어머니 묘소 앞에서 음독자살한 사건을 다룬 추모 형식의 엘레지다.

 


부카레스트 1934

 

동생 수종(秀鍾)은 나와는 세 살 터울이다. 정확히 말해서 동생이 죽은 것은 1966년 3월 초순이었다. 제대복을 입고 허무증을 안고 돌아온 그 이튿날로 놈은 한내천 자기 어머니의 무덤이 보이는 언덕 밑에서 자살을 했다. 놈이 먹다 남은 수면제 알약들이 군복 깃을 타고 흘러 들찔레꽃처럼 아침 이슬에 젖어 하얗게 피어 있었다.
그날부터 점을 치면 죽어서도 놈은 입바람이 나기 시작했다. ‘나 장가 갈래’였다. 동남간 쪽 어느 마을에 색시를 보아 두었다거니, 아무 데 마을 색시는 마음에 안 들고 업살이 꼈다거니 제 주제는 생각지도 않고 횡설수설 떠들어 댔다. 그래서 생넋들끼리 결혼도 시켰다.(산문집 《사랑이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 《만다라의 바다》 《아내의 맨발》에 있는 ‘겨울나비’ 참조)

 

그러니 시간 망각하는 법을 배우라. 시간이 지닌 의미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도 배우라. 감상적인 기록의 모든 흔적들을 억누르고 곧 사라져 버릴 명상, 어릴 적 추억도 가을도 짓밟힌 꽃잎도 향수마저 억누르라    
 — 〈부카레스트 1934〉 중에서

 

잊어버리기 위해서 아니 가슴 속에서 놈의 영원한 무덤을 파내 버리기 위해서 나는 오랜 세월을 짐승처럼 울면서 괴로워했다.
나는 1962년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나왔고 곧 공군에 입대, 1965년 12월에 제대했다. 놈은 그 이듬해 3월에 제대했다. 놈이 죽은 지 6개월 만에 나는 중학교 교단에 발령을 받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에게도 큰 위기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시절부터 미친놈처럼 〈부카레스트 1934〉를 즐겨 외고 다녔으리라 싶다.

 

망각하는 것, 이것처럼 좋은 일은 없다. 내가 네 살 때 어머니는 병으로 비슬거렸고 놈은 한 살배기였다. 그는 젖도 못 먹고 자란 놈이었다. 어머니는 놈이 걸을 때쯤 늘 젖무덤에다 고춧가루를 발라 접근하는 것을 피하곤 했다. 그 대신 할머니가 미음을 끓여 먹였다.
전주 예수병원으로 순천 알렉산병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떠돌아다녔다. 그 바람에 우리는 모성을 잃고 자란 형제였다. 놈은 비슬거리다 중학교 때 어질병이 나더니 고등학교 입학을 포기해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할머니도 가고 어찌할 수 없이 서모가 들어왔다. 열 살 때 그 어머니도 가고 동생은 일곱 살이었다. 7년간을 담괴가 터진 옆구리를 붙들고 고름을 쏟아내던 어머니, 그 무덥던 여름날 방 안은 고름 냄새로 찌들어 내 코는 마비되었다. 지금도 냄새에 민감하지 못한 것은 그 후유증이다. 옆집 채마밭 가에 핀 치자꽃, 봄철에 핀 철쭉(개꽃)꽃을 꺾어다가 병상의 화병에 꽂아 놓았던 일을 기억할 뿐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 놈은 시원찮은 몸을 이끌고 올라와 날품을 팔고 애꿎은 일을 하며 학비에 도움을 주었다. 나는 치사하게도 그 엽전을 긁어먹고 시인이 된 놈이다. 그는 입대를 했고 나는 학교를 나와서도 시인이 되지 못한 채 섬 중학교로만 10여 년을 떠돌았다.

 


붉은 황톳길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흘러흘러……
고향을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솟는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도 못살고 굶주렸던 고향이지만 그러나 마음에 살아 있는 고향은 따뜻하기만 하다. 내 고향은 연산군 때였다던가 파발마를 놓은 역이 생겼대서 속성을 역둘리라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한반도의 최남단 고흥반도다. 고흥읍에서 서북으로 20리를 더 들어가는 두원반도의 중간쯤에 위치한 두원면 학곡리 학림마을 1297번지다. 지금은 폐가가 되어 다 허물어져 가고 있다. 학은 죽실(竹實)을 먹고 사는 영험한 새이다. 바로 이 새가 살았다는 골짜기여서 학림(鶴林) 마을이고, 이 마을에는 학산(鶴山)이 우뚝 솟아 있다. 학산을 넘어가면 사적굴이 있고 사적굴이 있는 동산을 넘다 보면 바로 보성만과 득량만이 건너다보이는 바다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60여 호쯤, 그저 고만고만한 집들이 양짝, 음짝, 당산마을을 이루면서 창창한 대숲 바람에 잠겨 있다. 나는 양짝마을에서 자랐다. 내 시에 대숲 이야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동생과 나는 서모가 지어준 새벽 밥을 먹고 20리 길을 통학했다. 내가 3학년 때 그는 1학년이었다. 아침이 늦으면 많이 굶고 가기도 했는데 놈의 어질병은 거기서 오지 않았나 싶었다. 큰 고갯길만 해도 자시치고갯길과 송치고갯길이 가로막고 있었다. 비가 오면 질컥거리는 황톳길이었고 마차나 소달구지도 이따금 황토 수렁길에 처박히는 등 갖가지의 추억도 많다. 그때는 운동화가 없어 검정 말표 고무신을 끌고 다녔는데 어떤 날은 맨발로 고갯길을 넘기도 했다. 학교에서 신발 도둑들에게 도둑맞으면 영락없이 이 꼴이었다. 이 길은 어두웠지만 언제나 신선하게 열려 있었고 무한대의 시간이 출렁이고 있었다. 거기에는 항상 원초적인 생명력이 넘쳤고 내 유년에 해당하는 공간이며 따뜻한 신화의 불빛에 젖은 황토를 떠올리게 한다.
읍내에서 두원반도의 끝 대전 해수욕장까지의 50리 길은 아스팔트로 뒤덮여 교통량도 예전 같지가 않다. 마을 뒤의 득량만은 4km의 고흥 방조제가 들어서서 바다를 가르며 녹동항까지 이어져 바다는 죽었다. 훗날 시인이 되어서야 맨 먼저 이 길 위에서 벌어졌던 신화적인 축제 이야기들을 시로 써가기 시작했다.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 졸시 〈시골길 또는 술통〉

 

이 시는 1975년 등단 이후인 1978년쯤 쓴 작품이지 싶다. 제1 시집 《산문에 기대어》(1980)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신화의 불빛이 따뜻하게 열려 있는 것을 보면 이후 나의 삶은 이 불빛에서 하나의 상징기호를 얻은 셈이다. 그것은 곡선의 상법이며 황토의 길과 대숲 바람 소리, 뻘로 이루어지는 나의 시 세계와 일치한다. 치마 속으로 들어가는 그 길이 곧 어머니의 자궁이며 나의 시는 이 원형적인 자궁 속에서 탄생했다. 따라서 나의 문학은 동생의 자살이 문학적 열병을 다시 솟아나게 했고 근원적으로는 고독과 모성의 결핍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친구 임홍재 시인

 

1966년 10월 16일 나는 중등학교 채용 순위고사에 합격되어 고향 언저리에 있는 영주중학교 국어 교사로 발령이 났다. 1년 만에 나주중학교 교사, 그리고 8개월 만에 이 세상 끝섬이 어딘가를 물어 초도중학교로 자원했다. 나는 이 세상 끝까지 피해 달아나고 싶었다. 동생의 자살은 이렇듯 나를 짓눌렀으며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곳은 여수항에서 여섯 시간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 중학교였다. 무려 6년을 주저앉았다. 그리고 상록학원을 열어 간판을 걸고 야학도 시작했다. 일요일에는 무인도를 돌며 낚시하는 재미로 소일했으며 문학잡지 한 권 읽은 적이 없었다. 31세 때 이곳에서 결혼을 했는데, 아내는 영주중학교 때 내가 가르쳤던 제자였다. 그 6년 사이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큰애의 교육을 걱정하여 육지로 발령 신청을 했는데 또다시 고향 언저리 섬이었다. 과감히 사표를 쓰고 1973년 봄부터 아내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맨 처음 찾아간 곳이 선암사였고 남명 스님을 만나 중이 되고자 결심했다. 그런데 남명 스님은 괴짜승이었고 밤마다 막걸리를 한 되 이상 들이키고 닭 한 마리를 먹어야 잠을 이루었다. 중이 된다는 것도 쉽잖아 보여 몇 개월 만에 서울로 튀었다. 이때 절방에서 문학병이 다시 도지기 시작해서 초안을 잡았던 것이 〈산문(山門)에 기대어〉 외 몇 편이었는데 2007년 《월간조선》 2월호에 나의 문학산실인 ‘벽안당’을 처음 공개하기도 했다.

 

1976년 또다시 순위고사를 보아 합격하고 발령받은 곳이 지도라는 섬의 지명중학교였는데, 이때는 어엿한 시인 교사였다. 1975년 3월경 그해 신춘문예 당선 시인들과 함께 문학사상 주최로 ‘YWCA’에서 합평회가 있었는데 그때 만난 시인이 임홍재 시인이었다. 그는 〈서울신문〉에 〈바느질〉이란 시와 〈동아일보〉에 시조 〈염전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 인연으로 1979년 그가 죽을 때까지 우리는 2백여 통의 편지를 교환했고 방학 때면 서울에 가서 만났는데 박용래 시인과도 친교를 텄다. 그가 청계천 다리에서 실족사로 죽은 후 《여성동아》에 2회에 걸쳐 편지를 공개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가 죽은 2개월 후에야 사무실에서 되돌아온 편지를 받고서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등단 이후 지금까지도 나에게는 유일한 친구라면 친구였다. 20대에 등단을 못 하고 30대 중반에 등단해서 내 나이 또래의 시인이 없는 터라 1960년대 시인들의 모임에 갈 수도 없는 어중간한 처지가 되었다. 안성농고에 세워진 그의 시비를 참배하고 오면서 서럽게 쓴 시가 있다.

 

장터 마당에 눈이 내린다
먹뱅이 남사당패 어디 갔나
남사당은 내 고향
내 몸은 아프다
소리 소리치며 눈이 내린다
설설 끓는 동지 팥죽
저녁 한 끼 시장한 노을 위에
식어가는 가마솥 뚜껑 위에
안성(安城)세지 목화송이 같은 흰 눈이 내린다
비나리패 고운 날라리 가락 속에
눈물범벅이 진 네 얼굴
곰뱅이 텄다 곰뱅이 텄다
70년대를 한판 걸쭉하게 놀아보자던
네 서러운 음성 위에
동녹이 슬어가는 유기전 놋그릇들 위에
눈이 내린다


어스레기* 황혼을 부른 말뚝 위에
 
*어스레기: 어린 송아지
                                      — 졸시 〈안성장터―홍재 시인에게〉

 


광주시대와 변산시대

 

섬으로만 떠돌다 1980년 3월에 광주로 입성했다. 근무하던 광주여고는 5·18이 일어난 도청 옆에 있었다. 입성 2개월 후에 5·18이 일어났고 〈전남일보〉(지금의 광주일보)에 〈젊은 광장에서〉라는 복간 시를 쓴 것이 화근이 되어 계엄 당국으로부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어 광주여고 삐라 사건, 홍남순 변호사와 김지하 시인 석방 기념 YWCA 시낭송 사건 등으로 늙은 형사와 함께 똑같이 출근한 것이 무려 2년, 드디어 어느 날 하루아침에 갑자기 서광여중으로 쫓겨나는 몸이 되었다. 아직까지 〈젊은 광장에서〉라는 80여 행의 시는 시집에도 넣지 않았다. 이로부터 효광여중, 광주학생교원 연구사 등 광주시대 15년을 마감한 것이 1995년 8월 31일이었다. 교장 진급이 되지 않을 바에야 명퇴를 서두른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떠돌이병이 도져 방랑 끼를 주체하지 못했다. 제주도행을 서둘러, 평소 절친이던 현규하 시인 집에 둥지를 틀었다. 그때 낸 책이 《남도의 맛과 멋》이었는데 초당대학교 김창진 교수로부터 낯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남도의 맛과 멋》의 서설을 읽고 감동받았는데 대학의 교양국어에 한 꼭지를 싣겠다고 했다. 그리고 강의도 맡아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마침 동해 난바다 서해 뻘바다 제주 바람바다라서 제주 겨울바람을 피하고 싶어 곧 육지부로 나와 출강을 했다. 이어 광주여대, 그리고 순천대 김길수 교수가 문창과가 설립된 초창기라면서 출강을 부탁해왔다.

 

서재를 서귀포에서 변산 뻘밭 가인 격포로 옮겨왔다. ‘낙산일출 월명낙조’란 말처럼 변산은 노을 속에 핀 연꽃밭이었다. 수년간 음식기행을 하고 다녔던 터라 무작정 이곳이 좋아 찾아든 것이다. 양우아파트 304호실, 그곳에서 생활은 행복했다. 밥을 퍼먹는 수저통에까지 노을이 기어들어 내가 밥을 먹는지 노을을 퍼먹는지 어리벙벙하고도 황홀한 순간―그 낙조란 지는 노을이 아니라 새로운 천지 창조의 시간임을 느꼈다. 이때 제9 시집인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을 냈고, 산문집 《만다라의 바다》를 펴냈다.

 

너는 서해 뻘을 적시는 노을 속에
서본 적이 있는가
망망 뻘밭 속을 헤집고 바지락을 캐는 여인들
한쪽 귀로는 내소사의 범종 소리를 듣고
한쪽 귀로는 선운사의 쇠북 소리를 듣는다
만 권의 책을 쌓아 올렸다는 채석강의 절벽
파도는 다시 그 만 권의 책을 풀어 흘려
뻘밭 위에 책장을 한 장씩 넘긴다
이곳에서 황혼이야말로 대역사(大役事)를 이루는 시간
가슴 뜨거운 불꽃을 사방으로 던져
내소사 대웅보전의 넉살문 연꽃 몇 송이도
활짝 만개한다
회나무 가지를 치고 오르는 청동까치 한 마리도
만다라와 같은 불립문자로 탄다
곰소의 빨강을 건너 소금을 져나르다 머슴 등허리가 되었다는
저 소요산 질마재도 마지막 술 빛으로 익는다
쉬어라 쉬어라 잠시 잠깐
해는 수평선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 졸시 〈대역사(大役事)〉
나는 이곳에서 우리 국토 산수 정신인 황토와 대(竹)에 이어 뻘의 정신을 마지막으로 천착하기로 했다. 그래서 격포 뻘밭을 선택했으리라. 광주시대까지를 황토와 대(竹)의 정신을 천착했다면 격포시대는 마지막 뻘을 캐기 시작한 뻘짓거리 시대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써온 시집 17권은 이에서 한 치 반 치도 벗어난 적이 없다.

 


지리산 시대

 

페로몬 냄새 질퍽한 뻘과 노을 속에 눈썹 날리며 살던 격포 바닷가에서 화개장터 건너편 염창마을로 서재를 옮겨 온 것은 2001년 겨울이었다. 이로부터 순천대학교 문창과 객원교수에서 정식교수로 특채된 행운을 얻어 학교에 상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난생 팔자에 없는 교수가 되고, 그것도 석박사 학위는커녕 학사 졸업장도 없는 터였으니 행운이랄밖에. “시를 쓰면 옷이 나와요, 밥이 나와요?”라고 노상 군소리를 했던 아내도 봉급 통장에 월급이 들어오니 “시도 밥 먹여 줄 때가 있네요.” 했다. 그것도 국립대학교 특채 1호 교수(해방 후 처음)라고 언론이 떠들어 댔다. 이곳에서 학교까지 거리는 40분. 격포의 노을과는 달리 섬진강의 강노을과 지리산의 산노을 또한 유정해서 이곳에서 환갑을 맞았고 2005년 8월 정년을 지나 2012년까지 무려 15년간을 학교에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광주와 격포 시대 18년, 지리산 섬진강 시대 15년이 나의 삶 전체의 절반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이곳은 나의 제2의 고향과도 다름없다. 1977년도에 섬인 지명중학교에서 육지로 상륙했던 곳이 구례중학교였고, 이곳에서 다시 1978년 섬학교인 금당중학교로 가기까지 2년을 살며 〈지리산 뻐꾹새〉 등 많은 작품을 썼던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노고단 산장 벽면에는 1976년 8월 개최했던 ‘산상시화전’ 사진이 남아 있기도 하다.
달궁길, 이 길은 여순사건과 ‘지리산 빨치산’ 이야기를 쓰기 위해 무수히도 넘나들었던 나의 산책로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써진 것이 장편 서사시 《달궁아리랑》이고 후속작인 〈빨치산〉이었다. 그리고 나의 ‘광주시대’에 제3 시집 《아도(啞陶)》(1985)에서 다룬 5·18 민주화 운동과 서사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1987)의 1894년 갑오·동학혁명 두 사건은 불과 60년의 시차로 현대사를 뒤흔든 사건이다. 여기에다가 불타는 섬 제주의 4·3사건을 더하면 현대사는 완전히 복원된다. 2014년도에는 4·3사건을 소재로 한 시집 《바람타는 섬》을 출간할 예정이다. 이는 1987년의 장편 서사시 《새야새야 파랑새야》의 연장선에 있는 역사물이기도 하다. 이런 와중에서도 전국 음식 기행을 감행, 〈주간 동아〉에 2년간이나 연재 기행을 했으니 참으로 숨 가쁘게 살아온 시기이기도 하다. 시집 《빨치산·1》에 실린 “날아가는 새가 되지 않으려고/ 밤마다 가슴에 돌을 얹고 잠들었다”라는 시구는 빨치산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삶과 문학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내의 맨발
 
보험설계사로 일하며 내 뒤치다꺼리를 해온 건강했던 아내는 20년 만에 덜컥 백혈병이 났다. 사표를 던지고 내가 떠돌았을 때마다 악착스럽게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생활을 꾸려 왔다. 한때는 함께 수박농사까지 지으면서 내가 엄두도 못낸 똥장군까지 짊어진 여자였다.
등단작 〈산문에 기대어〉가 발표되기 전 1년간은 그랬다. 행방불명이 된 나를 찾으려고 막내 딸아이를 포대기에 짊어진 채 서울까지 온 아내에게 덜미가 잡혀 집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교수 봉급으로 집 한 채 마련하겠다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아내의 맨발〉이라는 제목으로 투병기를 써 주겠다는 조건으로 이식수술비까지 끌어왔다. 10년째인 지금도 아내는 시난고난한다. 굶어 죽으란 법은 없어서 다행히 올해는 집을 사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 2012년에 김삿갓문학상, 지난해에 구상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여기저기서 특강료와 원고료, 인세 등이 들어와 행운이 겹친 탓이다. 나는 적잖은 상금을 받은 구상문학상의 수상소감에서 밝힌 바대로 ‘종교는 개벽의 논리고 혁명은 정치의 논리며 시는 교화(깨달음)의 논리’라는 큰 교훈을 1980년대 구상 선생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전담 형사를 달고 다니면서도 혁명투사가 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뜨거운 모래밭 구덩을 뒷발로 파며
몇 개의 알을 낳아 다시 모래로 덮은 후
바다로 내려가다 죽은 거북을 본 일이 있다
몸체는 뒤집히고 짧은 앞 발바닥은 꺾여
뒷다리와 두 발바닥이 하늘을 향해 누워 있었다

 

유난히 긴 두 발바닥이 슬퍼 보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
한밤중 병실마다 불 꺼진 사막을 지나
침대차는 굴러간다
얼굴에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

 

아내의 발바닥에도 그때 본 갑골문자들이 수두룩하였다
                                             — 〈아내의 맨발·3(갑골문자)〉

 

그녀는 성모병원 20층 무균실에서 투병을 끝내고 엘칸토 후원으로 선물 받은 환자용 구두를 신고 마침내 맨발을 가린 채 뚜벅뚜벅 지상으로 걸어 내려왔다. 아내는 10년 투병 끝에도 비실거리며 집을 사서 들어간다는 말을 또 이렇게 말한다. “시가 집을 사 줄 때도 있네요.”라고.

 

이제 나의 삶도 저물어간다. 벌써 7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삶도 문학도 팔자런가 싶다.
엊그저께는 학교에서 불러 애들과 이마를 맞대며 특강 마무리를 했다. 사랑, 인연, 만남이란 지상에서 태어난 말이 아니라 하늘돌(운석)을 타고 내려온 말이라고 나의 시 〈파천무(破天舞)〉를 들어 설명했다. 그리고 나를 문학으로 살게 해 준 것은 거기 있었던 휴지통과의 만남이었고 나의 삶을 이끌어준 평생의 은인은 질긴 인연의 학과장인 김길수 교수였다고!

 

사랑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자
인연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자
만남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자
— 졸시 〈파천무〉 중에서
 

 

 

송수권 
1940년 전남 고흥 출생.  1975년 〈산문(山門에 기대어)〉 외 4편이 《문학사상》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산문(山門에 기대어)》에서 《파천무》까지 16권과 시선집 《여승》 등 저서 50  여 권 출간.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역임.  문공부예술상, 금호문화예술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김영랑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만해 님시인상, 한민족문화예술대상, 김삿갓문학상, 구상문학상 등 수상. 현재 한국풍류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