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삶, 나의 문학] 고독과 결핍이 낳은 문학 열병 / 송수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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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만인가, 이 산문 안에 다시 온 것이…… 젊은 날의 한 해를 여기서 보냈다.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비승비속의 나날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 자신의 영혼을 추스를 길이 없었을 때 영혼이 울고 거기서 시혼이 솟고 그 끝에 〈산문에 기대어〉가 있었다.
엊그제 폭설이 내리는데 멀리서 온 독자와 함께 선암사에 올라갔다. 일주문을 들어서다 말고 한 발은 일주문 안에 한 발은 일주문 밖에 두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승이 곧 저승이고 저승이 곧 이승인 불이문(不二門)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그 경계 허물기가 곧 산문이 아닐까. 이승과 저승을 뒤집어 놓는 체험 없이 시를 쓴다는 것은 상처가 없는 행복한 시 쓰기로 시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누이야 아는가
이 시에서 내가 쓴 그 ‘눈썹’이야말로 한의 끈적끈적한 덩어리이다. 즉, 무주고혼이다. 야산 같은 데서 이장을 하다 보면 뼈는 다 삭아 내렸는데 머리칼과 눈썹만 그 음습한 웅덩이에 고여 있음을 본다. 백발이 아니라 그것이 검은 터럭일 경우 얼마나 섬뜩하고 한에 젖어 있는 터럭들인가? 그래서 이따금 화장실 출입을 하다 수세식 좌변기에 묻어 있는 ‘털’ 하나를 보았을 때, 그 터럭은 공포의 대상이 된다. 이런 날은 오래 잠자던 불면증이 다시 겹친다.
뱃길에서 죽은 자의 혼풀이를 할 때, 무당들이 식기를 흰 띠에 매달아 물속에 처넣었다 건져 올린 후 열어 보면 거기에 들어 있는 것 역시 터럭이다. 출가할 때에는 머리를 깎는다. 땅속에서도 삭지 못하는 그 원한이 젊은 죽음일 때 이 무주고혼은 가을산 그리메에 떠도는 넋이 아니겠는가? 이 덧없는 죽음 위에 돌로 눌러서라도 복수를 하고 싶은 부활 의지, 그 부활 끝에 누이는 이제 산다화를 꺾어 나에게 스스럼없이 건네주는 생명의 인과법칙과 윤회 속에 환생하여 있음을 본다.
이 시는 바람 부는 늦가을, 기러기가 공중에 길을 내는 것만 보아도 누이(자살한 남동생)의 선험적 이미지인 눈썹(동생은 숱이 짙은 눈썹이었음)의 행방을 보게 되고, 동생의 무덤을 찾아가 술 한 잔을 나란히 따라 놓고 그가 와서 나의 빈 잔을 채워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의 넋두리는 내가 살아서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기다림의 넋풀이라 할 수 있다. 이 대화체 형식의 독백 속엔 설움이 깊게 배어 있는 재생적 의지가 짙게 깔려 있다. 이는 곧 넋풀이로서 해한이며 역동적인 생기로 피는 한의 극복 의지이다.
〈산문에 기대어〉는 제1회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당선작인데, 당시 나는 서울을 떠돌며 생존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어느 여관방에서 갱지에 갈겨쓴 채 10편을 응모했는데, 원고지에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휴지통에 넣은 것을 심사 과정에서 다시 보게 되어 당선작이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 주간으로부터 “자넨 휴지통에서 나온 시인이야”란 우스갯소리를 심심찮게 듣는다. 주소도 이름도 낯설어 그 1년 후에야 수소문 끝에 시인을 찾아내게 되었다. 197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당선작이 나의 이 시를 표절했다 하여 취소된 사건은 열병을 앓는 문학도의 주가를 엄청나게 상승시켰다. 이 시는 1966년 봄, 24세 남동생이 제대한 그 다음 날 어머니 묘소 앞에서 음독자살한 사건을 다룬 추모 형식의 엘레지다.
동생 수종(秀鍾)은 나와는 세 살 터울이다. 정확히 말해서 동생이 죽은 것은 1966년 3월 초순이었다. 제대복을 입고 허무증을 안고 돌아온 그 이튿날로 놈은 한내천 자기 어머니의 무덤이 보이는 언덕 밑에서 자살을 했다. 놈이 먹다 남은 수면제 알약들이 군복 깃을 타고 흘러 들찔레꽃처럼 아침 이슬에 젖어 하얗게 피어 있었다.
그러니 시간 망각하는 법을 배우라. 시간이 지닌 의미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도 배우라. 감상적인 기록의 모든 흔적들을 억누르고 곧 사라져 버릴 명상, 어릴 적 추억도 가을도 짓밟힌 꽃잎도 향수마저 억누르라
잊어버리기 위해서 아니 가슴 속에서 놈의 영원한 무덤을 파내 버리기 위해서 나는 오랜 세월을 짐승처럼 울면서 괴로워했다.
망각하는 것, 이것처럼 좋은 일은 없다. 내가 네 살 때 어머니는 병으로 비슬거렸고 놈은 한 살배기였다. 그는 젖도 못 먹고 자란 놈이었다. 어머니는 놈이 걸을 때쯤 늘 젖무덤에다 고춧가루를 발라 접근하는 것을 피하곤 했다. 그 대신 할머니가 미음을 끓여 먹였다.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흘러흘러……
동생과 나는 서모가 지어준 새벽 밥을 먹고 20리 길을 통학했다. 내가 3학년 때 그는 1학년이었다. 아침이 늦으면 많이 굶고 가기도 했는데 놈의 어질병은 거기서 오지 않았나 싶었다. 큰 고갯길만 해도 자시치고갯길과 송치고갯길이 가로막고 있었다. 비가 오면 질컥거리는 황톳길이었고 마차나 소달구지도 이따금 황토 수렁길에 처박히는 등 갖가지의 추억도 많다. 그때는 운동화가 없어 검정 말표 고무신을 끌고 다녔는데 어떤 날은 맨발로 고갯길을 넘기도 했다. 학교에서 신발 도둑들에게 도둑맞으면 영락없이 이 꼴이었다. 이 길은 어두웠지만 언제나 신선하게 열려 있었고 무한대의 시간이 출렁이고 있었다. 거기에는 항상 원초적인 생명력이 넘쳤고 내 유년에 해당하는 공간이며 따뜻한 신화의 불빛에 젖은 황토를 떠올리게 한다.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이 시는 1975년 등단 이후인 1978년쯤 쓴 작품이지 싶다. 제1 시집 《산문에 기대어》(1980)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신화의 불빛이 따뜻하게 열려 있는 것을 보면 이후 나의 삶은 이 불빛에서 하나의 상징기호를 얻은 셈이다. 그것은 곡선의 상법이며 황토의 길과 대숲 바람 소리, 뻘로 이루어지는 나의 시 세계와 일치한다. 치마 속으로 들어가는 그 길이 곧 어머니의 자궁이며 나의 시는 이 원형적인 자궁 속에서 탄생했다. 따라서 나의 문학은 동생의 자살이 문학적 열병을 다시 솟아나게 했고 근원적으로는 고독과 모성의 결핍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1966년 10월 16일 나는 중등학교 채용 순위고사에 합격되어 고향 언저리에 있는 영주중학교 국어 교사로 발령이 났다. 1년 만에 나주중학교 교사, 그리고 8개월 만에 이 세상 끝섬이 어딘가를 물어 초도중학교로 자원했다. 나는 이 세상 끝까지 피해 달아나고 싶었다. 동생의 자살은 이렇듯 나를 짓눌렀으며 상처로 남아 있었다.
1976년 또다시 순위고사를 보아 합격하고 발령받은 곳이 지도라는 섬의 지명중학교였는데, 이때는 어엿한 시인 교사였다. 1975년 3월경 그해 신춘문예 당선 시인들과 함께 문학사상 주최로 ‘YWCA’에서 합평회가 있었는데 그때 만난 시인이 임홍재 시인이었다. 그는 〈서울신문〉에 〈바느질〉이란 시와 〈동아일보〉에 시조 〈염전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 인연으로 1979년 그가 죽을 때까지 우리는 2백여 통의 편지를 교환했고 방학 때면 서울에 가서 만났는데 박용래 시인과도 친교를 텄다. 그가 청계천 다리에서 실족사로 죽은 후 《여성동아》에 2회에 걸쳐 편지를 공개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가 죽은 2개월 후에야 사무실에서 되돌아온 편지를 받고서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등단 이후 지금까지도 나에게는 유일한 친구라면 친구였다. 20대에 등단을 못 하고 30대 중반에 등단해서 내 나이 또래의 시인이 없는 터라 1960년대 시인들의 모임에 갈 수도 없는 어중간한 처지가 되었다. 안성농고에 세워진 그의 시비를 참배하고 오면서 서럽게 쓴 시가 있다.
장터 마당에 눈이 내린다
섬으로만 떠돌다 1980년 3월에 광주로 입성했다. 근무하던 광주여고는 5·18이 일어난 도청 옆에 있었다. 입성 2개월 후에 5·18이 일어났고 〈전남일보〉(지금의 광주일보)에 〈젊은 광장에서〉라는 복간 시를 쓴 것이 화근이 되어 계엄 당국으로부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어 광주여고 삐라 사건, 홍남순 변호사와 김지하 시인 석방 기념 YWCA 시낭송 사건 등으로 늙은 형사와 함께 똑같이 출근한 것이 무려 2년, 드디어 어느 날 하루아침에 갑자기 서광여중으로 쫓겨나는 몸이 되었다. 아직까지 〈젊은 광장에서〉라는 80여 행의 시는 시집에도 넣지 않았다. 이로부터 효광여중, 광주학생교원 연구사 등 광주시대 15년을 마감한 것이 1995년 8월 31일이었다. 교장 진급이 되지 않을 바에야 명퇴를 서두른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떠돌이병이 도져 방랑 끼를 주체하지 못했다. 제주도행을 서둘러, 평소 절친이던 현규하 시인 집에 둥지를 틀었다. 그때 낸 책이 《남도의 맛과 멋》이었는데 초당대학교 김창진 교수로부터 낯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남도의 맛과 멋》의 서설을 읽고 감동받았는데 대학의 교양국어에 한 꼭지를 싣겠다고 했다. 그리고 강의도 맡아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마침 동해 난바다 서해 뻘바다 제주 바람바다라서 제주 겨울바람을 피하고 싶어 곧 육지부로 나와 출강을 했다. 이어 광주여대, 그리고 순천대 김길수 교수가 문창과가 설립된 초창기라면서 출강을 부탁해왔다.
서재를 서귀포에서 변산 뻘밭 가인 격포로 옮겨왔다. ‘낙산일출 월명낙조’란 말처럼 변산은 노을 속에 핀 연꽃밭이었다. 수년간 음식기행을 하고 다녔던 터라 무작정 이곳이 좋아 찾아든 것이다. 양우아파트 304호실, 그곳에서 생활은 행복했다. 밥을 퍼먹는 수저통에까지 노을이 기어들어 내가 밥을 먹는지 노을을 퍼먹는지 어리벙벙하고도 황홀한 순간―그 낙조란 지는 노을이 아니라 새로운 천지 창조의 시간임을 느꼈다. 이때 제9 시집인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을 냈고, 산문집 《만다라의 바다》를 펴냈다.
너는 서해 뻘을 적시는 노을 속에
페로몬 냄새 질퍽한 뻘과 노을 속에 눈썹 날리며 살던 격포 바닷가에서 화개장터 건너편 염창마을로 서재를 옮겨 온 것은 2001년 겨울이었다. 이로부터 순천대학교 문창과 객원교수에서 정식교수로 특채된 행운을 얻어 학교에 상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난생 팔자에 없는 교수가 되고, 그것도 석박사 학위는커녕 학사 졸업장도 없는 터였으니 행운이랄밖에. “시를 쓰면 옷이 나와요, 밥이 나와요?”라고 노상 군소리를 했던 아내도 봉급 통장에 월급이 들어오니 “시도 밥 먹여 줄 때가 있네요.” 했다. 그것도 국립대학교 특채 1호 교수(해방 후 처음)라고 언론이 떠들어 댔다. 이곳에서 학교까지 거리는 40분. 격포의 노을과는 달리 섬진강의 강노을과 지리산의 산노을 또한 유정해서 이곳에서 환갑을 맞았고 2005년 8월 정년을 지나 2012년까지 무려 15년간을 학교에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광주와 격포 시대 18년, 지리산 섬진강 시대 15년이 나의 삶 전체의 절반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이곳은 나의 제2의 고향과도 다름없다. 1977년도에 섬인 지명중학교에서 육지로 상륙했던 곳이 구례중학교였고, 이곳에서 다시 1978년 섬학교인 금당중학교로 가기까지 2년을 살며 〈지리산 뻐꾹새〉 등 많은 작품을 썼던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노고단 산장 벽면에는 1976년 8월 개최했던 ‘산상시화전’ 사진이 남아 있기도 하다.
뜨거운 모래밭 구덩을 뒷발로 파며
유난히 긴 두 발바닥이 슬퍼 보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
아내의 발바닥에도 그때 본 갑골문자들이 수두룩하였다
그녀는 성모병원 20층 무균실에서 투병을 끝내고 엘칸토 후원으로 선물 받은 환자용 구두를 신고 마침내 맨발을 가린 채 뚜벅뚜벅 지상으로 걸어 내려왔다. 아내는 10년 투병 끝에도 비실거리며 집을 사서 들어간다는 말을 또 이렇게 말한다. “시가 집을 사 줄 때도 있네요.”라고.
이제 나의 삶도 저물어간다. 벌써 7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삶도 문학도 팔자런가 싶다.
사랑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자
송수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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