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국
―아내에게
최영철
참 염치없는 소망이지만
다음 생애 딱 한번만이라도 그대 다시 만나
온갖 감언이설로
내가 그대의 아내였으면 합니다
그대 입맛에 맞게 간을 하고
그대 기쁘도록 분을 바르고
그대 자꾸 술 마시고 엇나갈 때마다
쌍심지 켜고 바가지도 긁었음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의 그대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고맙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아이 둘 온 기력을 뺏어 달아난
쭈글쭈글한 배를 안고
골목 저편 오는 식솔들을 기다리며
더운 쑥국을 끓였으면 합니다
끓는 물 넘쳐 흘러
내가 그대의 쓰린 속 어루만지는
쑥국이었으면 합니다
―시집『찔러본다』(문학과지성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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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위한 노래 사부곡(思婦曲)
어머니를 노래한 시, 연인들을 노래한 시는 많아도 아내를 노래한 시는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하던 중 뒤늦게 아내를 노래한 시를 모아놓은 시집 한 권을 보았습니다. 2006년 열음사에서 나온 '하늘연인' 이라는 시집입니다. 이 선집을 엮은 조명숙 소설가는 위의 시 아내에게 부제가 붙은 쑥국을 쓴 최영철 시인의 아내라고 합니다. 이 선집에는 64편의 시가 실려있는데 모두가 다 아내를 노래한 시는 아니고 아내가 아닌 시적 대상을 향한 은근하고 깊은 사랑을 드러낸 시도 함께 실었다고 합니다.
당나라 시인 원진은 바다의 장관을 본 사람은 강물 따위는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觀于海者難爲) 했는데 아내를 본 다음부터는 다른 여자를 눈에 두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선집에는 실려있지 않지만 사부곡(思婦曲) 시를 쓴 원로 시인 중견 시인들도 여럿 있습니다.
김춘수 시인은 먼저간 아내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며 쓴 시 강우(降雨)는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짠하게 합니다. 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어디로 갔나,/밥상은 차려 놓고 어디로 갔나,/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코를 맵싸하게 하는데/어디로 갔나,/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되돌아온다./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아니/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나는 풀이 죽는다./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 송수권 시인도 보험설계사로 일하며 시인의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백혈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아내의 발을 보고‘아내의 맨발 ―蓮葉(연엽)에게’라는 시를 썼습니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아내의 뒤를 따라 간 서정주 시인도 '내 아내' 라는 제목으로 사부곡(思婦曲) 시를 썼습니다.
김상옥 시인은 60년을 같이 살아 온 아내가 사망을 하자 나에게 더 이상 곡기를 권하지 말라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닷새만에 아내의 뒤를 따라 갔다고 합니다. 김상옥 시인은 전람회에 갔다가 다리를 다친 후 15년간 휠체어에 의지해 왔는데 아내는 자기 뼈가 부러진 줄도 모르고 극진히 정성으로 시인을 보살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상심도 크고 조강지처에 대한 미안함도 무척 컸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시대에 따라 언어 또한 생성되고 소멸되지만 '조강지처' 라는 말이 이제는 용도 폐기될 정도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 되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부한 시대에 태어난 요즘 젊은 세대들은 그렇지 않지만 우리의 어머니들은 가난한 살림에서도 남편을 웃어른 모시듯이 지극 정성으로 떠받들고 보살폈습니다. 반찬을 만들 때도 자기는 매운 것을 싫어하지만 남편이 좋아하면 맵게 만들고 생선 굽는 냄새가 싫어도 남편이 좋아하면 굽고 지져서 상에 올렸으며, 밀컷 음식이 소화가 안돼 싫지만 남편이 좋아하면 귀찮아도 기꺼이 멸치로 국물을 우려내고 고명을 만들어서 수제비를 만들고 국수를 삶았습니다.
시 속의 화자도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참 염치가 없지만 다음 생애에 다시 그대를 만나 그대의 아내가 되어 그대 입맛에 맞는 간을 해 주고 싶다고 합니다. 마시는 말라는 술을 자꾸 많이 먹는 남편을 둔 여자의 속앓이를 앓아보고 싶다고 하며 아내의 쓰린 속 어루만지는 쑥국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 한때 개콘에서 '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어' 라는 말이 유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아내가 되지 않고서 아내의 앓는 속앓이를 다 알 수 없기에 다음 생은 서로 바꾸어서 살아보자고 합니다.
언젠가 부부모임에서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아내, 지금의 남편과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몇몇은 우물쭈물하고 한 두 사람은 슬금슬금 옆지기의 눈치를 보면서 어정쩡하게 그런다고 하고 또 어떤 부부는 아내가 '그래도 살지 뭐' 했는데 남편은 자기는 한번 살아봤으면 됐지 다음 생에는 다른 여자를 만나 살아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후문에 의하면 그 남자 집에 돌아가서 아내에게 혼쭐이 났다고 합니다.
저도 이 글을 쓰면서 일상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아내를 힘들게 하고 소홀하게 대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에 옆에 있는 아내를 물끄러미 한번 쳐다봅니다. 나의 의중을 모르는 아내는 눈과 눈이 조우를 하자 영문도 모르고 내가 웃으니 따라 웃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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