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주 시집 <속죄양, 유다> | ||||||||||||||||||
참혹하게 아름다운 몰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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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에의 사랑 네 몰락이 내 가슴을 흔든다. 「나는 아니야」 혼자말로 외치면서 몰락이여, 내 가슴을 흔들어라 어떻게 해야 하나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이연주(1953~1992)
1991년 가을에 시인이 되고 1992년 10월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고시집을 포함해서 시집은 단 두 권. 이것이 시인 이연주의 이력이다. 단순하다 못해 텅 비어 있다. 디테일이 결여된 삶의 무채색. 하지만 아득한 빙하에 집중되는 풍경이 오히려 전체를 향해 맹렬히 뻗어 가는 것처럼, 시인의 삶은 오로지 시를 향해 열려버린 듯하다. 시인의 죽음이 확실하면 확실할수록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의미들은 더욱 불가해하다. 그가 택한 죽음의 방식 때문이 아니다. ‘시’를 ‘죽음’과 맞바꿔버린 그 도저한 정신 때문이다. 죽기 직전 시인은 한 권의 시집을 정리해 출판사에 넘겼다. 아니다! 이 문장은 곧 ‘시인은 한 권의 시집을 출판사에 넘기고 죽었다.’로 수정될 것이다. 전자는 죽음의 우연성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죽음의 필연성 내지는 이미 ‘계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때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 더 진실에 다가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등단하자마자 시인은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을 출판한다. 제목도 그러하지만 시가 몹시 불편했기 때문에, 실제로 매춘녀일지 모른다는 해괴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그렇다면 이상은 까마귀일 것이다). 그렇게 1년을 살면서, 시인은 한 권 분량의 원고를 더 썼다. “바람이 죽은 날들을 닦았다./ 나는 혼신을 다해/ 촛대 위로 올랐다// 불을 그어다오”(〈終身〉)이 계속 마음에 걸렸지만, 시들을 정리하고, 모아서 출판사에 넘겼다. 1992년 10월, 시인은 어느 잡지사로 향한다. 더디게 지나가는 가을에 맞서 시인의 마지막 이틀이 역주행하는 기차처럼 엄청난 속도로 지나가고 있음을 시인은 분명히 알고 있다. 이틀 후 시인은 ‘한 켤레의 벗어놓은 구두’처럼 삶의 바깥으로 내던져질 것이다. 시인은 이경호 평론가와 함께 자신의 작품(그녀가 살아서 볼 수 있었던 마지막 다섯 편의 시였다)이 실린 잡지를 받으러 갔다가, 잡지 표지가 마음에 쏙 든다고 말했다. 표지에는 한 켤레의 벗어놓은 구두가 있었는데, 보라색에 가까운 바탕에 비대칭적으로 너무 큰 구두였다. 평론가에게는 어색하기만 한 구두 이미지는 무슨 이유로 시인을 사로잡았을까. 훗날 김정란 시인이 “피곤에 지쳐 너덜너덜 떨어진 구두 두 짝이 이연주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른다”고 말했던 것처럼, 구두 속의 텅 비고 갈라진 보랏빛 어둠은 너무나 분명한 이미지다. 나는 죽음에 무방비상태로 내맡겨진 시인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표지를 물끄러미, 한참을 바라보던 시인은 구두를 벗어 놓고 사라져 버린 발목이 궁금했다. 시인의 의식을 지배했던 ‘죽음’이, 시인이 꾹꾹 눌러 담았던 ‘충동’이, 구두의 텅 빈 입구에서 보였기 때문일까. 그리고 시인은 “나의 죽음이 통속적인 화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남겨진 시들로 평가되길 바란다”는 내용의 유서를 썼다. 시인은 죽었고, 벽제에서 흰 가루가 되었다. 그 이듬해인 1993년 두 번째 시집이자 유고시집인 《속죄양, 유다》가 출간되었고, 시인은 예의 데스마스크처럼 검은 배경에 얼굴만 찍힌 표지로 남게 된다(아이러니하게도 첫 시집과 동일한 사진이다). “자기 마음대로 될 수 없는 게 인생이라면 죽음만이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해야” 한다고 자주 말했던 것을 미뤄보면(박미희), 그는 ‘죽음’만큼은 자신에게 고유한 무엇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시인이 시를 죽음과 바꾸면서까지 간절하게 말하고 싶어 했던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시인이 죽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이에 대한 대답도 마찬가지다. 다만, 시인이 기지촌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매춘 여성의 궁벽하고 허기진 삶에 넌더리가 났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오로지 성기만 살아 움직일 수 있는 몸뚱이, ‘푸줏간의 고깃덩어리’처럼 어떤 감정도 삭제된 여성의 비참을 보는 것은, 또한 그러한 삶에 동화되어 시를 쓰는 것은 보통의 의지로는 감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삶의 가장 부패한 형상들이나 어두운 도시의 골목길을 절망적인 눈짓으로 응시하려 했던 시인의 자취가 시집 곳곳에 고스란히 박혀 있다. 이쯤에서 고백하자. 나는 이연주 시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아니, 지금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잃어버린 시간’을 뒤쫓는 슬픈 존재라는 것은 안다. 성취하고자 노력했던 것과 성취된 것 사이의 괴리, 이 불완전한 타자의 삶에 지극한 관심과 애정으로 사연을 엿보는 일은 아프다. 때로 인간은 삶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하여 온몸으로 밀고 가는 극단을 선택하기도 한다. 스스로 자신의 삶에 칼금을 그은 그녀가 떠난 빈방처럼 남아 있는 시집, 사진의 바깥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지독히 인간적인 통증으로부터 피어난 ‘예술혼’. 이 거대한 세계에서 외투 하나 없이 철저하게 맞선 삶의 흔적이 아찔하다. 니체는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 나는 사랑하노라”라고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말했다. 나 또한 그녀에게 참을 수 없이 깊은 연민을 느낀다. 절망의 세계에서 벗어나기를 끝끝내 거부한 채 죽음을 맞이한 이연주의 삶은 그녀 자신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아픈 상처이다. 이재복 평론가는 “피고름을 흘리는 몸을 보면 그것이 속죄양, 유다의 회한을 닮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읽어낸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녀는 우리를 대신해 ‘속죄양’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생명이 누구도 예외 없이 건너야 할 죽음이지만 너무 이른 죽음 앞에서 마음이 욱신거린다. 여기, 시집이 놓여 있다. 가장 처절하게 잔혹한 세계의 진창을 온몸으로 껴안은 시인이, 죽은 채 살아 있는 방식으로. 이쯤에서,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최서진 thinkpoem@daum.net / 시인. 2004년 《심상》으로 등단. |
<유심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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