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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묵 - 구두를 벗다 / 밤 외출 / 땅의 문 / 키워드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5. 1. 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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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두를 벗다


  최은묵

 


  수염은 뭔가 말을 하려고 밤새 입 주변에서 자랐다 아이는 면도기 속에 수염을 먹고 사는 곤충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전기면도기 보호망 속에서 먼저 살았던 부스러기들을 하수구에 털어낸다


   어제 짐을 싸던 손에 청하던 김 과장의 악수는 어색했고, 오늘 구두 대신 아내 몰래 신은 운동화 밑창이 그러하다

 

   발바닥이 낯설다 버스정류장은 운동화로 바뀐 걸음을 알아보지 못했다 정류장을 지나 전에는 열려있었을 하천을 걸었다


   굴속을 흐르던 아침이 한꺼번에 입 냄새를 쏟아내는 복개가 끝난 하천 수풀 옆

   은밀히 따뜻했을, 버려진 좌변기가 더럭 구멍 난 옆구리로 방귀를 뿜는 중년의 끝자락


   살을 비집고 나온 수염이 말을 한다 아내가 듣기 전에 전기면도기에 살고 있는 곤충이 토독토독 수염을 먹어치운다

 

 


《2007년 제9회 수주문학상 대상 수상작》

 

 

 

<한국예총부천지회 - 제9회 수주문학상 당선작>

http://www.artbucheon.com/bbs/view.asp?bbs=board3&idx=277&re_level=0&re_step=0&ref=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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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두를 벗다

 
   최은묵

  

 

   수염은 뭔가 말을 하려고 밤새 입 주변에서 자랐다 아이는 면도기 속에 수염을 먹고 사는 곤충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전기면도기 보호망 속에서 먼저 살았던 부스러기들을 하수구에 털어낸다


   어제 짐을 싸던 손에 청하던 김 과장의 악수는 어색했고, 오늘 구두 대신 아내 몰래 신은 운동화 밑창이 그러하다


   발바닥이 낯설다 버스 정류장은 운동화로 바뀐 걸음을 알아보지 못했다 정류장을 지나 전에는 열려 있었을 하천을 걸었다


   굴속을 흐르던 아침이 한꺼번에 입 냄새를 쏟아내는 복개가 끝난 하천 수풀 옆

   은밀히 따뜻했을, 버려진 좌변기가 더럭 구멍 난 옆구리로 방귀를 뿜는 중년의 끝자락

 
   살을 비집고 나온 수염이 말을 한다 아내가 듣기 전에 전기면도기에 살고 있는 곤충이 토독토독 수염을 먹어치운다

 

 


―시집『괜찮아』(푸른사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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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천강문학상 대상 수상작>

 

 

 

밤 외출


최은묵

 


문 없는 방
이 독특한 공간에서 밤마다 나는
벽에 문을 그린다
손잡이를 당기면 문이 열리고 밖은 아직 까만 평면
입구부터 길을 만들어 떠나는
한밤의 외출이다
밤에만 살아 움직이는 길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문을 닫고 잠들었다
나도 엄마 등에서 잠든 적이 많았다
엄마 냄새를 맡으면 업혀 걷던 시절엔
갈림길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어
나의 발은 늘 여유로웠다
어둠에서 꿈틀대는 벽화는 불면증의 사생아
내가 그린 길 위에서 걸음은 몹시 흔들렸다
걸음을 디딜수록 길은 많아졌고
엄마 등에서 내려온 후로
모든 길에는 냄새가 있다는 걸 알았다
열린 벽, 문 앞에 멈춰 냄새를 맡는다
미리 그려둔 여름 길섶
펄럭 코끝에 일렁이는 어릴 적 낯익은 냄새
오늘은 그만 걷고 여기 가만히 누워
별을 그리다 잠들 수 있겠다
하늘에 업힌 밤
오랜만에 두 발이 여유롭다

 

 

 

<2012년 제4회『천강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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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의 문

 
   최은묵
 

 

   터진 신발 밑창에서 땅과 연결된 문을 발견했다

   발을 움직이자 나무뿌리 틈으로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지냈으니 눌린 것들의 소란은 도무지 위로 오르지 못했던 거다

 
   나무 밑동이 전해주는 야사(野史)나, 자식들 몰래 내뱉는 어머니의 한숨, 대개 이런 소리들은 바닥으로 깔리는데

 
   누워야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퇴적층의 화석처럼 생생하게 굳어버린,

   이따금, 죽음을 맞는 돼지의 비명처럼 높이 솟구치는,

   발자국을 잃고 주저앉은 소리들

 
   소나무는 자신이 들은 소리를 잎으로 콕콕 찍어 땅 속에 저장하고

   땅에 발자국 한 번 남기지 못한 채 지워진 태아는 소리의 젖을 먹고 나무가 된다는 걸, 당신은 알까

 
   낡은 라디오 잡음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 뿌리 곁에

   밑창 터진 신발을 내려놓았다

   서서히 땅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오래된 소리들을 다 비워낸 문은 새로운 이야기로 층층이 굳어지고

   나무들은 땅 속에 입을 둔 채 소리들의 발자국으로 배를 채울 것이다

 

 

 

ㅡ계간『시산맥』(2013. 겨울)

[2013년 제4회 시산맥 작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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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최은묵

   

 

죽은 우물을 건져냈다 

 

우물을 뒤집어 살을 바르는 동안 부식되지 않은 갈까마귀 떼가 땅으로 내려왔다 

 

두레박으로 소문을 나눠 마신 자들이 전염병에 걸린

거목의 마을 

 

레드우드 꼭대기로 안개가 핀다, 안개는 흰개미가 밤새 그린 지하의 지도 

 

아이를 안은 채 굳은 여자의 왼발이 길의 끝이었다

   

끊긴 길마다 우물이 피어났다, 여자의 눈물을 성수라 믿는 사람들이 물통을 든 채 말라가고 있었다 

 

잎 떨어진 계절마다 배설을 끝낸 평면들이 지하를 채워 나갔다

   

부풀지 못한 뼈들을 눕혀 물기을 만들면 사람들의 발목에도 실뿌리가 자랄까 

 

안개가 사라진다 흰개미가 입구를 닫을 시간이다 

 

우물은 떠나지 못한 자의 피부다

 

   

 

[201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1967년 대전  출생 ▲충남대 기계설계공학  전공 ▲현 소속 M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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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묵 시인

 

1967년 대전에서 출생하여 2007년 [월간문학]신인작품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제9회 수주문학상 대상, 제4회 천강문학상 대상, 2013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수혜, 제4회

시산맥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