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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무슨 시?
이승훈
더워 죽겠는데 거실 전화 소리가 시끄러워 “전화 그만 해요!” 아내에게 화도 못 내고 참는 건 부처님이 참으라고 해서 참는 거야. 문을 닫고 고물 선풍기 틀고 반바지 입고 앉아 시를 쓰네. 모두 버리면 돼! 버리면 돼! 버리면 안 돼? 버리면 안 돼? 오전엔 약국 가려고 길을 건너다 갑자기 어지러워 걸을 수 없었지. 왼 발 바른 발이 따로 노는 거야. 코를 손에 박고 계단을 올라갔지.
사는 건 뒤죽박죽 시도 뒤죽박죽 밥도 뒤죽박죽이다. 콩나물국 먼저 먹고 두부 먹고 밥 한 숟갈 뜨고 천정 보고 “하하 나 밥 먹어!” 말해도 되고 열무김치 먼저 먹고 두부 먹어도 된다. 무슨 순서가 있는가? 밥 먹고 두부 먹어도 되고 두부 먹고 밥 먹어도 되네. 부처님도 이랬다 저랬다 하잖아?
오늘은 책들도 뒤죽박죽 재떨이도 뒤죽박죽이다. “책 한 권 찾아와!” “책 이름이 뭡니까?”“책 이름이 어딨어? 이 미련한 놈아! 그게 그거야.” 스님은 말씀하시고 난 서가에서 아무 책이나 한 권 뽑아 드렸지. 신문도 뒤죽박죽이야. 사설 읽고 정치면 사회면 읽어도 되지만 사회면 읽고 사설 읽어도 된다. 난 일기예보 오늘의 운세 먼저 읽는다. 빌어먹을 무슨 시? 뒤죽박죽이 진리다. 그래서 좋다.
―계간『시와 세계』(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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