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고 -수필

임시로 죽은 사람의 묘비명/이창기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5. 8. 13.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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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로 죽은 사람의 묘비명

 

  이창기

 

 

   그는 태어나면서 임시로 기저귀를 찼다. 그 뒤 임시로 어딘가에 맡겨졌다가 임시 학교를 다녔다. 임시 공휴일에 임시 열차를 타고 임시 일자리를 구했다. 임시 숙소에서 임시반장의 통제를 받으며 임시로 맡겨진 일을 했다. 옷장 하나 없이 물주전자와 물컵, 잘 마른 얇은 수건 한 장이 전부인 구석진 여인숙 방을 좋아했던 그는 재건축 임대아파트 공사장에서 임시로 설치한 전선에 발이 걸려 떨어져 죽었다.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던 사과의 인사도 건넬 시간도 없었다. 사는 동안 항상 외로웠지만, 그는 영원히 살 사람들을 위해 일했고, 영원히 살 사람들을 사랑했다.

 

 

 

시집착한 애인은 없다네(창비, 2014)

 

 

 

  이 시를 보다가 고정희 시인의 시 한 편이 생각났다. 밥과 자본주의편 죽은 자들의 대리석 빌리지 풍경이라는 제목의 시인데 이렇게 시작이 된다.

 

   "(검게 광나는 리무진을 타고 지금 막 죽은 자의 시신이 운구되고 있는 마닐라 중국인 묘지 입구, 그 뒤로 벤츠와 캐딜락을 탄 조객들이 천천히 뒤따른다. 그러나 이곳에 봉분은 없다. 다만 거대한 대리석 빌리지가 있을 뿐, 간간이 남자들이 얼씬거린다. 어린이와 임신한 여자가 살지 않는다는 이 기묘한 마을에 한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댄다.)"

 

  백오십 평이 넘는 대형주택으로 망령들을 위한 응접실, 위패가 안치된 방 뿐 아니라 상식을 지어 올리는 식당에 성능 좋은 에어컨, 수세식 화장실과 목욕탕이 구비돼 있는데 산목숨 대여섯이 죽은 자의 경비를 철저하게 서고 있다. 이 빌리지가 이른바 재벌망자들의 유택이라는 것이데 돈이면 죽어서도 호화생활을 한다는 자본주의 행패의 권능을 꼬집은 시이다.

 

   시를 읽어보면 이 호화주택단지 유택은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내세 종교를 믿지 않은 불경한 사람의 못 미치는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더 편하고 영생불멸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죽음은 때가 되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공평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한 가난한 노동자의 일생이 함축돼 있는 이창기 시인의 임시로 죽은 사람의 묘비명은 이 세상의 내 것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실 세상의 것이 내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모든 것은 살아 있는 동안 잠시 빌려 쓰는 것이고 임시로 사용을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의 기저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패러독스이고 역설이다. 시에서 말하는 영원히 살 사람들이 누구겠는가. 정말로 영원히 살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을 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