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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신달자 - 카톡 좋은 시 298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6. 6. 25.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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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톡 좋은 시 298 - 신달자 / 등잔



등잔

신달자(1943)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시집아버지의 빛(문학세계사. 1999)




방울소리


이수익

 

 

청계천 7가 골동품 가게에서
나는어느 황소 목에 걸렸던 방울을
하나 샀다.


그 영롱한 소리의 방울을 딸랑거리던
소는 이미 이승의 짐승이 아니지만,
나는 소를 몰고 여름 해질녘 하산(下山)하던
그날의 소년이 되어, 배고픈 저녁 연기 피어오르는
마을로 터덜터덜 걸어 내려왔다.

 

장사치들의 흥정이 떠들썩한 문명의
골목에선 지금, 삼륜차가 울려대는 경적이
저자바닥에 따가운데
내가 몰고가는 소의 딸랑이는 방울소리는
돌담 너머 옥분이네 안방에
들릴까 말까,
사립문 밖에 나와 날 기다리며 섰을
누나의 귀에는 들릴까 말까.

 



(『단순한 기쁨』.고려원. 198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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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

 

신달자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었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시집아버지의 빛(문학세계사. 1999)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문학과지성사, 2007)

일간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동아일보, 20160617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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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한 국자


이사랑
 

 

황학동 시장에서 봄을 기다리며

자판기 커피 한잔으로 마음 데우는데

노인이 가지런히 늘어놓은 물건 중에

오랜 세월 나를 기다렸다는 듯 낡은 박달나무 국자 하나가

내 품에 뛰어듭니다

온기가 느껴집니다

수백 년 전 그 나무 스치던 바람 소리가 들립니다

우묵한 몸

얼마나 많은 것들을 퍼 주었나

뜨겁고 차가운 것에 트고 갈라진 입술로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누가 별국자를

저 하늘에 걸어 놓았을까요?

물음표 닮은 국자는 영원한 수수께끼입니다

한평생 자식들에게 남김없이 퍼주고 담아주고

빈 국자로 남은

김국자 내 어머니,

간장종지만한 내 그릇 너무 작아서

늘 넘쳐흘렀을 눈물 한 국자

늦은 밤 부엌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월간우리 (2009년 11월호 - 신작 소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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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

 

도종환

 

 

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

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

심지만 뽑아 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

그을음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하랴

욕심으로 나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

 

결국은 심지만 못쓰게 되고 마는데

들기름 콩기름 더 많이 넣지 않아서

방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다

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 넉넉하기 때문이다

넘치면 나를 태우고

소나무 등잔 대 쓰러뜨리고

창호지와 문설주 불사르기 때문이다

 

욕심 부리지 않으면

은은히 밝은 내 마음의 등잔이여

분에 넘치지 않으면 법구경 한 권

거뜬히 읽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의 빛이여

 

    

 

시집부드러운 직선(창비,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