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화제 고르기 / 2005-12-02
☺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상대를 가장 잘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시를 사랑한다는 것도…
자아, 담화의 목적과 장르의 관계를 알아봤으니, 이제 좀 더 범위를 좁혀 시의 화제에는 어떤 유형이 있고, 그런 유형을 선택할 경우 시의 특질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알아보기로 합시다.
앞에서 시의 화제는 현재 이 순간의 느낌이나 상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 같은 느낌과 상상이라고 해도 무엇에 관한 느낌이고 상상한 것이냐에 따라 작품의 특질이 달라집니다. 러시아 구조주의(構造主義) 언어학자인 야콥슨(R. Jakobson)은 이와 같은 화제의 유형을 지향성(志向性)에 따라 <화자(話者) 지향형>, <청자(聽者) 지향형>, <화제(話題) 지향형>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향한 이야기냐에 따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종합형인 <극적(劇的) 지향형>을 더 추가시키고 싶습니다. 내가 주로 이야기하지만, 나에 관한 생각, 너에 관한 생각, 그리고 그에 대한 생각을 같이 이야기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향성에 따른 시의 화제는 <내가 생각하는 나에 대한 느낌이나 상상>, <내가 생각하는 너에 느낌이나 상상>, <내가 생각하는 그에 대한 느낌이나 상상>, <내가 생각하는 나․너․그에 대한 느낌이나 상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런 화제를 택할 경우 어떤 시적 특질이 발생하는가 알아보기로 합시다.
■ 화자 지향형
화자 지향형은 <나>에 관한 이야기로서, <내 생각은 이렇다>라든가, <나는 이렇게 할 생각이다>와 같이 자기 느낌이나 생각,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계획과 각오 등을 이야기하는 유형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유형의 화제를 <1인칭 지향형>이라고도 부릅니다.
다음 작품은 이런 지향성(志向性)을 택한 예에 해당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千祥炳), 「귀천(歸天):주일(主日)」 전문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은 자기가 죽어 저 세상으로 가는 날, 그래도 지상의 삶은 ‘아름다웠다’고 말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이와 같은 화자지향형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시의 화제로 채택해온 것이라서, 시로 쓰기가 비교적 쉽습니다. 우리가 시를 쓰는 목적은 가슴 속에서 들끓는 감정이나 형이상학적 고뇌를 토로하기 위해서이고, 자기 감정은 누구보다 잘 알아 아주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점만 지닌 게 아닙니다. 누구나 흔히 택하는 화제라서 낡았다는 인상을 주기가 쉽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갖게 된 동기를 말하기 위해 과거나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그 때가 좋았다는 식으로 말해 회고적(回顧的)・영탄적(詠嘆的)․감상적(感傷的) 색채를 띄기 쉽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좋은 것만 기억하고, 힘들었던 과거도 예찬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 유형을 택할 경우, 독자들에게 자기 심정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평범하게 말할 것도 강조하여 격앙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자기 말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배경이나 상황을 그리지 않아 구조적으로 불안정한 작품이 되기 쉽습니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진지한 고뇌와 열정을 다룬 낭만주의 시가 뒷전으로 물러난 것도 이런 약점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화제를 골랐을 때는 되도록 담담하게 말하면서 사물들의 모습을 고루 그려 줘야 합니다.
■ 청자 지향형
청자 지향형은 <너>에 대한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유형으로서, <너는 이렇게 했느냐?>라든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의문・명령・애원・요청・호소의 성격을 지닌 화제를 말합니다. 그리고 <너>는 특정한 개인만이 아니라, 어떤 집단(集團)이나 사회적 관습(慣習)과 제도(制度)인 경우도 있습니다.
다음 작품은 이런 화제를 택한 예에 해당합니다.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에서
이 작품의 ‘껍데기’는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4월’로 상징되는, 그러니까 민주 정신에 위배되는 사람들과 제도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청자 지향형은 신에 대한 기도, 전쟁에 나가는 용사들을 격려하기 위한 노래, 지도자나 연인에게 바치는 헌시(獻詩)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서 서정시의 원형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사로운 감정을 표현하려는 화자 지향형은 어느 정도 문화가 발전된 뒤에 탄생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화자 지향형을 택할 때처럼 비교적 쓰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대상을 <나> 대신 <너>로 삼지만 화자 지향형과 마찬가지로 시인의 감정과 판단을 이야기하고, 자기의 도덕성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를 단순하게 만들기 쉽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상대가 내 요구를 들어주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선 : 악>, <의 : 불>와 같은 이분법으로 나누어 어느 한 쪽을 택하고, 표현 역시 단순화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 화자 지향형과 마찬가지로 자기 주장을 강화시키기 위해 격앙된 어조를 취하고, 시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의 모습을 추상화시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화자 지향형과 마찬가지로 되도록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 화제 지향형
화제 지향형은 <내가 본 그 사람(그것)은 이렇다>라는 식의 유형을 말합니다. 이 유형을 <3인칭 지향형>이라고도 부르는 것도 이와 같이 <그>나 <그것>같이 제3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작품이 이런 예에 속합니다.
햇살은 모두
둑 밑에 내려와 있다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강바람이
분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시골 청년
자전거 바퀴 살에
햇살이 실려서
돌아간다
그 바퀴 살 사이로
투명한
강
얼마쯤 걸었을까
미루나무도 가고 있는지……
미루나무는 조금씩 작아져 갔다
- 한성기(韓性祺), 「둑길·1」 전문
과거에 이런 유형의 화제는 산문, 특히 교술에서 즐겨 택해왔습니다. 교술의 유형을 <서정적 수필>, <서사적 수필>, <분석적 수필>로 나눌 경우 첫 번째 유형인 서정적 수필에서 즐겨 택하던 화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로 접어들어 이 유형을 시에서 받아들인 것은, 화자 지향형이나 청자 지향형과 달리 한결 감정을 억제하면서 시인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입니다.
이런 유형을 택하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의 모습을 고루 부각시키기가 용이합니다. 그러나 시인 입장에서 보면 하고 싶은 말을 참고 풍경을 통해 말해야 하기 때문에 답답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독자도 시인이 왜 이런 풍경만 제시하는가 궁금해합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 연에서 ‘청년’과 ‘강’과 ‘미루나무’를 뒤에 두고 한없이 걸어가는 시인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은, 모든 것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자신의 감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화제를 택했을 때는 풍경을 통해 말하는 방법과 테마에 관계되는 풍경만 그려 나머지를 생략해야 합니다.
■ 극적 지향형
극적 지향형 역시 화제 지향형과 마찬가지로 산문에서 즐겨 택하던 화제로서, 장면(정보)을 보여주고 청자 스스로 판단을 내리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제 지향형은 화자 혼자 이야기하는 반면에, 극적 지향형은 화자가 주로 이야기하되 청자가 간혹 개입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다음 작품이 이런 예에 해당합니다.
거리에서 우연히 아내를 만난다.
나는 일부러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
아내는 등 뒤에서
「여보, 여보!」하고 쫓아온다.
그래도 나는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어째서 저 여자가 내 아내란 말인가?)
저녁상을 가운데 놓고 아내와 마주 앉았다.
갑자기 서베이어 1호처럼
난데없이 사뿐히 착륙하는 얼굴.
「바로 저 얼굴이다!」
「뭐가 저 얼굴이예요?」
「아니, 서베이어 1호의 달 연착(軟着) 말이야」
이제는
신비의 베일도 벗겨지고
대재벌(大財閥)의 몰락처럼 쓸쓸한 얼굴
달.
- 김윤성(金潤成), 「아내의 얼굴」 전문
화자는 거리에서 아내를 만나고도 모른 척하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여보, 여보!’하며 쫓아오고, 화자는 ‘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어째서 저 여자가 내 아내란 말인가?’ 독백합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아내의 얼굴이 ‘서베이어 1호’가 착륙한 달처럼 신비감이 사라졌다고 독백하자 아내가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묻고, 화자는 인공 위성 이야기를 했다고 둘러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앞의 유형들과는 달리 청자도 담화의 표면 직접 등장하여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런 유형은 종래의 시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것이라서 새롭게 보인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자 지향형의 의미부여 기능, 청자 지향형의 요구와 명령 기능, 화제 지향형의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기능을 모두 이용할 수 있어 작중의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기가 용이할 뿐만 아니라, 화자가 직접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방식을 택하기 때문에 작품이 한결 담담해진다는 게 장점입니다.
그러나, 시의 생명인 간결성(簡潔性)과 압축성(壓縮性)이 떨어지고, 산문처럼 길어지며, 초점이 분산되기 쉽고, 화제 지향처럼 시인이 간접적으로 말해야 한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앞의 작품이 현실감이 풍부하면서도 산문 냄새가 나는 것은 이런 약점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유형의 화제를 골랐을 때는 어떻게 하면 보다 간결하게 말하고, 말하지 않아도 시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시의 화제는 <청자 지향형 → 화자 지향형
→ 화제 지향형 → 극적 지향형>으로 바뀌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장단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화제가 떠올랐을 경우 특정한 지향으로 바꾸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기가 꼭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 다음 그에 따라 결정하고, 그런 지향성이 지니고 있는 약점이 무엇인가를 파악하여 보완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할 일】
○ 각 지향성의 장단점을 시작 노트에 정리해 두십시오.
○ 이제까지 쓴 자기 작품이나 좋아하는 작품의 제목을 적고 어떤 지향성을 택했는가를 살핀 다음 자기 화제의 경향을 알아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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