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우리 말♠문학 자료♠작가 대담

3 대가(大家)가 되기 위해/윤석산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6. 12. 21.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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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가(大家)가 되기 위해 / 작성일 : 2005-11-28 08

☺ 제가 유럽에 갔을 때 가장 고통받은 것은 지도를 읽을 줄 모른다는 거였습니다…

이 장을 읽기 시작한 걸 보니 끝까지 쓰실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대가(大家)가 되어 문학사에 길이 남는 방법을 말씀드리지요. 이왕 내 말을 믿고 따라 나선 분들이니 잠시 쓰다 사라지는 시인이 아니라 천년 만년 영원히 살아남는 시인이 되도록 돕는 게 제 도리일 테니까요.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장차 우리가 활동할 문학사회(文學社會)의 구조와 변모 방향, 그런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 관리와 혁신 방법을 알아봐야 합니다.

■ 문학사회의 구조
문학사회는 <시인-작품-독자>로 짜여집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생산자(生産者)>, 독자는 <소비자(消費者)>, 시인들은 결코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을 테지만 작품이라는 <상품(商品)>을 주고받는 데가 문학사회입니다.
그런데 문학사회의 인적(人的) 단위는 생산자와 소비자로만 짜여지는 게 아닙니다. 상품을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중개자(仲介者)>가 있습니다. 예컨대, 출판사, 서점, 비평가, 신문이나 방송 같은 언론 매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인적 단위를 중심으로 따질 경우에는 <시인-중개자-독자>로 짜여져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 가운데 순수한 사람들은 시인들뿐입니다. 독자 역시 순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까다롭고 변덕스로운 집단입니다. 자기 취향에 맞지 않으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취향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헤아리기 어렵고, 언론과 문학사회의 엘리트들이 좋은 작품이라고 하면 확인하지도 않고 따라서 떠드는 사람들이 독자들입니다.
중개자들은 아주 이기적이고 영악한 집단입니다. 모두가 문화발전을 위해서라고 떠들고 있지만 자기들의 이익에 배치될 때는 똘똘 뭉쳐 시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들이 애써 쓴 작품의 가치를 왜곡하는 집단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출판사는 편집위원과 편집부 직원과 디자이너 등을 고용해야 하고, 그들을 통해 편집한 책은 인쇄소로 넘어가고, 인쇄소에서는 원색화보를 제판하고, 종이와 인쇄용 잉크를 사들이고, 인쇄기를 돌리고, 영세한 곳은 그렇게 인쇄한 걸 다시 제본소로 넘기고 …,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책이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책은 다시 서적상을 거쳐 전국 서점에 배본됩니다. 그리고 서점에서는 책꽂이 크기와 위치가 직원들의 봉급과 임대료를 마련하는 장치이기 때문에 잘 팔리는 책은 독자들의 눈에 잘 띄는 곳에 꽂고, 팔리지 않을 책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창고에 쌓아두었다가 착불(着拂)로 반품하고, 팔려도 직원의 봉급과 서점 임대료를 우선 제외하고 남은 돈으로 지불하기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아니면 출판사 영업부 직원이 쫓아와야 겨우 어음으로 지불하는 게 관행입니다.

이렇게 서적상을 통해 책을 배포한 출판사는 여기 저기서 돈 달라는 소리에 속이 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을 서점으로 끌어들이려고 광고를 내고, 저명한 비평가들을 동원하여 문예지나 신문에 비평을 게재하고, 방송국 PD들에게 우리 책을 소개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여 저명 인사들을 출연시키고, 살기 바쁜 독자들은 그렇게 떠들어대는 책만 최고인 줄 알고 읽는 세상이 오늘의 문학사회입니다.

이런 현상은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우리 인구의 거의 3배인 1억 2천명의 일본에서는 꽤 괜찮은 시집도 1,000부 안팎밖에 팔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계 최고 문화 국가라는 프랑스도 클로드 살레(Claude Salle)가 쓴 「파리 인테리켄챠의 현주소」라는 글을 보면 <쉐이유> 출판사의 문학 담당 편집자, <르몽드>지의 문화부기자, 방송의 문학 담당 PD가 점심을 먹으며 뭘 보도할까 결정하는 것에 따라 프랑스의 지성에 등급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모여서 점심 먹는 게 뭐 이상하냐구요? 생각해 보세요. <쉐이유> 출판사의 편집 담당자가 어떤 책을 부탁하겠어요? 그리고 방송국이나 신문사 기자가 왜 편집자와 점심을 먹겠어요? 그런 고리의 평가를 인정하지 않고 비판하면 될 게 아니냐구요? 비판할 만한 사람들은 비평가들인데, 그들은 누구를 붙들고 먹고 사는 사람들인가요?
문학 작품의 가치가 그 자체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중개자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니까 실망하셨습니까? 그러나 이런 현상은 다른 사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회를 기웃대어도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우리 문학사회에 새로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보화 시대가 열림에 따라 젊은 문인들은 시와 영상과 음악을 결합시킨 전자책을 만들어 인터넷을 통해 배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점을 찾을 시간이 없는 젊은 독자들은 이런 책을 찾을 수밖에 없고, 달리는 차 속에서 인터넷과 접속하는 ‘와이브로(WiBro)’의 기능과 종이처럼 둘둘 말 수 있는 화면(e-paper)을 결합시킨 단말기가 2-3년 안에 상용화 되면 이런 상황은 더욱 가속화될 것입니다. 따라서 미래의 문학사회는 소비자가 직접 결정하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 대처하실 수 있도록 독자들의 성향을 요약하여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독자들은 다만 시를 쓰지 않을 뿐 문인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학력과 감각을 지닌 사람들이다.
○문인들은 일원적(一元的)인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반면에 독자들은 다원적(多元的)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다.
○독자들은 문인으로부터 충고나 가르침을 받으려 하기보다는 정보만 얻고 스스로 판단하려고 하는 경향이 강한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이 대처할 방법은 단 두 가지뿐입니다. 우선 할 일은 그 누구도 쓸 수 없는 작품을 써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문인들처럼 설교하려 들지 말고 전인적(全人的) 인식과 감각을 담은 작품을 완성한 다음 세계 최고의 한국 디지털 기술과 결합시켜 독자들에게 직접 제공하는 일입니다.
얼핏 들으면 독자와 타협하라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문학은 원래 일원적인 가치관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독자의 감각은 입체화(立體化)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또 독자들은 과거와 달리 시인과 동등한 식견을 가지고 있어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문인들의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나이든 문인들만 문제가 될 뿐 젊은 문인들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한 이틀 고생하면 시와 음악과 영상을 결합시키는 방법을 익힐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자기 작품에 사이트마다 넘쳐흐르는 영상과 음악을 결합시켜 전 세계로 배포하고,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워지면 유료화(有料化)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프라인(off-line) 쪽과 아주 손을 끊으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작품이 완성되면 문예지에 보내고, 반응이 괜찮으면 시집을 내고, 그리면서 영상화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의 미래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보다 시가 번성할 수 있는 시기로 접어들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 끝없는 자기 부정

그 다음, 문학사 속에 살아남으려면 자기 인생과 문학을 주기적으로 점검하면서 습관적인 삶과 창작을 부정하고 늘 새 출발하는 사람이 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감각은 끊임없이 변하는데 타성에 젖은 삶과 감각으로는 독자들의 영혼을 이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20세기의 최고 예술가로 꼽히는 피카소만 해도 그렇습니다. 1900년, 그가 파리에 도착해 처음 전시회를 열 때는 그저 재능 있는 스페인 청년 화가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가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이 전시회를 기점으로 삼아 1904년까지 <청색 시대>, 그 다음 해부터 <도색(桃色) 시대>, 1909년부터 <분석적 입체파 시대>, 1912년부터 <종합적 입체파 시대>, 1915년부터는 잠시 <사실주의>, 1920년부터는 <신고전주의 시대>, 1925년부터는 <초현실주의 시대>, 1930년대부터는 <도기(陶器)와 판화의 시대>, 2차 대전 때 자기 조국 스페인이 내전에 휩쓸리자 예술을 통해 저항 운동을 전개하고, 대전이 끝나자 공산주의 활동을 한, 그야말로 끊임없이 자기 부정을 되풀이한 화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문학사에서 대가로 꼽히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20세기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株)는 <보드레르적 관능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신라(新羅) 정신>으로 돌아오고, 다시 <동양적 허정(虛靜)과 불교 세계>를 넘나들었는가 하면 <한국적인 해학(諧謔)>을 만들어냈기 때문이고, 대여(大餘) 김춘수(金春洙)는 <의미의 추구>에서 출발하여 <무의미(無意味)>를 실험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시인들은 새로운 작품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작품을 되풀이해서 쓰는 것은 인생이나 문학은 그저 그런 것이라고 타성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원인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혁명을 하듯 삶과 작품을 바꾸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생활인으로 열심히 살면서, 아니 오히려 더욱 열심히 생활하면서, 잘못해도 형무소에 가지 않는 정신적 모험을 계속 하라는 겁니다.

좀 민망하지만 제 이야기를 해볼까요? 솔직히 말해 어려서부터 제게는 시인이 될 만한 징조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영웅전을 많이 읽은 탓에 대통령이나 장군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했고, 중학교 때에는 그림이나 음악 쪽에 더 관심을 가졌고, 고등학교 때에는 어렸을 때 꿈을 이루려고 법대(法大) 쪽으로 진학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제가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가정 형편 때문에 2년제 교육대학(敎育大學)으로 진학한 후부터였습니다. 평생 코흘리개들과 ‘바둑아, 영이야’하며 살 걸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대요. 그래서 무엇으로 세상에 나를 남길까 궁리하다가, 볼펜과 원고지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생각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던 해 4월, 고등학교 때 문예부 활동을 한 친구들을 꼬셔 동인회(同人會)를 조직했습니다. 하지만 각종 백일장에서 이름을 날리던 친구들에게 주눅이 들어 그 해 10월말까지 합평회에 작품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힐난을 하더군요. 그래서 하루 저녁에 세 편을 써서 냈지요. 그런데 그 친구는 제 작품과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대갈일성(大喝一聲)을 내지르는 겁니다.
“이것도 작품이라고 쓴 거야? 당장 동인회에서 나가!”
저는 그날 저녁으로 제가 만든 동인회에서 쫓겨났습니다. 작품도 못 쓰는 게 회장이라고 설쳐댔으니 쫓겨나는 게 당연합니다.

그 해 초겨울, 우울하게 포장마차에서 포장마차로 전전했습니다. 어떤 때는 소주잔을 앞에 놓고 ‘빌어먹을, 때려 쳐?’하고 생각도 해보고, 또 어떤 때는 ‘쌔기! 제가 잘 쓰면 얼마나 잘 쓴다고…’하고. 저를 쫓아낸 친구를 욕했습니다.
그러다가 겨울방학을 앞두고 대학 도서관에서 "한국 전후(戰後) 문제시집"과 "세계 전후 문제시집"이라는 사화집(詞華集)을 빌려 가지고 시골집으로 갔습니다. 꼭 그 시집을 빌리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냥 방학 동안에 읽을 책을 고르다가 전후(戰後)에 주목을 받는 시인들 30여명을 고르고, 한 사람 앞에 2,30편씩 7,800편 작품 뒤에 시작(詩作) 노트를 덧붙인 게 마음에 들어 골랐을 뿐입니다.

방학 내내 사랑방에 이불을 펴고 엎드려 "한국 전후문제시집"의 작품들을 큰 소리로 읽었지요. 그러면서 마음에 드는 작품을 모작(模作)해 봤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달부터는 "전후 세계 문제 시집"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써봤습니다. 이렇게 두 달을 지내고 나니까 그 친구가 왜 절 내쫓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대요.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와 강의실 복도에서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자존심에 그냥 모르는 척하고 지나갈 수는 없대요. 그래서 작품을 많이 썼느냐고 물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친구는 고개를 외로 꼬면서, 슬럼프에 빠졌는지 한 편도 못썼다는 겁니다.
오호, 쾌재(快哉)라! 습작기의 사람이 슬럼프에 빠지다니……. 저는 그 친구의 나태를 야금야금 즐기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향토 장학금’ 받은 게 남았다며 대학 앞 술집으로 유인했습니다.
그는 술집 안으로 들어서며 제 뒤 호주머니에 꽂힌 시작(詩作) 노트를 뽑아 들었습니다. 술을 사겠다니 한 수 봐주겠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잔을 든 채 40여 편을 다 읽고 신음을 토하듯 말했습니다.
“야, 나까무라상! 너 다시 동인회에 들어와라.”
‘나까무라상’은 그 친구가 저보고 일본 순사처럼 지독하다고 붙인 별명입니다.
오, 오. 쾌재라. 아니, 열두 번, 열세 번, 열백 번, 열천만 번 쾌재라. 하지만 선뜻 응할 제가 아니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선듯 응하면 방학 동안의 그 길고 긴 여정(旅程)이 그 친구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한 것처럼 되어버리니까요.
그로부터 며칠 뒤였습니다. 그 친구는 다른 동인들과 함께 정종병 크기의 소주 두 병을 들고 제 하숙집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잔을 들고 짝짝짝 박수를 치며 ‘나까무라상을 다시 동인으로!’라고 외치고, ‘다시 회장으로!’라고 외쳐 빼앗긴 주권(?)을 되찾았습니다.
제가 문단의 원로로부터 처음 인정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9개월 뒤인 12월 초였습니다. 그러니까, 졸업을 앞두고 공주(公州) 시내 다방에서 개인 시화전(詩畵展)을 열었을 때입니다. 지금엔 전시회가 흔하지만, 그 때 그 전시회는 공주 역사에서 처음으로 연릴 개인전입니다.
그런데, 계룡산(鷄龍山) 구경을 갔다 오던 어느 원로 시인이 다방으로 들어서시더군요. 물론 제 전시회를 보러 오신 것은 아닙니다. 지친 발걸음을 쉬면서 차나 한 잔 할까 다방을 찾다가 시화전이 열리고 있어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전시 작품을 주욱 돌아보더니 몇 편을 고르시대요. 그리고, 자신이 당대의 최고 문예지 추천(推薦) 심사 위원이라면서 고른 작품을 고쳐 보내라고 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매달 문예지에 발표되는 기성 시인들의 작품들을 붉은 볼펜으로 쭉쭉 그으면서 이런 사람들이 시인이랍시고 지면만 차지한다며 기고만장하던 저는 보내지 않았습니다. 졸업 후에도 그런 오만은 계속되었습니다. 매년 개인 시화전을 열고, 이 세상에 오직 나만 시인인 것처럼 설쳐댔습니다.
그러던 제가 문단에 나온 것은 1972년 1월호 ≪시문학(詩文學)≫을 통해서였습니다. 사는 게 하도 따분해 동인회에서 저를 내쫓던 친구네 집에 놀러갔는데, 마침 <현대문학사>에서 새로 ≪시문학≫지를 창간하고 추천 심사위원으로 위촉받은 한성기(韓性祺) 선생님과 ≪현대시학≫지 심사위원인 박용래(朴龍來) 선생님, 그리고 지금 <목원 대학교> 교수인 홍희표(洪禧杓) 시인이 그 친구를 만나러 온 겁니다.

우리는 술집으로 갔지요. 한선생님께서는 술을 끊은 지 오래라면서 사이다만 마시고, 나머지 네 사람은 막걸리를 퍼마셨습니다.
그런데 주기가 오르자 저는 초로의 두 선배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망언을 했습니다. ‘선생님들의 시는 너무 낡았다’고. 그리고 그게 죄가 되어 그분들이 사는 대전에 갈 때마다 한성기 선생님을 찾아뵈었고, 뒤 호주머니에 꽂고 다니던 시작 노트가 다시 사단을 일으킨 겁니다.
그때도 술집으로 들어서던 한선생님이 시작 노트를 뽑아 읽으시더니, 절 ≪시문학≫에 추천하고 싶다며 종업원에게 원고지를 사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당장 옮겨 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 오만이 어디 가겠습니까. 추천 같은 것을 받을 생각이 없으니 동인회에서 절 내쫓았던 그 친구를 해주십사고 부탁드렸습니다. 시인이 되는 절차를 밟는 것도 번거롭거니와, 추천을 받으면 심사위원의 도제(徒弟) 노릇을 해야 한다는 풍문이 완강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마시던 사이다 잔을 탁자 위에 깨져라 내려놓으면서 호통을 치시더군요. 그리고는 막걸리 주전자를 끌어당기시면서,
“당신도 교육자니 내 심정을 짐작할 거요. 당신 말대로 내 시는 낡았오. 그래서, 내가 쓰고 싶은 시를 당신이 쓰도록 만들기 위해 추천하려는 거요.”
선생님의 음성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咸興), 한평생 직장도 없이 시를 쓰며 노년을 맞고 있다는 외로운 느낌과 ‘당신도 교육자이니 내 심정을 짐작할 거요’라는 말씀이 저를 단정하게 무릎을 꿇게 만들더군요.

정말 제가 부모 아닌 분에게 무릎 꿇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만 여유를 주십사 하고 간청을 드렸지요. 선생님께서는 이왕 나서려면 새로 창간한 문예지의 등단 1호로 나서는 게 좋다며, 머뭇거리다는 놓친다고 하셨지만, 작품은 제 정신의 육체이니 목물이라도 한 다음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야 할 게 아니냐고 말씀드렸습니다.
제 고집대로 한 달 뒤에 한선생님께 작품을 넘겨드렸지요. 다행히도 전 달의 심사 때 이거다 할 만한 작품이 없어 두 달 뒤인 1972년 1월호에 그 문예지의 첫 추천자로 초회(初回) 추천을 받고, 그 해 8월호에 다시 종회(終回) 추천을 받았습니다.

그때 제 등단은 그야말로 스타 탄생이었습니다. 지금에는 문예지가 수십 개도 넘는데다가 매달 수십 명의 신인들을 쏟아져 나오고, 심사 위원도 한 명이고, 1회추천으로 끝나지만, 그 때는 문예지라고는 두서너 개밖에 없고,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시인들까지 합쳐 일년에 10명이 안되던 시절에 사상 초유의 <3인 합의 2회 추천제>로 멍청도 촌놈이 등단했으니 세상이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상이 온통 제 것 같대요.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차츰 문단의 관심이 저로부터 멀어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도의 작품이라면 누구나 까무라치리라고 기대하고 발표해도 외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아. 문단에서 내가 시골 초등학교 선생이라서 외면하는구나…

물론, 이렇게 오해한 데는 전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시인의 출판기념회 술자리이었습니다. 좌중에 어떤 사람이 그 달에 발표한 제 작품을 칭찬하자, 아직 등단하지 못한 모 대학 교수님이 ‘인풑(input)’이 있어야 ‘아웃풑(output)’가 있는 법인데, 감수성에만 의지하는 초등학교 선생이 얼마나 버티겠느냐고 옆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두 눈에서 확 불꽃이 일어나대요. 그래서 그 분 앞으로 갔지요. 그리고 못 들은 척 술을 따르면서, ‘그래, 나도 공부하자!’고 다짐하고, 그 해 겨울부터 준비해 일년 뒤인 서른 살에 퇴직한 다음, 돌 지난 딸과 결혼한 지 2년밖에 안 되는 아내와 중풍으로 누워 계신 아버지와 여섯이나 되는 동생들을 두고 서울로 올라가 동생들의 학비와 아버지의 약값을 대며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모험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닙니다. 하루 저녁에 잡문을 200매씩 한 달에 2,000매 이상을 쓰면서 한 2년 공부하다보니 제가 왜 문단에서 외면을 당하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다식판(茶食板)에 다식을 찍어내듯 추천 받을 때 칭찬 받은 작품과 비슷한 것만 쓰면서 ‘이래도 안 놀래? 이래도 안 놀래?’하고 문단과 주변을 원망했던 것입니다.
아무래도 공부를 더 해야겠대요. 그래서 고등학교 선생으로 취직한 다음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을 다닐 때는 다시 사표를 내고 공부해서 마흔 살에 교수가 된 겁니다.
교수가 되니까 사람들이 쬐끔 알아주는 것 같대요. 하지만 그건 사회적인 예우일 뿐, 독자들의 태도는 여전히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아주 유식한 척 평론도 쓰고, 이론서도 쓰고, 작품도 아주 난해하게 썼습니다. 그래도 꿈쩍 안 해서 <다층>이라는 문예지도 창간하고, 인터넷에 <한국문학도서관>을 만들어봤지요.
그러나 결과는 여전히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조금 달라지기는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교수라거나, 사재(私財)로 구축한 전자 도서관이 <국회도서관>이나 <국립중앙도서관>과 나란히 어깨를 겨누었기 때문이 아니라, 1990년대부터 흉내내기를 그만두고 저만의 작품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작품을 썼는데 달라졌느냐구요? 그런 작품들은 차차 소개하기로 하고 새로 시를 쓰는 분들에게 제 습작 과정에서 새겨둘 몇 가지만 골라 말씀드리겠습니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작품을 읽고 장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했으니까 접어두고, 첫째로 읽을 때는 소리내어 읽으라는 겁니다. 소리내어 읽을 때, 우리말의 리듬감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초보자는 물론이고, 쓴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도 모작을 해보라는 겁니다. 열 권의 이론서를 읽는 것보다 열 편의 시를 모작해보는 게 훨씬 빨리 시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동인회를 조직하여 함께 활동해보라는 겁니다. 혼자 쓰면 이내 지치고 자극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쓰면서 공부하고, 공부하면서 쓰라는 겁니다. 공부하지 않고 쓰면 언제나 같은 작품만 쓰고, 쓰지 않고 공부만 하면 실제와 거리가 먼 소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론을 공부하는 사람이 창작에 손대고, 창작하는 사람들이 이론에 손을 대면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현대 문학과 이론 연구가 뒤늦게 출발하여 형성된 관습일 뿐, 세계적인 대가(大家)치고 자기 이론을 안 가진 사람이 없고, 석학(碩學)치고 자기 이론을 실천해 보이지 않은 사람이 없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처럼 생활 자체를 뒤흔드는 모험일랑 하지 마십시오. 저는 아주 운이 좋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직하고,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1년만에 교수가 되었지만, 지금엔 포스트 닥터(Post-Doctor) 과정을 마치고도 시간 강사 자리도 얻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다섯째로 자기 나름대로 이론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공부가 끝난 뒤부터는 공자님이든 아리스토텔레스님이든 모두 무시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은 그분들과 견줄 수 없을지 몰라도, 지식만은 오히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입니다. 미적분(微積分)도 풀고, 컴퓨터도 다루고, 자동차 운전도 할 줄 알고…. 2000년 이상 축적된 지식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아니 그분들보다 모자란 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분들은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며 생각하지만, 우리는 남의 책을 뒤적거리면서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시는 인간이 인간을 위해 인간의 이야기를 쓰는 거기 때문에 자기 내면을 드려다 보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대가가 되십시오. 이왕 시작했으면 역사에 길이 남는 사람이 되어야 하니까요.


【우리가 할 일】

○ 시작 노트에 자기의 시쓰기 계획을 세워두십시오.
○ 만일 시간이 있는 분이라면 두 달 계획을 잡고 저처럼 독서와 모작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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