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부(1942~2012)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봄/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50』(조선일보 연재, 2008)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5』(국립공원, 2007)
급할수록 더디다. 지쳐 숨이 넘어갈 때쯤, 마침내 올 것은 온다, 더디게 더디게. 그것이 봄이다. 오면, 봄이 오면, 눈부셔 맞이할 수 없고, 소리가 굳어 이름조차 부를 수 없다. 새날, 새봄은 그렇게 온다. 나의 봄도 너의 봄도, 서울만의 봄도 평양만의 봄도 아니다. 우리 모두의 봄이어야 한다. 봄이 오면 겨울은 망하는가. 그렇지 않다. 봄은 그 겨울에조차 봄인 봄이다. 겨울이 깊이 묻어둔 씨앗에조차 움을 틔우는 봄이어야 한다. 블랙리스트에, 핵미사일에 사드까지 으스스한 봄은 비참하다. 언제까지 온 민족이 살상무기 공방의 볼모가 되어야 하나. 1974년의 작품. 40년도 더 전의 시를 마치 오늘의 것인 양 읽게 되는 심정이 기구하다.
<김사인·시인·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