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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 시 창작 강의 (9) -시어의 사물성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8. 3. 1.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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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 시 창작 강의 (9)


시어의 사물성



시는 언어(말)로 이루어져 있고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시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따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시적 변용을 하기 위한 가장 초보적인 사고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언어를 사용하여 한편의 시를 만들 때 그는 목수가 나무를 사용하여 책상이나 의자 등을 만드는 것과 같이 하나의 사물로서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책상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나무, 못, 니스, 아교풀과 그외 여러 가지 사물이 필요합니다. 시를 책상이라는 유기체에 비유한다면 언어는 바로 이런 사물들에 해당합니다. 각기 새로운 의미를 담아내는 언어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하나의 사물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시가 유기체라 할 때 그것을 충족시키는 가장 기본조건이 바로 시어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시의 언어가 가진 자율성이라는 특수성에 비춰 볼 때 시적 언어의 유기적 조직성은 낭만주의적 세계관에 특히 충족되어지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능구렁이 우는

  으슬비 저녁

  음습한 울타리 밑으로 피어오르는

  예쁜 꽃 하나 보았다


  밝은 햇빛 아래서는

  살지 못하는

  긴 혀를 빼물고 곧추서는 살모사 같은

  뱀버섯,

  붉은 말을 보았다


                           박 찬의 <말> 전문


시인의 언어는 바로 위 시가 전달해 주는 의미에 다름 아닙니다. 음습한 울타리 밑으로 피어오르는 꽃이며 뱀버섯과 같은 붉은 말인 것입니다. 전혀 일상의 언어체계와는 다르면서 그것은 하나의 사물로서 살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싸르뜨르에 의하면 산문은 도구로서 언어를 사용하며 시인은 사물로서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였습니다. 도구라는 것은 실제적 효용성,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이 강조되고 사물이라는 것은 비실제적 효용성, 곧 심미성이 강조되며 수단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도구로서의 언어가 걸음걸이라 한다면 시어는 바로 무용에서의 걸음걸이 또는 무용 그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걸음걸이와 무용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러일으키게 하는 정감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시의 언어는 바로 시인의 분노, 고뇌, 기쁨이 그대로 배어있는 세계여야 합니다. 그 세계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어 시 스스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창조된 사물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기체화한 감동, 감정의 미분화상태에서의 엉김, 생생하게 현전하는 <사상>등이 한꺼번에 전달되는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언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낱말 하나 하나 생명력을 지니고 살아 있어야 합니다. 시에서 그 낱말을 빼어버리면 시가 되지 않는다든가, 다른 말을 집어넣어도 상관없다든가 하는 것은 그 작품이 완벽한 상태가 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는 신이 부여한 사람의 형체에서 더함도 덜함도 없는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 일컫듯이 시에 말을 더함도 덜함도 없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바로 온전한 형태의 시라고 불리워 질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타종이 울리는 오후 한 때

노을이 수놓은 금빛 옷자락도

자리를 털고 걷히고 말면

아파트의 전등이 하나 둘씩

파수꾼을 세운다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해와 별이 아니라

온종일 신음하던

하루의 권태와 성취감

빈 나뭇가지에 걸려

흔들리고 있다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 있어

돌아다보면 아무도 없는데

바람과 구름 속에

시간은 쉬지 않고

언덕길을 오르고 있다해도

또다시 나의 하루는

지난밤에 꾸었든 꿈

꿈을 세탁하며 시작한다


그리운 사람은 항상

하얗게 세탁한 꿈을 밟고

소리 없이 오고

                             독자 김향숙의 <하루> 전문


위 시는 <노을 = 금빛 옷자락> 이나 <아파트 전등=파수꾼>과 같은 연결구조를 새롭게 찾아냄으로서 언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빈 나뭇가지에서 권태와 성취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영감과 언덕길을 오르고 있는 시간을 볼 수 있는 시인의 능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시는 차별화 되는 언어의 영역에 그 시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보아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시어의 사물성을 갖추기 위한 조건으로 다음 여섯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1) 시인은 사물을 이름으로 접촉하지 않고 침묵으로 접촉합니다. 말을 통하여 사물들의 특수한 유사관련을 인식합니다. 언어의 새로운 의미구조를 캐어내어 현실을 재구성해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은 현실을 잡기 위한 덫이 됩니다.

<오십천 일대에/ 눈이 내린다/ 서쪽은 저승이다> (이장희)에서 서쪽이 저승이라는 말은 형태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앞의 두 행과 연결되어 나타날 때 그 의미는 폭넓은 사고를 동반하며 우리 삶과 연관을 가지고 언어 그 자체가 살아있는 의미로 다가 서게 되는 것입니다.

2) 언어의 외관, 곧 음향, 장단 따위는 의미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처럼 직접 의미를 제시합니다. 그것들은 말의 얼굴이 됩니다.

 <鬱鬱蒼蒼 이랬거니> (정지용) 에서 울울창창이라는 언어는 하나의 의미이면서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숲의 모습을 그려내 주고 있는 그림일 수 있습니다.

3) 의미가 실현되면 곧 말에 언어적 통일성이 부여되면, 말의 외관은 의미 속에 반영됩니다. 의미는 바로 의미체의 이미지가 되는 것입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오지 않는 잠에게 말을 건다

    오지 않는 잠에게 손을

    내민다

                    오선홍 시인의 <고스란히 불어 간다> 중에서


 첫 행의 잠은 그저 우리들이 늘상 드는 잠에 해당되고 있지만 두 번 째 행에 오게 되면 잠은 나와 분리되어 시적 화자에게 오지 않는 하나의 사물로, 또는 생명이 있는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서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4) 말과 사물사이에는 마술적 유사함과 의미의 이중기능이 나타납니다.


   별이 아름다운 건

   걸어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들 위에

   다시 집을 짓는

   이 지상에서


   보도 블록 깨어진 틈새로

   어린 쑥잎이 돋아나고

   언덕 배기에 토끼풀은 바람보다 푸르다.


                               강인한 시인의 <地上의 봄> 중에서


별과 길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도 새로운 의미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별은 길이라는 낯선 의미와 결합함으로써 기존의 길의 의미를 넘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고 마찬가지로 길은 별을 만나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상호 교호적인 관계로 살아나는 언어는 시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이 언어는 망가지는 것들 위에 새롭게 돋는 봄풀이 있음으로 하여 우주의 질서 같은 그런 아름다움을 대변해 주고 있는 말들이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찾아낸 말의 새로운 의미, 그것이 바로 시어의 사물성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5) 기존의 어의 하나하나는 물질적 특질로 주어집니다. 피카소가 꿈꾸었던 은유 즉 <성냥갑이면서 박쥐인 그러한 성냥갑>에서 성냥갑이 박쥐가 될 수 없는 일상의 사고에서 벗어나 그것이 박쥐가 될 수 있는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6) 시인이 쓰는 시는 하나의 작문이 아니라 하나의 대상을 창조합니다. 즉 사물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푸른 물줄기/굽이굽이 흘러내리는/낙동강 칠백 리/우리들의 젖줄기//

  역사의 핏줄로 흐르는/우리들의 젖줄기가/폐수로 오염되어 병들고…

                                                독자의 시 <낙동강> 중에서


위 시는 언어가 사물이 되지 못하고 언어 자체에 머물러 언어의 유기적인 상관관계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시적 표현을 찾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관념을 드러냄으로서 독자들에게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내가 던진 돌멩이가

    물 위를 담방담방 뛰어가다가

    간 곳 없이 사라진다

    측심기로 잴 수 없는

    미지의 바닥에 돌멩이는 잠드는 것일까

    잠시 일렁이던 파문도 자고

    물 거울에 뜨는 산 그림자의

    입 다문 얼굴,

    나는 무감동한 고요를 깨뜨리기 위해

    또 하나의 돌멩이를 멀리 팔매 친다

    죽음에 배를 대고

    팽팽한 찰라만을 디디고 가는

    한줄기 생명의 퍼덕임을

    어렴풋이 보았다

    아이와 함께

    물수제비 뜨는 날


                     이가림 시인의 <물수제비 뜨는 날> 전문


이 시에서 돌멩이는 시적 화자가 던진 평범한 돌멩이이면서 <한줄기 생명의 퍼덕임>을 하는 생명체로 화합니다. 이 시에 등장하는 <파문>도 그저 물결이 지우는 그런 무늬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굴곡이기도 합니다. 파문이 파문의 단순한 말뜻을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바로 그 말이 하나의 사물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산 그림자의/ 입 다문 얼굴>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죽음에 배를 대고/ 팽팽한 찰라만을 디디고 가는> 돌멩이는 화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하나의 개체로 독립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