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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 시 창작 강의 (22) - 은유의 원리 2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8. 3. 1.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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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 시 창작 강의 22


은유의 원리 2


2 투쟁의 원리


투쟁의 원리로 볼 때 은유는 <상반되는 요소들 사이의 다양한 투쟁 양식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유는 어떤 개별적 명에 의해 정의 될 성질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휠라이트의 도식에 따르면 은유는 상징의 세계를 거쳐 신화의 세계로 나아간다고 합니다. 신화의 세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많은 이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 가운데 하나인 리얼리티가 새롭게 인식된 세계입니다. 그것은 결국 은유가 신화적 사고의 이해를 통하여 성취되는 한 커다란 비밀이면서 생기 있는 실체라고 불려 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화적 신념으로 부각되는 시의 포괄적 의미를 일단 은유적 측면과 연결시켜본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시는 이념적 도구로써보다는 인간의 한 근원적 사고활동의 표상이요, 엔 프라이의 말처럼 <화해의 형식>이라는데 그 진의가 놓인다는 점을 새삼스럽지만 단호하게 인식하자는 것입니다. 시는 시 자체일 뿐 다른 그 무엇은 아니라고 말할 때 그 말속에 스며 있는 의미들은 무엇일까요. 오든에 의하면 <예술은 인생이 아니며 또한 사회의 산파역도 될 수 없다. 시는 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시의 중심 구조인 이미지, 상징, 은유, 신화 등의 체계적인 분석을 통하여 그 본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은유의 유형으로 (1)치환은유 (2)병치은유가 있다.


한 의미를 드러내고자 할 때 시인이 다른 사물을 빗대어 말하면 그 의미와 사물 사이에는 일정한 법칙-또는 관계가 정립될 수 있다. 그 관계는 상호 유사성으로 연결될 수 있지만 전혀 이질적인 요소들의 결합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럴 때 시는 함축적이며 폭넓은 상상력의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다.


절규하고 있다/최후의 한 잎으로/그냥 그대로 머무르고 싶다고


흔적 없이 가버린/수많은 벗들을 애닯아 하며/그냥 그대로/석고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초겨울 찬서리/거미줄 같은 뼈마디만 남도록/조각조각/살갗을 도려낸다 할지라도/한낱 허물인 채로/머무르고 싶다


바위조차 나의 저 편으로/고개를 돌렸건만/지나간 가을에/애절한 앙금만 머금은 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생명/아궁이 뜨거운 꽃으로 피어오를 때까지/그래도 하나의 흔적으로/머무르고 싶다

                                           독자의 시 「벤취 위의 낙엽」 전문


위 시에서 ‘절규’나 ‘흔적’ ‘석고상’등은 낙엽이 가진 기존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다른 점에서 기존의 이미지들과 충돌을 하게 되고 새로움은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충돌의 진폭이 클수록 독자들이 느끼는 새로움의 정취는 커지게 되는 것이다.

리챠즈가 내 세우는 것도 바로 이러한 상호 충돌의 원리입니다. 시 속에서 은유를 태도와 충동에 효과를 주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견해를 요약해 보면 아래와 같다.


1. 은유는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시 속에서 역동적인 관계의 대표양식으로 드러나지만 은유는 모든 인간지식, 인간경험과 상호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배고픔’이라는 의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을 수는 없다.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작용되는 말이다. 사흘을 굶고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맹물을 마시며 허기를 달랬다는 내용을 드러내고자 할 때 개인적인 지식이나 경험의 내용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2. 은유는 비서술적 에너지체계로서 논리적 양식이 아니다. 은유가 시에 대해서 갖는 관계는 가정이 논리학에 대해서 갖는 관계와 같다.

‘눈이 온다/ 하늘이 내려온다’고 했을 때 ‘눈이 내린다’는 의미를 ‘하늘이 내린다’ 고 말했다면 그것은 논리적인 문장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은유는 논리적 양식을 거부하는 것이며 서술적인 것으로부터 멀리 벗어날수록 시가 가진 에너지는 증폭되는 것이다.


3. 시적 에너지가 저급할 때, 은유는 서술과 직유로 끌려간다는 사실이다. 곧 산문적 은유로 전락하는 것이다.

새롭지 않은 비유나 평이한 논리에 머무르는 표현은 그것이 은유적인 표현을 빌었다해도 서술적인 표현이나 직유에 다름 아닌 모습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내 마음은 눈물이다/슬픔을 감추고/길을 걸어간다’고 했을 때 신선한 표현에 닿지 못하고 산문적이 모습일 뿐이다.


4. 은유는 다양한 문법적 패턴 속에서 은유의 속성을 드러낸다. 본질적 은유와 산문적 은유의 경계는 직유의 선에서 나타나며, 그러나 직유의 선을 지키는 어떤 구절들은 문법적 유형에 의하여 직접 직유로 넘어가는 것이다.


5. 리챠즈가 상호충돌이라고 부른 원리는 ‘마주침’ 혹은 ‘대결’이라고 부름이 더 좋을 것이다. 유추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교통에의 욕망, 결합에의 욕망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두 욕망을 암시하는 것으로 마주침 혹은 대결이라는 용어가 더 호소력을 띠는 것이다.


‘별이 목욕하는 호수에/ 나무들은 물구나무서서/ 잠에 들었다/수심이 깊어지는 하늘가에/집 없는 해오리가 날아간다’


6. 비록 <이다 · to be>라는 은유적 일치가 자기 동일성을 표시하지만 항상 대결의 직접성 혹은 즉시성은 그 일치나 자기동일성을 파괴한다. 따라서 서술, 비교, 대치라는 논리적 과정들에 의하여 다리가 놓여지는 공간인 산문적 은유는 때때로 이 <마주침>을 규제한다.


7. 은유적 과정은 매우 제한적이거나 무제한적일 수 있다. 은유적 에너지가 다른 요소들을 확산시키고 응축시키려는 경향을 공명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논리적 측면에서는 전통적으로 수미일관성, 조화를 뜻한다. 은유에서는 그러나 확정적인 의미이며, 상징적이고 신화적인 경향을 나타내려는 은유가, 다만 시각적이고 개념적인 경향을 나타내는 은유보다 더욱 큰 공명의 강도를 노출한다. 또한 공명은 다양한 품사와 음성적 효과와 리듬에 의하여 좌우된다. 이를테면 한편의 시가 나타내는 요소들이 추상적 낱말, 서술적인 구문이더라도 그 시의 품사, 음성적 효과, 리듬이 탁월하면 그 시의 은유적 공명은 큰 것이다.


8. 본질적 은유는 참된 인식의 문제와 결합되기 때문에 아무리 분석해도 분석의 여분이 존재한다. 따라서 유일한 분석 방법은 개별적인 사례 속에 나타나는 실제적인 관계인식과, 그 관계에 대한 실제적 평가와 공명의 크기에 국한된다.


결국 은유를 시의 독특한 원리로 규명해 보려는 노력은 일단 그 분석이나 평가에 앞서, 이상 열거한 여덟  가지 전제조건을 육화해야 한다는 필연성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웰렉이 비유적 표현의 모든 가능성을 주체와 객체의 요소에 의해서 추적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 역시 이러한 논리에 수용되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문제는 이상의 전제조건을 존 더 명료하게 집약할 수 있는 명제들의 검출은 가능한가에 있다. 그것은 인류학자들이 원시인들의 삶의 원리를 물활론과 마술에서 구한 것과 연관되는 질문방식이다. 은유의 원리로서 병치가 내포하는 인간의 기본적 욕망, 곧 교통과 결합의 욕망은 본질적으로는 어느 시대 어느 문명을 불구하고 사납게 존재했던 삶의 원리였다면, 그 원리를 우리는 실제로 저 원시시대의 삶의 원리에 유추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을까.

그런 점에서 웰렉이 은유적 직관의 궁극적 유형으로 신비적 은유와 마술적 은유를 드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신비적 은유와 마술적 은유란 그에 의하면 사물의 비인간적 세계 곧 본질을 소환하는 것이며 시를 전과학적 사고양식으로 간주함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원시인 혹은 아이들의 비전을 회복함이며 아이들의 순수한 비전, 곧 원형을 유지하는 것이 시라는 것이다.


11월의 가슴은

얼음을 뚫은 불덩이가 치솟고

차원을 달리하는 시간이

철새 따라 몰려간다

11월이면

쓸쓸한 불꽃놀이를 하리

잎 떠난 지 오래인 나무들을 초대하고

홀로 뒹구는 구멍 뚫린 낙엽들도 불러 모아

태초의 어둠 속


아담도 이브도 없는 에덴동산에서

그 화려한 불의 꽃을 피우리라

                              독자의 시 「11월에는」 전문


위 시에는 충돌의 원리나 병치의 원리에 의해 쓰여졌다기 보다는 순응하고 순치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낙엽=태운다’는 상식적인 표현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원시적 삶의 원리에 은유의 병치원리를 조응할 때 우리는 이제까지 충분하게 개진되지 못했던 새로운 명제와 마주치게 된다. 휠라이트가 삶의 원리를 투쟁의 원리-곧 장력의 원리로 보고, 시의 경우 언어는 이 원리에 입각한 장력언어이며 그것은 개별적 시점을 지향한다는 견해 역시 은유 논의의 한 방법론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장력언어는 그에 의하면 바로 의미론적 장력을 지향하며, 그것은 사물의 리얼리티를 표출하는 인간의 근본적 활동이다. 이러한 장력언어의 기본 단위는 이미지, 은유, 상징이다.

이러한 논의는 리챠즈가 밝힐 수 없었던, 은유가 스스로 무엇을 야기하는가. 혹은 상호침투성의 원리가 지향하는 세계가 무엇인가에 대한 좀 더 명료한 답변의 골격을 형성한다. 곧 리챠즈식의 매재와 취의의 관계를 넘어서는 은유의 논리가 획득되는 것이다. 사전적으로만 수용되던 <상반되는 요소들 사이의 다양한 투쟁의 양식>이라는 은유의 원리가 이제는 비로소 투쟁 혹은 장력 자체와, 인간으로서의 개별적 시점이라는 명제에 연결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은유는 양면의 논리를 띠는 개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