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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 시 창작 강의 (24) - 은유와 리얼리티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8. 3. 1.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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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 시 창작 강의 24


은유와 리얼리티



‘나무는 바보’라고 했을 때 ‘나무’와 ‘바보’가 서로 관계하는 마주침 또는 대결 구도에서 은유가 출발한다. 여기에서 은유는 생의 원리인 <마주침 혹은 대결>에서 유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침내 새로운 현실, 곧 새로운 의미라 할 <존재의 건축>을 마련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무는 왜 바보일까?’를 떠올리게 되며 이런 은유적 표현이 오늘의 상황에서 어떤 의의를 가지는 것에 은유의 본질적 특성이 있음을 눈치 채게 된다. 그리고 은유는 나아가 존재나 리얼리티가 구체적으로 어떤 특성들로 규정되는가에 그 본질이 있기도 하다.


바다는 키 큰 향기로

내 가슴에 닿아

그리움이 된다

멀리 떠나기만 하던 기억들이

밀물져 올 때

마스트에 앉은 갈매기는

시간을 쪼아먹고 날아가 버린다

마른 입술에 맴도는 언어들이

푸른 손수건으로 날아가버리고

밤은

항구 밖으로 배들을 밀어낸다


독자의 시 <항구> 부분


<바다=향기=그리움, 기억=밀물, 갈매기=시간, 언어=손수건=그리움>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 되면서 항구를 떠나는 배를 그리움으로 형상화 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마주침 혹은 대결 구도의 진폭이 크고 첨예해질 때 은유의 깊이는 더 커지며 역동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시간을 먹는 갈매기’에서 은유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다.


시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그것을 한마디로 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생각의 접점은 창조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위 시에서 ‘푸른 손수건으로 날아가는 갈매기’나 ‘항구의 배들을 밖으로 밀어내는 밤’은 시인의 내면적 충돌에 의해서 만들어낸 창조의 모습이다. 이 시에서 이해가 쉽게 가지 않는 것은 그것이 시인의 독창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창조 되었기에 그 본질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창조의 세계는 어떠한 것일까. 프라이에 의하면 창조란 말은 그것이 암시하는 생물학적 유추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그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 곧 신에 의해서든 아니면 자연스럽게든 창조의 유일한 의도는 의도 자체를 제거하는 활동으로 규정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의존성을 제거하는 것이며, 어떤 다른 것과의 관계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창조 자체가 수반하는 개념 사이에 전개되는 어떤 그늘도 파괴하는 것이다.


소나무 숲 아래 앉은

작은 바위 하나

발길을 잡아끈다

지친 걸음 벗어 두고

다리쉼을 할 수 있는 그곳엔

작은 풀들 새록새록 자라나고

머리 들어 하늘이 내려앉는다

바람이 살랑 스치면

그리움이 한웅큼씩 떨어진다

작은 옹달샘으로 고인다

그리움은 계곡물이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된다

소나무 숲 앉은 바위 하나

먼 바다를 향해 달려드는 그곳엔

작은 돛단배 하나

망망 바다 위 길을 잃었다


                     독자의 시 <풍경> 전문


위 시에는 몇 개의 은유가 차용되어 있다. 그것은 ‘머리 들어 하늘이 내려앉는다’ 와 ‘그리움이 한웅큼씩 떨어진다’ ‘그리움은 계곡물이 되고~바다가 된다’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은유의 사용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역동적이지 못한 것은 그 은유가 이미 낡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비슷한 형으로 씌여졌거나 상식의 틀에 갇혀 있는 경우가 된다. 그리움이란 관념이 이미 은유의 모습을 지니더라도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만큼 신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낡은 관념의 사용은 창조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관계성을 제거하지 않고 그것을 노출시킴으로서 새로운 질서의 통합에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시를 창조의 세계라고 했을 때 남는 것은 무엇일까. 프라이는 <아무리 인간의 지식이 증가해도 끝끝내 그 자체 속에 신비를 내포하는 신비의 세계>로 파악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시는 시 자체에 신비를 포함하고 있다는 말이다. 신비로움을 간직하지 못한 것은 창조와는 거리가 멀다는 내용이다.


요즘 씌여지는 시들은 대개 일반적인 은유 형식 보다는 예기치 않은 난폭한 은유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복잡한 현대 생활의 면면을 형상화 낼 수 없기 때문이며 그것으로밖에 삶의 동일성을 증명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동일성 역시 은유라는 반어적 역설적 구조에 의해서, 그러니까 마주침 혹은 화해의 형식에 의해서만 증명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성과, 이성의 저변에 있는 정서나 감각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업이기도 하다. 현대시의 과제가 되고 있는 엘리엇이 주장한 감수성의 통합은 그것을 수행한다.


문학의 논리가 회귀하는 곳은 리얼리티라 할 수 있다. 은유 역시 이제까지 기본 원리로 드러났던 것이 전이, 마주침, 장력, 존재, 동일성 회복, 화해의 형식 등은 모두 이 리얼리티의 공간에 수렴되는 것들이다. 이 시대의 리얼리티가 유일하게 신화의 세계에 있다면 신화 역시 우리에게 리얼리티의 공간으로 다가 올 것이다.

리얼리티란 무엇인가? 모든 창조의 세계가 어떤 의도로부터 벗어난다는 바로 그것이 의도일 때, 모든 창조가 지향하는 세계는 추상적으로 리얼리티의 세계로밖에 부를 수 없다. 사실의 사실성, 사실의 사실다운 특성, 은유의 본질은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어떤 국면들로 파악되는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휠라이트는 리얼리티를 세 가지 특성으로 요약한다.


1) 리얼리티는 <너와 나의 관계>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곧 만남의 형식, 화해의 형식이다. 물론 이 형식은 단계적으로 <마주침-대결-긴장-화해-자기 동일성 증명>의 과정을 밟아 가기도 한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며 또한 장력이기도 하다. 이 말은 주체적 타아로서의 <너>와 주체적 자아로서의 <나>가 서로 만나 새로운 의미에로 접근해 간다는 말이다. 이런 만남은 모든 사물에도 해당된다. 존재의 개발이나 존재인식은 리얼리티의 이러한 특성이 환기하는 반사적 상상적 행위에 의하여 증대될 수 있다. 반사적이란 긴장, 곧 장력의 과정을 의미하며, 상상적이란 화해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존재는 장력인 것이다>라는 명제가 성립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2) 리얼리티는 합동적이고 상호 침투적이다. 리얼리티를 이러한 특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데카르트적인 명제, 곧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주체와 객체의 양분법에 의해서 사물의 본질을 탐구함은 사물의 총체성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데카르트적인 양분법은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체와 객체는 사실상 모든 상황에서 상호보족적인 관계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들은 상호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존재한다는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가장 소박한 문맥이지만 <존재>는 상호 보족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합동적이란 말을 우리는 상호보족적이란 말로 환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의 경우 합동의 제 1유형은 자아와 비자아와의 합동, 제2의 유형은 특수성의 세계와 보편성의 세계와의 합동이다. 또한 합동은 시간적 차원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영원한 실재이 자각을 유동의 관념에서 파악한 베르그송의 원리가 바로 그것이다. 이 원리가 이론적 토대가 되어 많은 예술가들이 예술원리로 수용하는 변형의 원리 등이 시간적인 합동을 황기하는 예일 것이다. 현대예술의 한 커다란 특성으로 따라서 합동의 개념은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합동은 어쩔 수 없이 상호 침투성을 전제로 한다.


3) 리얼리티는 개별적 시점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잠재적이기도 한 그것은 휠라이트는 시점적이라고 규정한다. 모든 저작은 시점적이며 그 글을 쓰는 작가가 서 있는 자리 여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며, 그의 서 있는 자리야말로 모든 글을 태어나게 하는 모태가 되는 것이다. 작가의 시점은 그러므로 보편적 시점과의 차이가 아니라 이미 표준화된 일상적 시점과 이제 자기가 서있는 자리에 의해서 나타나는 신선한 시점과의 차이, 곧 일상적 표준적 시점인가 개별적 시점인가를 인식해야 한다는데 중요성이 있다.

리얼리티가 시점적이라고 하는 것은 작가의 경우, 그가 얼마나 신선한 문맥, 곧 비전을 제시하는가에 따라 분별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순수한 시점이 과연 독창적으로 창조될 수 있는가에 있다. 순수한 시점은 부분적으로만 창조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적 창조에 시인은 참여하고 있다. 이 부분적 시점 창조, 곧 부분적으로 리얼리티를 창조한다는 것은 그러나 부질없는 작업이 아니다. 리얼리티는 언제나 순수하게 전체가 획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리얼리티를 잠재적이라고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리얼리티는 분명하게 계발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은폐되고 내면적으로 그 부분들을 숨기고 있다. 그것은 휠라이트가 인용하고 있는, <자연은 은닉을 사랑한다>라는 헤라클루투스의 말로 집약되고 있다. 따라서 시인은 <진리는 귀금속처럼 합금의 양식으로 훌륭하게 제시된다>는 평범하나 매우 진실한 말에 귀를 기울인다. 은유는 궁극적으로 이런 논리에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