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2일 문경 문학아카데미 윤제림 시인 강의)
<無等의 詩> (무등의 시)
시, 생명에 대한 공경과 예의
내가 가도 되는데
그가 간다.
그가 남아도 되는데
내가 남았다.
- 「사람의 저녁」
뱀을 볼 때마다/소스라치게 놀란다고/말하는 사람들//사람들을 볼 때마다/소스라치게 놀랐을/뱀, 바위, 나무, 하늘//지상 모든/생명들/무생명들//
-함민복, 「소스라치다」
늘
강아지 만지고
손을 씻었다
내일부터는
손을 씻고
강아지를 만져야지
-함민복, 「반성」
감푸른 바다 바닷 밑에서/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길이나 대구리가 클대로 컸을 때//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꼬리치고 춤추며 밀려다니다가//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살기 좋다던 원산 구경이나 한 후//이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밤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고/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쨔악 짝 찢어지어/내 몸은 없어질지라도/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 양명문,「명태」
시, 두두물물(頭頭物物) 가가호호(家家戶戶) 생각
내 집 속의 방바닥 틈새엔 쥐며느리의 집이 있고 천정엔 쥐들의 집이 있다 문밖을 나서면 집 앞의 나무 위에 까치의 집이 있고 문 앞의 바위 밑엔 개미들의 집이 있고 텃밭엔 굼벵이들의 집이 있다 산은 나무들의 집이다 나무 사이엔 새들과 숱한 곤충들의 집이 있다 들판은 풀들의 집이요 우주는 별들의 집이다 그리고 나는 내 마음의 집이다
- 유승도, 「집」
냉이 한 포기까지 들어찰 것은 다 들어찼구나/네잎 클로버 한 이파리를 발견했으나 차마 못 따겠구나/지금 이 들녘에서 하나라도 축을 내면/들의 수평이 기울어질 것이므로//
- 정채봉, 「들녘」
시, 무등(無等)의 정신으로 가는 길
청마(靑馬)처럼 길을 건너다가,//김수영(金洙暎)처럼/집에 가다가.//
-「고양이가 차에 치었다」
몹쓸 병이 돌아서, 생매장//돼지들이 떠난/축사 앞에서 주인이 눈물을 훔친다/조금 있으면 내다 팔 것들인데,/다 컸는데....//돼지들은 대개 동갑일 것이다//뉴스 끝에는 내 동갑도 나왔다/고시원 옥상에서 몸을 던진 사람/흑룡강에서 온 사람/나이를 짚어보니 돼지 띠/세상에 내다 팔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잘 가라, 동갑네야/복 있으라/사해(四海)의 돼지들아!//
-「동갑(同甲)」
나 어릴 때 학교에서 장갑 한 짝을 잃고/울면서 집에 온 적이 있었지/부지깽이로 죽도록 맞고 엄마한테 쫓겨났지/제 물건 하나 간수 못 하는 놈은/밥 먹일 필요도 없다고/엄마는 문을 닫았지/장갑 찾기 전엔 집에 들어오지도 말라며//그런데 저를 어쩌나/스리랑카에서 왔다는 저 늙은 소년은/손목 한 짝을 흘렸네/몇 살이나 먹었을까 겁에 질린 눈은/아직도 여덞 살처럼 깊고 맑은데/장갑도 아니고 손목을 잃었네/한하운처럼 손가락 한 마디도 아니고/발가락 하나도 아니고/손목을 잃었네//어찌할거나 어찌 집에 갈거나/제 손목도 간수 못한 자식이/저 움푹한 눈망울을 닮은/엄마 아버지 아니 온 식구가, 아니/온 동네가 빗자루를 들고 쫓을 테지/손목 찾아오라고 찾기 전엔/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찾아 보세나 사람들아/붙여 보세나 동무들아/고대로 못 붙여 보내면/고이 싸서 동무들 편에 들려 보내야지/들고 가서 이렇게 못 쓰게 되었으니/묻어 버려야 쓰겠다고/걔 엄마 아버지한테 보이기라도 해야지/장갑도 아니고/손목인데.//
-「손목」
나는 곧 인도에 도착할 것이다, 길을 모르니/릭샤를 부를 것이다//체중 미달로 병역이 면제된/본희 형보다 가냘픈 사내에게/꽃을 밟아도 꽃잎 하나 다치지 않았을/피천득 선생만큼 가벼운 남자에게 몸을 맡길 것이다//사내는 나를 옮겨 실으며/눈으로 물을 것이다/뭐가 들어서 이렇게, 불룩하지요?//그러고는 옛날 서울역 지게꾼처럼/기를 쓰고 일어나며 페달을 밟을 것이다/릭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할 때/맨발의 사내는/혼잣말처럼 또 이렇게 물을 것이다/무슨 물건이 이렇게/무겁지요?//
-「내가 살을 빼야 하는 이유」
“내 죽으면, 내가 쓰던 악기를/함께 묻어다오”/그리하여, 하늘나라에도 피리 가야금 아쟁.../트럼펫 바이올린 첼로... 악기가/하나 둘 늘어가는 것인데//피아노를 묻어달라는 음악가는 아직 없었다/그 크고 무거운 것을 땅 속에 넣으려면/사람들 힘도 많이 들 것이고/하늘로 옮기기는 또 얼마나 수고로운 일이겠는가/피아니스트들은 미안해서 미안해서/말도 못 꺼냈다//그리하여 온갖 음악이 울려 퍼지는 곳/하늘나라에 아직/피아노가 없다.//
-(동시),「피아노2」
시, 이산(離散)가족의 안부 확인
한 소리 또 하고/또 하고,// 당숙은 죽어서 산새가 되었다.//한 노래 또 하고/ 또 하고.//
- 「당숙은 죽어서 새가 되었다」
남편은 무던히도 귀가 얇구나/이번에는 신선(神仙)을 따라 달에 갔단다//떡방아를 찧는다는 소문도 있지만/실은 약을 찧으며 산단다/남편의 행방을 묻는 내게/박봉술(朴鳳述) 씨와 김연수(金演洙) 씨 두 사람은/딱 잘라 말했다//“토생원은 월궁 가서 도약(搗藥)하며 지낸다오”//남편이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는/박초월(朴初月) 씨 말만 믿고 한 삼백년/산만 뒤지고 다닌 세월이/기가 막히다/사연을 알면서도 본체만체 바둑만 두던/방장산 신선이 밉고 또 밉다//여자도 생겼다는데/오늘은 달도 밝아/남편의 커다란 귀도 보이는데/언제나 열리려는가/월궁 가는 길은/아직도 공사 중이다.//
* 박봉술, 김연수, 박초월은 판소리 명창 ** 도약; 약을 찧음
-「토끼부인의 망부가」
먼저 떠나간 당신이 어디선가 나의 결말을 보게 되었을 때/용케 살아남았지만, 더 이상의 반전은 없을 거라고/전문가들이 입을 모을 때,/그 소리가 내 귀에도 다 들릴 때//주인공이라고 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많지 않을 때/주인공의 애인이라고 해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때//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는 습관처럼 태연히 피었고/당신 눈에도 익은 울긋불긋 꽃 대궐을 배경으로/대우합창단이나 선명회 합창단이 부르는/고향의 봄이 울려 퍼질 때//당신은 새 애인이랑 객석에 앉아있고..../나는 아직/화면 속에 있을 때.//
-「우주의 관객」
시, 묵은 것 속의 햇것
대여섯 살 먹은 여자아이와 서너 살 사내아이/어린 남매가 나란히 앉아 똥을 눈다/먼저 일을 마친 동생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쳐든다/제 일도 못다 본 누나가/제 일은 미뤄놓고 동생의 밑을 닦아준다/손으로/꽃잎 같은 손으로//안개가 걷히면서 망고나무 숲이 보인다/인도의 아침이다.//
-「예토(穢土)라서 꽃이 핀다」
허구렁 속 빠져나가/비로소 제 무게로/제 세상으로 내려앉는/묵은 것들//새 것 온다, 햇것이 온다/반가이 튀어 오르며/흔쾌히, 가운데 자리 내주며/비켜 앉는 더/묵은 것들.
- 「굴(窟)-해우소(解憂所)」
식당에도 여관에도 장마당에도/인간의 상품보다는/하늘나라 물건이 흔하더군//세숫물도 목욕물도/신과 짐승과 사람이 함께 쓰더군//물건 참 오래 쓰고 곱게 쓰더군/만년(萬年) 묵은 눈이/아직도/새 것이더군.
-「설산 가는 길 2 」
시, 밥값 걱정
장 씨네 시금치/박 씨네 콩나물/최 씨네 고사리/임 씨네 도라지/김 씨네 고추장/이 씨네 밥/심 씨네 국//앉아서 일곱 집의 음식을 빌었네//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절 마을의/산채비빔밥.//
- 「탁발(托鉢)」
아침 됩니다 한밭식당/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낯 검은 사내들/모자를 벗으니/머리에서 김이 난다/구두를 벗으니/발에서 김이 난다//아버지 한 사람이/부엌 쪽에 대고 소리친다/밥 좀 많이 퍼요.//
- 「가정식백반」
청소당번이 도망갔다/걸레질 몇 번 하고 다 했다며/가방도 그냥 두고 가는 그를/아무도 붙잡지 못했다//“괜히 왔다 간다”/가래침을 뱉으며/유유히 교문을 빠져나가는데/담임선생도/아무 말을 못 했다.//
*중광(重光,1935~2002)
- 「걸레스님」
시, 지구 생각
녹색 셔츠, 그의 강연이 끝났을 때/한 청년이 물었다/“선생님 댁엔....냉장고가 없다는데/사실인가요?/냉장고 없이 어떻게 살지요?”//흰 수염에 녹색 셔츠, 그가 말했다/“지구상에 냉장고 없는 집이/냉장고 있는 집보다/몇 배, 아니 몇십 배 더 많아요...”///청년이 읍(揖)을 하며 예를 갖췄다//자전거를 끌고 온/녹색 셔츠에 흰 수염/집에 냉장고도 없는/사람에게.//
* 환경운동을 하는 디자이너, 윤호섭(1943~)
- 「냉장고도 없는 사람에게」
종이로 만든 관이 나온다지요. 반갑고 고마운 일입니다. 죽은 친구를 들고 산길을 올라가봐서 아는데요. 목관은 생각보다 무겁더군요. 값을 물어봐서 아는데요. 보기보다 비싸더군요. 종이로 만들면 가벼워서 좋을 것입니다. 가난한 상주들에게 좋을 것입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지질(紙質)인데요. 제발, 종이컵이나 라면용기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주세요. 태우면 곱게곱게 하늘로 오르고, 묻으면 고분고분 흙이 되게요. 물에 지면 꽃잎 같고, 바람에 날리면 눈송이 같게요. 적어도 이 ‘사람의 그릇’만은 일회용품 규제대상에 포함되지 않게요.
-「어떤 신제품에 관한 소비자의 의견」
1932년에 지구를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①주변의 권유 ②광고 ③기행문 ④홍보영화 ⑤기억나지 않음
지구에서 즐거우셨습니까?
①매우 그렇다 ②그렇다 ③그저 그렇다 ④아니다 ⑤전혀 아니다
기회가 되면 지구에 다시 오시겠습니까?
①매우 그렇다 ②그렇다 ③그저 그렇다 ④아니다 ⑤전혀 아니다
잊을 수 없는 지구인 한 사람만 꼽는다면?
( )
- 「아버지는 어떻게 답하셨을까」
시, 다른 세상에 관한 생각
이륙하려다 다시 내려앉았소/귀환이 늦어질 것 같구려//달이 너무 밝아서 떠나지 못했다는 것은 핑계, 실은/사과 꽃 피는 것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차일피일/결국은 또 한철을 다 보내고 있다오//누가 와서 물으면 지구의 어떤 일은/우주의 문자로 설명하기도 어렵고/지구의 어떤 풍경은 외계의 카메라에는/담기지 않는다고만 말해주오//지구가 점점 못쓰게 되어간다는 소문은 대부분 사실인데/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것들이 너무 많소/어르고 달래면 생각보다 오래 꽃이 피고/열매는 쉬지 않고 붉어질 것이오// 급히 손보아야 할 곳이 있어서 이만 줄이겠소/참, 사과꽃은 당신을 많이 닮았다오.//
- 「부석사에서」
을해생(乙亥生) 안 씨 할머니가 이제 와서 한글을 깨쳐보겠다고 검정고시학원에 딸린 한글반 학생이 된 까닭은 전주 가는 버스를 탔는데 진주에 부려지고 싶지 않아서다. 아니, 어느날 저승에 가서도 그럴까 더럭 겁이 나서다. 거기선 글자 하나 잘못 읽으면 영판 엉뚱한 세상으로 간다지 않는가. 길 한번 잘못 들면 한 칠만 팔천 리쯤 엇나가서, 고쳐 잡자면 이천 삼백년 쯤 걸린다지 않는가//한글공부가 쉬이 끝나면, 한자도 조금 익혀볼 생각이다. 그 나라 공문서는 아무래도 한자가 많이 섞여 있을 것 같아서다.//
-「안씨의 공부」
시, 아득한 생각
바람이 깃발을 만나러 왔는데 깃발이 없다. 하릴없이 어디만큼 가던 바람이 그럼 깃대라도 쓸어보고 가자고 돌아서 왔는데 이번엔 깃대가 없다.
-「당간지주(幢竿支柱)」
지구가 한 송이 꽃이란 사실을 유리 가가린보다 먼저/닐 암스트롱보다 먼저 알고 온 사람이 있었다/가야산 수덕사에 그의 글씨가 있다/세계일화(世界一花), 세계는 한 송이 꽃/어디서 보았을까//달에서 보았을 것이다/월면(月面)이란 이름도 쓰던 사람이니까//1946년 어느 날, UFO를 타고/돌아갔을 것이다/아무도 보진 못했지만/그 탈것엔 온통/꽃그림이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앞 유리창엔 행선지 표시가 있었을 것이다/만공(滿空)//
* 만공 스님(1871-1946)
-「만공약전(滿空略傳)」
<붙임>
윤제림 詩選
사랑을 놓치다.
-청산옥에서 5
내 한때 곳집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대는 번번이 먼 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 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대가 옆방에 든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명사산 달빛 곱던,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가는 봄
-청산옥에서 8
조금 더 보고 싶은 대목인데,
화면이 바뀝니다. 주인의 짓입니다.
객실 어디선가 툴툴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주 잠시!
조금만 더 바라보았으면 싶은 얼굴들인데,
봄꽃은 너무 빨리들 집니다.
桃花년이 조 앙탈을 부리는 듯 했으나
이내 꽁무니를 보였습니다.
外燈마저 나가고,
결국, 꽃도 아닌 나만 남았습니다.
재춘이 엄마
재춘이 엄마가 이 바닷가에 조개구이집을 낼 때
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그냥 ‘재춘이네’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
보아라, 저
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
재춘이 엄마가 저 간월암(看月菴) 같은 절에 가서
기왓장에 이름을 쓸 때,
생각나는 이름이 재춘이 밖에 없어서
‘김재춘’이라고만 써놓고 오는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만 그러는 게 아니다
가서 보아라, 갑수 엄마가 쓴 최갑수, 병섭이 엄마가 쓴 서병섭,
상규 엄마가 쓴 김상규, 병호 엄마가 쓴 임병호.
재춘아, 공부 잘해라!
시인 이성선
이제 와서 이야기지만, 그 사람 간첩입니다. 그가 저쪽과 내통하는 것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요. 우리 일행이 티베트 고원 일몰에 넋이 나가서 카메라에 끌려 다니던 어느 저녁, 그는 홀로 붉은 끝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사람이 저기까지 가도 되나 싶은 곳이었습니다.
점 하나가 되어 멈추더군요. 교신포인트였겠지요.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가슴께로 모으면서 온몸을 대지에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없는데 접었다 펴고, 폈다가 접고, 던졌다 주워들고, 주웠다가 내던지고. 저 혼자 소리쳤지요. 저 사람 저쪽 사람 맞다.
간첩을 목격한 사람 가슴이 보통 벌렁거렸겠습니까. 게다가 간첩과 보름 동안 한방을 쓴 사람이. 그 이후엔 한 번도 못 보았지요. 아마도 무사히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날, 하늘나라 직영 목장 같은 해발 오천 미터를 넘어가던 날, 거기서 상부의 귀환 지시를 받은 거지요.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나면 연락 주십시오.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 > 우리 말♠문학 자료♠작가 대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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