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벌레
이상인
산행 중에 자벌레 한 마리 바지에 붙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는 연초록 자
자꾸 내 키를 재보며 올라오는데
가끔씩 고갤 좌우로 흔든다.
그는 지금 내 세월의 깊이를 재고 있거나
다 드러난 오장육부를 재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끈질기게 자라나는 사랑이나 욕망의 끝자락까지
또 고갤 몇 번 흔들더니 황급히 돌아내려 간다.
나는 아직 잴 만한 물건이 못 된다는 듯이
잰 치수마저 말끔히 지워가며
-시집『UFO 소나무』(황금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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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숲을 고요하다고 했을까. 평화롭다고 했을까. 인간의 잣대로 보면 푸른 녹음이 우거진 숲은 맑은 공기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어우러져 한없는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 준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편안함과 휴식을 즐기려고 산을 찾지만 그 곳이 생의 터전인 새와 벌레들에게는 결코 평화롭거나 아늑한 곳이 아니다.
이른 봄 숲 속을 들여다보면 새잎이 나면서 벌레들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제각각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나뭇잎에 달라붙어 먹이 걱정이 없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호랑나비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먹이인 산초나무가 없으면 호랑나비는 살아갈 수가 없다. 호랑나비 개체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은 환경파괴로 인한 먹이공급의 부족을 한 원인이기도 하지만 천적인 새들의 공격을 무사히 피해야만이 성체로 자라 몇 개월 정도의 일생을 보내다 가는 것이다.
새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벌레들이 깨어나는 시기에 맞춰 알을 부화시켜 새끼를 키운다. 먹이인 벌레들 또한 생존투쟁이 쉽지만은 않다.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몸의 색깔을 나뭇가지로 위장하거나 푸른 이파리 색으로 바꾸어 새의 눈을 속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봄 산행에서 제일 많이 마주치는 것이 이 자벌레인데 가끔 가는 줄에 몸을 싣고 공중을 타고 내려오는 녀석들과 조우할 때가 있다. 이렇게 위험천만하게 목숨을 걸면서까지 이동하지 않으면 안될 나름의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먹이 부족으로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거나 아니면 성체를 위한 변태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 속에 나오는 자벌레 한 마리는 길을 잃고 그만 바지에 붙어버리고 말았는데 이 자벌레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다. 키는 물질인데 먼저 키를 재보려고 한다고 한다. 가끔씩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을 세월의 깊이를 재거나 내부를 홀라당 까집어 오장육부를 재어보는 것으로 확장한다. 나아가 인간이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사랑과 욕망까지 재어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의 클라이맥스는 마지막 2행이다. 잴 만한 물건이 못 된다고 이미 재어 놓은 치수마저 지우면 내려간다고 한다. 당신은 이 세상에 잴 만한 물건이 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 같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자벌레가 잴만한 물건이 되는지 한번 곰곰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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