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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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만난 것은 기억도 잘 안 나지만 몇 십 년 전의 일이다. 시보다 수필을 수필보다 소설을 즐겨 읽던 시절에 책방에 들렀다가 김희보님의 문고판 작은 시집을 한 권을 샀다. 얼마 후 이 시선집은 분실했는데 누가 말도 없이 가져가서 돌려주지 않았다. 내 방을 들락날락하던 중학생 동생 친구들이 가져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그 작은 시선집 속에 이 시가 들어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지금은 없어진지 오래 되었지만 서울 4대문 안 종각 옆에 종로서점이 있었다. 그 곳에서 다시 이 책을 만났는데 크라운판으로 크기도 커졌을 뿐 아니라 시도 훨씬 더 많이 실려 있었다. 종로서적에서 출간한 김희보 편저 韓國의 名詩 1986년 6월 30 개정판에는 755편의 시가 실려 있다. 책 값은 4800원...
이 시선집의 생명파와 자연파의 풍토 편에 유치환 시인의 시가 첫머리에 나오는데 깃발, 그리움의 제목 시 2편, 춘신, 바위, 생명의 서, 울릉도 등 20편의 시 중에 이 ‘행복’이라는 시가 들어 있다. 당시 틈틈이 시를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은 시는 제목에 동그라미를 했는데 ‘행복’ 시에도 동그라미가 쳐 있다. 이후 한동안 시를 보지 않다가 인터넷이 집집마다 연결이 되고 다음과 네이버에 카페가 생기면서 다시 시를 보기 시작했는데 문득 이 시선집이 생각났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인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이번에는 증보판 ‘한국의 명시’ 김희보 편저 도서출판 가람기회에서 펴냈는데 초판 3쇄 2003년 3월이다. 크기는 전 편과 비슷하나 수록된 시는 1005편으로 늘어났고 가격은 1만 5천원. 나중에 없어진 책이 어디선가 나와 졸지에 한국의 명시 시선집이 두 권이 돼버렸다.
총1005편이 수록된 이 시선집에는 신체시와 낭만시의 풍토 편 첫머리에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시작하여 순수시와 주지시의 풍토 편에 박용철 정지용 시인 등..., 생명파와 자연파의 풍토 편에 유치환, 이육사, 이호우 시인 등...광복과 50년대의 풍토 편에 조병화, 박인화 시인 등...탈북파와 북한시의 풍토 편에 임화, 이용악 시인 등... 동란후의 60년대의 풍토 편에 천상병, 박용래, 신동엽 시인 등...70년대 이후의 여러 경향 편에 강은교, 김지하, 김준태, 이시영, 정희성, 송수권 시인 등 많은 시인들의 시가 몇 편씩 실려 있다.
이 시집을 선전하려는 것도 아닌데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이 시선선집을 보면 한국 현대시 전반의 흐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시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가끔 이 시집을 들춰보는데 특정 시를 찾을 때도 있지만 그냥 어느 쪽을 펴봐도 난삽한 시는 없다. 있다면 이상 시인의 시 오감도를 비롯하여 숫자로 쓰여진 시 정도일 것이다. 그 중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로 시작되는 띄어쓰기를 무시한 ‘거울‘ 이라는 시는 읽기를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만큼의 빨아들이는 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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