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고 -수필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박철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0. 4. 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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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박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꾹 쑥꾹 쑥꾹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꾹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ㅡ시집『영진설비 돈 갖다주기』(문학동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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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때문이었을까요. 화자는 영진설비에 외상으로 한 하수구 뚫은 노임을 갚으러 아내의 심부름을 갑니다. 가다가 비를 만납니다. 비 그치기를 기다리다가 그만 맥주를 마시는 바람에 갚지를 못했습니다. 두 번째 길을 나서다가 이번에는 자스민을 삽니다. 받아야할 돈을 주지 않으니 영진설비 아저씨는 집으로 찾아옵니다. 남편에게 외상 값 갚으라고 두 번이나 돈을 주었는데도 집까지 찾아왔으니 아내의 심기가 편할 리가 없었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구구한 변명 따윈 먹힐 것 같지도 않고 화자는 멋쩍은 웃음만 웃습니다만 영진설비 아저씨 돌아가고 난 뒤 아내에게 어떤 한소리 들었을까요. 오늘도 숲 속 깊은 곳에서 쑥꾸기는 울고 생활의 비는 내리고 있을까요. 살다보면은 갚아야할 외상값이 돈 말고도 다른 그 무엇도 있을 것입니다. 시인에게 있어 먹고 싶은 맥주 한 병도 곁에 두고 싶은 자스민 한 그루도 갚아야할 어떤 외상값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는 유효기간이 얼마나 될까요? 유통되자마자 소비가 안돼 바로 잊혀지는 시가 있는가 하면은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 개벽판은 1922년이니 100년이 되어갑니다. 이 시는 조선일보에서 연재된 '한국 현대시 100주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에도 들어가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일반인들에게 희자되고 선호하는 시입니다.

.
  어느 문학지에서 봤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그 분은 자기의 경험에 비춰볼 때 수필은 5년이면 그만인데 시의 유효기간은 한 30년쯤 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들은 유효기간도 채우지 못한 채 폐기처분이 되고 서점에서는 시 판매대가 없거나 한쪽 구석에 밀려나 있다고 합니다. 수요가 없는데도 공급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 시는 시장 원리의 유통구조와는 다른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음식도 좋아하는 기호가 다르듯 좋아하는 취향의 시도 다 다를 것입니다. 난삽시를 읽다가 머리가 아플 때는 고정희 시인의 전집이나 신경림 시인의 시, 임영조 시인의 시도 그렇습니다만 이런 시집들은 꺼내서 아무 쪽을 들춰서 읽어봐도 아픈 머리가 사라지는 듯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시들을 찾아서 읽어보면 시를 읽는 재미가 더 쏠쏠할 수도 있겠습니다. 고로 좋은 시의 유통기간은? 없다 그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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