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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고루에서
백향옥
서러운 술 한 병 들고 그대 무덤에 벌초하러 가는 가을
먼저 서러움을 잊었습니다. 그대를 잊고, 무덤을 잊고, 음복
도 잊고
강을 따라 바람이 옵니댜.
물결을 흔들고 와서는 잘 익은 들판의 이마를 쓰다듬고 갑
니다.
당신의 흰 뼈가 출몰하던 무덤은 평지가 되었습니다.
빈손이냐고 묻지 않는 당신이 좋습니다.
어쩌면 서러움도 버렸는데 아까울 것 없습니다.
한 김 잘 오른 떡시루처럼 따사로운 빛제 잠깁니다.
맑은 술 한 잔 벌판에 드립니다.
강물에도 한 잔 올립니다.
언젠가 오래 당신을 기다리며 늙어가고 있을 거라 했지요.
그런 말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내게 찌그러진 눈 하나를 주고 갔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하시겠지만
절벽 아래를 흐르는 물결무늬가 새롭습니다.
강마다 제 나름의 물결을 다르게 만드는 줄을 여기 와서 봅
니다.
해가 지는 강으로 당신이 옵니다.
당신은 당신의 새 얼굴을 모르겠지요.
맑은 술 한 병 가을 들녘에 걸어두고 왔습니다.
서러움은 천 길 절벽 위 고루에 남겨두었습니다.
⸺계간『詩하늘/통권 100호 특집』(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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