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동시인 권오삼
동시를 쓰는 이들에게
취재, 정리 : 최현정
‘동시인’ 하면 떠오르는 아동문학의 ‘어른’이 있다. 1975년 동시로 등단, 아동문학 시장이 싹트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동시’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시인 권오삼. 수원의 자택으로 찾아가 4시간 가까이 살아온 이야기, 권정생 작가의 이야기, 동시에 대한 그리고 아동문학에 대한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70년대에는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80년대에는 장사를 하면서 90년대 후반부터 사업을 접고 동시쓰기에 전념하기까지 그가 살아온 다양한 인생이 현실 참여 동시집부터 동심이 가득 담긴 저학년 동시집과 고학년 동시집까지 그가 만들어낸 시세계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처음부터 ‘동시를 쓰는 이들에게’라는 주제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만났던 것은 아니었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지 한참동안 망설였다.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여러 번 듣다 보니 마치 ‘동시 창작 개론’처럼 경험을 토대로 한 동시 창작의 원칙 혹은 노하우로 정리할 수 있었다. 경험을 토대로 전하는 생생한 동시 창작 개론, 이번 호 만남에서는 동시를 쓰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그의 이야기를 담았다.
주변의 사물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라
“나는 95년에 수원으로 와서 13년 동안 여기 공원에서 동시를 썼어요. 그러고 보니 시집 네 권이 여기서 나온 꼴이네요. 시를 쓰려면 사물과 교감이 있어야 해요. 내 가까이 있는 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면 돼요.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무심히 보면 안 돼요. 여기저기 다니며 많이 보면 인식의 폭은 넓어지겠지만 시가 되고 글이 되는 건 아니지요. 동시는 성인시와 달라서 삶의 깊이, 무게를 다룰 수 없잖아요. 내가 공원의 도토리나무를 소재로 서너 편 쓴 게 있는데, 만날 보는 도토리나무지만 어제 본 것하고 오늘 본 게 다르고, 계절에 따라 다르고, 또 해마다 보는 느낌이 다르지요.
얼마 전에 울산 암구대 반각화를 보고 왔어요. 같이 간 다른 동시인들은 반각화에 있던 고래랑 아기 고래를 보면서 시를 떠올렸을지 모르지만, 나는 길에 버려져 있던 아기 신발을 보고 시를 떠올렸어요. 설마 신발을 버렸을까, 잘못 두어서 잃어버렸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고 돌아오는 내내 그 신발이 눈에 밟혔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신발을 보고 시상이 떠올랐는데 아직 쓰지는 못 했어요.
작은 거라도 나에게 의미를 줘야 그게 시가 되는 거지요. 시인이라면 언제라도 사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사물이 다가오지도 않고 말도 걸지 않겠지요. 머리(의식)가 깨어있어야지요. 의식이나 감각이 깨어있어야 대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시가 쓰여 진다고 봐요.”
제대로 된 시 열 편만 써라
“일본 하이쿠의 대가 마쓰오 바쇼가 한 말이 있어요. ‘다섯 편만 쓰면 당신은 시인이다. 열 편을 쓰면 당신은 대가다.’ 여기서 말하는 다섯 편이나 열 편은 그냥 다섯 편이나 열 편이 아니라 제대로 쓴 다섯 편 열 편이겠지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우리나라 유명 시인들 중에도 좋은 작품 열 편을 가진 시인은 흔치 않다고 봐요. 김소월, 이상화, 김영랑 등 이들 시인의 작품 중에서 좋은 작품이 몇 편이나 되는지 생각해 봐요. 뛰어난 시가 열 편만 된다면 대단한 시인이지요. 그리고 그 시들이 시간의 무게를 견뎌내어 50년, 100년 뒤에도 남는다면 정말 대단한 거지요.
보들레르나 랭보, 김소월 같은 시인은 시집을 한 권만 냈잖아요. 시집은 평생 한 권만 내면 되는데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작품이 나올까 싶어 쓰다 보니 시집이 여러 권 되는 거지요.”
퇴고 과정에 많은 시간을 투여하라
“나는 지금도 습작생이에요. 미당 선생이 이런 말을 했지요. ‘작품은 언제나 미완성이다’라고. <어린이와 문학> 6월호에 발표한 「바람 부는 날」은 작년에 낸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있던 건데 다시 보니까 미흡한 점이 보여 고쳐서 발표했어요. 함께 발표한 「나무」도 다시 보니까 세 군데나 미흡해서 고친 뒤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 올렸어요. 쓸 때는 안 보이다가 활자로 된 다음에야 꼭 눈에 띈단 말이에요. 그래서 나는 아직도 습작생이에요.
완전하게 써서 첨삭할 때가 한 군데도 없다, 마음에 든다, 그래야 되는데. 김소월도 「진달래꽃」을 스무 번 정도 고쳐서 발표했다고 했나, 가끔은 발표한 작품을 다시 고쳐 보기도 하지만 고치지 않은 게 더 좋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고칠까 말까 고민하다가 보면 나 스스로 혼란에 빠져서 판단이 잘 안서요. 그럴 때는 시간을 두고 봐야 돼요. 쓴 작품을 묵힌 뒤에 다시 보고 나서 만족하면 발표를 해야 돼요. 몇 년 전에 쓴 거라도 계속해서 그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고쳐야 해요. 얼마만큼 그 작품에 시간을 투여했느냐가 중요하거든요.
쉽게 써서 급하게 발표하면 안 돼요. 두고 두고 고친 뒤에 발표해야 돼요. 나 역시 충분히 봤다고 생각하고 작품을 보낸 뒤, 발표된 작품을 보면 또 미진하거든요. 그래서 앞으로는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게 잘 안 돼요. 그래서 나는 아직도 습작생이에요.”
동화와 비교하지 마라
“동시를 동화와 비교하면 상대적인 박탈감이 들어요. 7,80년대에는 동화나 동시나 시장이 없어 대부분 자비 출판했고, 인쇄 출판은 거의 없었어요. 상대적 박탈감이 없었지요. 90년대 이후부터 동화는 아주 빠르게 시장이 커지고 동시는 느린 상태였으니까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껴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동시도 30년 전보다는 시장이 커졌어요. 나도 80년 초에 동시집을 자비출판을 했지만 그때는 거의 그랬어요. 동시는 동시인 지망생이나 동시인들끼리만 보는 거였어요. 돌이켜 보면 그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좋아졌어요. 지금은 경제적 여유도 있고, 부모들도 아이에게 동시를 읽히려고 하지요.”
동시는 본래 어려운 장르다
“동시가 동화보다 독자들에게 확산이 안 되는 이유는 운문문학의 특성 때문이라고 봐요. 시는 본래 어려운 거예요. 쉬우면 시가 아니고 유행가 가사여야지요. 서사문학은 스토리거든요. 이야기니까 사람들이 그 내용을 따라가면 되지요. 옛이야기는 지금 봐도 재미있잖아요. 시대를 초월해서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라든가 재미는 그대로 지니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시는 정서를 표현하는 거잖아요. 정서를 표현하다 보니 그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독자가 못 따라 오는 거지요. 정서라는 건 1학년과 3학년이 틀리고, 5학년하고도 틀리잖아요. 그래서 동시가 참 어려워요. 개선책은 있을 수 있지만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이원수 선생님 동시를 예로 들어볼게요. 이원수 선생님의 동시 200여 편 중에 아이들이 좋아할 동시만 4,50편 묶어서 동시집을 낸 게 있잖아요. 그러면 그게 베스트셀러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요. 왜 그럴까요? 공감하는 독자도 있지만 공감 못하는 독자도 있다는 거지요. 이원수 선생님의 좋은 동시는 삶을 표현한 것인데 요즘 독자들에게는 정서가 안 맞는 거지요. 이런 게 동시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요, 한계라고 봐요. 성인시는 그렇지 않지만.
동시가 안 팔린다고 해서 서운해 할 필요 없어요. 좋게 생각하면 동시는 동화와는 다른 고고한 물건이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보면 돼요. 그렇다고 동시 쓰는 걸 대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돼요. 아이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교훈을 주고, 아이들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심성을 곱게 하고……. 나도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동시를 썼어요. 그래야 내가 보람된 일을 하는 것 같고, 내가 하는 일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음악이나 그림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하듯 동시도 그렇게 즐겁게 감상하면 되는 것이고, 고급 오락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대단하게 여길 건 없다고 봐요. 독자가 소수더라도, 그 소수의 독자가 내 동시를 읽고 잠시라도 즐거웠다면, 잠시라도 기쁨을 맛봤다면 그걸로 족한 거지요.”
상상력을 해방시켜 틀 밖으로 나와라
“성인시 쓰던 시인들이 쓴 동시를 보고 나도 많이 느낀 게 있어요. 불성실한 답변일지는 모르지만 정직하게 말한다면 시는 고급 오락이라고 생각해요. 동시단에 있는 이들은 전형적인 동시를 고수하지요. 동시의 원줄기가 있다면 거기서 다양한 곁가지들이 뻗어 나와야 하잖아요. 그런 시가 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동시나 김기택, 최명란 시인의 동시라고 봐요. 말놀이 동시에도 약점이 있어요. 그게 한 권으로 그쳐야 하는데 2권, 3권, 4권 계속되면 첫 권의 모방밖에 안 된다는 거지요. 나는 그렇게 봐요. 정통적인 동시는 새로운 소재를 만나 발상이 참신하면 새로운 동시가 되지만, 말놀이 동시의 경우는 양적으로 늘이는 것뿐이지 매 권마다 새로울 수는 없지요. 상투성에 빠지기 쉽지요.
아쉬운 건 왜 동시인들은 이제까지 그런 동시 쓸 생각을 못했나 하는 거지요. 오래 전 나도 말놀이 동시를 몇 편 썼어요. 그땐 이건 동시가 아니다, 라고 낙인찍어 버리고 더 이상 안 쓴 거지요. 이제까지 대다수 동시인들은 틀 안에 갇혀서 벗어날 줄 몰랐어요. 그만큼 상상력이 빈곤했다는 거지요. 최승호 시인이나 김기택, 최명란 시인은 그런 면에서 자유로웠던 거예요. 동시인들은 교육적인 것에 매여서 거기서 벗어날 생각을 못했는데, 그 사람들은 그런 게 없었던 거지요. 그들이 그런 동시를 발표하면서 동시인들의 상상력을 자극시켜 주었다고 봐요.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동시만 쓰는 동시인들은 동시를 의미 있게 쓰려고 하고, 성인시를 쓰는 시인들은 동시를 그냥 재미있게 쓰려고 한다는 겁니다. 역할이 뒤바뀐 거예요. 표현 방법에서도 동시인이 써야 할 방법을 그들이 쓰고, 성인시인들이 써야 할 방법을 동시인들이 쓰고. 까닭은 성인시를 쓰는 이들은 의미나 메시지 따위는 성인시로 풀어낼 수 있으니 동시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동시를 발랄하게 재미있게 쓰려고 한 거지요. 그들은 성인시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동시로 풀어낸 거지요. 반면에 동시인들은 자신이 겪은 인생이라든가, 하고 싶은 말을 달리 풀어낼 길이 없으니 거꾸로 동시에다가 담아 보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느끼지요. 그러다 보니 동시가 무거워지고 딱딱해지고 그러는 거 같아요.”
꾸준히 실험시도 써보라
“동시를 쓸 때는 독자를 배려해야 돼요. 나도 예전에 뭘 모르고 쓸 때는 독자에 대한 배려가 없었어요. 지금은 쓰면서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해요. 작품을 읽을 때도 아이의 눈높이로 작품을 보려고 해요. 아이들이 이 작품을 이해할까? 어떻게 생각할까?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감응을 할까? 이런 걸 생각하면서 동시를 읽고 써요.
내가 쓴 시 중에도 순전히 내 문학적 욕심으로 쓴 게 있어요. 실험시라고 할 수 있는 건데 독자를 위해 쓴 게 아니라 순전히 동시문학을 위해서 쓴 거지요. 성인시에서는 실험시가 많이 나오잖아요. 동시도 필요하다고 봐요. 3년 전부터 시도하고 있는데 어려워요. 실제로 해 보면 실패할 확률이 높거든요. 지금까지 쓰던 시 쓰면 위험부담은 없지요. 하지만 새로운 것도 시도해 봐야 돼요. 동시문학을 위해서죠. 그렇게 하다보면 새로운 방향으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때가 있겠지요. 능력 있는 후배 동시인들이 실험을 통해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하고 설령 실험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건 작품이 실패한 것이지 시도 자체가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성인시도 여러 갈래가 있듯이 동시도 여러 갈래의 시를 위해 새로운 길을 찾으면서 계속 업그레이드 시켜나가야 돼요. 전통적인 방법에만 머물러 있으면 그냥 대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부터 현대적인 작품을 써야 몇 십 년 지나도 구닥다리가 안 되는 거지, 지금부터 현대성이 없는 시를 쓰면 5, 6년만 지나도 낡은 시가 되어 버릴 수 있지요. 오늘 새로운 것도 내일이면 낡은 것이 되잖아요.
동시를 쓰다 보면 고민거리가 많이 생겨요. 고민거리가 많다는 건 좋은 현상 아닙니까? 고민거리가 없으면 현실에 만족하고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보면 됩니다. 상품과 마찬가지로 작품도 늘 불만을 가져야 새로운 게 나오겠지요. 불만을 가지려면 현재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해요. 낡은 시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이 새로운 좋은 시를 쓸 수는 없는 거지요. 기성 동시인들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고 해야 합니다. 나도 노력을 하고 있지만 쉽지 않아요. 쉽지 않으니까 도전해 볼만 한 거지요. 새로운 형식과 내용, 기법으로 쓰느라 전달에 문제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어린독자를 제대로 배려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 어느 단계 이르면 독자 배려 문제도 해결된다고 봐요.”
최고가 될 수 있다, 용기를 가져라
“어떤 후배가 지금부터 30년 이내에 발표된 동시들을 보니 제대로 된 동시가 별로 없더라 해요.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기회가 좋네! 네가 조금만 잘 써도 되겠네.’ 했지요. 그렇지 않아요? 이제까지 마음에 드는 시가 별로 없다면 자신이 조금만 노력해서 쓰면 우뚝하게 드러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동시는 시시해, 좋은 동시가 없어, 그렇게 냉소적으로 부정만 해버리면 바람직하지 않지요.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쓰면 내가 아무리 잘 써도 돋보일 확률은 낮지요. 모두가 잘 못쓴다고 여겨질 때 생각을 바꾸어 내가 조금만 잘 쓰면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동시를 쓰면 좋잖아요. 권오삼 동시를 보니 형편없네,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권오삼이보다는 더 잘 쓰겠다, 이러고 쓰면 후배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신나고 통쾌하고 재미있어요. 그러니 용기를 내어 치열하게 작품을 쓰라고 말해두고 싶어요.”
권오삼 시인은 인터뷰 말미에 필자에게 ‘아동문학을 위해 애쓰는 젊은 사람’ 에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어 미안하다 했다. ‘젊은 사람들이 잘 해주길 부탁한다’는 말 속에는 아동문학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가 오랜 동안 동시인의 자리를 지키면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동시를 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고 있는 게 아닐까?
( 권오삼)
1943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5 월」이, 1976년 소년 중앙문학상에 「그네 타는 아이」가 각각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동시집으로 『강아지풀』, 『가시철조망』, 『물도 꿈을 꾼다』, 『고양이가 내 뱃속에서』, 『도토리나무가 부르는 슬픈 노래』,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이 있다.
(어린이와 문학 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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