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컵라면에 대한 단상 /강수경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3. 30.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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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라면에 대한 단상

 

강수경

 

 

비 내리는 날

때를 놓쳐 먹는 컵라면

창가에 서서 면발 같은 비를 보며 국물을 홀짝인다

바닥이 고르지 못한 보도블록 위에 고인 빗물

낡은 엘피판에서 잡음이 튀어 오르듯

파문이 인다

내 몸에 비 내린다

 

광화문에 집결했던 시위대는

최루탄에 밀려 명동골목으로 개미떼처럼 흩어졌다

눈물 콧물 만신창이로 동아리 방에

불나비처럼 모여 들었던 동지들

진혼곡을 부르며 컵라면에 독한 소주를 털어 넣고

이루지 못한 꿈에 시린 가슴을 칠 때도

몸속에 뜨거운 함성처럼 비 내렸다

 

빛바랜 간판의 불빛을 보고 들어간 여관

삐걱대는 낡은 침대

고른 숨소리로 잠든

녀석의 고단한 운동화를 나란히 놓아주고 나온 새벽

서늘하고 비릿한 공기가 폐부를 기웃거리는 종로의 좁은 뒷골목

편의점에서 컵라면의 마지막 면발을 건져 먹으며

부유(浮游)하던 사랑에 마침표를 찍을 때도

몸속으로 가늘게 흐느끼며 비 내렸다

 

습관적 다독거림,

따뜻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시집어제 비가 내렸기 때문입니다』(문학의전당,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