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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서
강수경
장마철, 잠시 하늘이 숨을 고르는 한때
떨어져 살아온 세월만큼
아득한 사이를 좁히기 위해
물먹은 도로를 달리다가 대관령 초입에서 만난 안개
내부로 들어갈수록 짙어지는 미립자 속에서
알 수 없는 허기가 밀려온다
반대 차선에서 전조등 불빛이
입을 벌려 다가왔다가 멀어진다
미궁을 헤매듯 생은 모호하고 낯설다
구릉을 넘어 깊숙한 고래 뱃속 같은 목장 입구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인내심 많은 사람들
봉분 같은 자동차 사이를
유령처럼 떠돌며 는개에 젖는다
드넓게 펼쳐진 목장
풀을 뜯는 양떼가 안개 속에 있음을
굳이 좁히려 애쓰지 않아도
우리는 흘러가는 세월 속에 있음을
안개가 시나브로 곁을 내주며 길을 낸다
―시집『어제 비가 내렸기 때문입니다』(문학의전당,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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