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멀고도 가까운 이사
김이듬
1
가구들이 다 나갔어 집은 텅 비었고 보일러는 망가졌어
이사업체 인부들에게 네 침대를 팔았어
커튼 뒤에 숨겨놓았던 술병들도 버렸어
우리의 고양이도 창문으로 도망가버렸지
해가 지면 찾아오는 한기처럼 언제나 문을 두드리는 건 추위와 고독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창문에 네 이름을 쓴다
어둠이 흐르고 공기에는 기억이 배어있다
2
집은 여전히 공사 중이야 네가 없으니 앞으로 나는 되는대로 살게 되겠지
육체의 굴레가 있어 사유도 있다고 했던가
우리는 싸웠지 너는 일어난 일을 생각했고 나는 일어날 일을 생각하느라
나는 여전히 공사 중이고
제발 그를 네 옆에 앉히지 마
내면의 폭풍과 오해는 좋아하는 음악처럼 나를 변화시킨다
음악은 지나가는 법, 도무지 음악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3
아무도 초대하지 않아
나를 허물고 다시 기본 골격을 세워야 했어
발목이 부었어 현기증과 수면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새집은 늘 이런 거래 페인트 냄새로
집주인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그녀는 말했지 희고 부드러운 벽을 망치지 마세요
네가 없는 인생은 잘못 임대한 집 같아
함부로 자국을 남길 수도 떠날 수도 없어
ㅡ『열린시학』(2021, 봄호)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후의 심판 /권혁웅 (0) | 2021.04.24 |
---|---|
엄마야 누나야 카프카야 /권혁웅 (0) | 2021.04.24 |
내가 아주 어린 떡갈나무였을 때 /이재연 (0) | 2021.04.24 |
바닥에서 /한춘화 (0) | 2021.04.23 |
이브의 미토콘드리아 /김추인 (0) | 2021.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