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야 누나야 카프카야
권혁웅
집주인이 2년 만에 엄마더러 나가라고 했다
계약갱신청구권? 그런 거 다 휴짓조각이라고
자기가 들어와 살 거라고
이사 나가는 날, 마스크 쓰고 들어와 휘 둘러보더니
화장대 위에 못 박은 자리 하나를 짚었다
"사람이 말이야, 남의 집 살면서……."
그예 벽지 긁힌 값 20만원을 받아갔다
엄마야 누나야
난 지금도 날마다 부동산 사이트를 검색해본다
집주인이 정말로 자기 집에 들어와 사는지 보려고
엄마도 누나도 나도 집은 성북구
내 직장은 성동구
말하자면 우리 일가는 카프카처럼
성(城)에는 끝내 들어가지 못한 셈인데
K는 바둑의 축머리 같은 것일까
아무리 몰아붙여도 나는 여기 있다고
풍선인간처럼 버둥거리는 이 손을 보라고
팔이 저린 쪽을 보면
간밤에 어느 쪽으로 누워서 잤는지 알게 된다
그런데 그레고르의 부모와 여동생은 그 벌레가
자기 아들이거나 오빠라는 걸 어떻게 알아보았을까
엄마, 부르며 다가오는 거대한 다지류(多肢類)는
집주인 같았을까
엄마야 누나야
새로 이사한 집에서 등우량선(等雨量線)을 그으면
장롱 뒤 벽을 타고 창문으로 넘어간다
도둑 같다, 목 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지금 모든 불안에도 불구하고 내 소설에 매달리고 있다. 마치 동상의 인물이 먼 곳을 내다보면서도 그 동상의 받침대에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시 쓰는 동안에만 목 위가 살아있는
이 거북목의
실존처럼
지문에는 물과 약간의 염화나트륨과
아미노산, 요소, 암모니아, 피지가 섞여 있다
2년 안에 집주인은 자기 집 게이트맨에
아미노산과 피지를 묻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임하리라
요는 그때까지 내가 기다릴 수 있을 것인가다
그레고르의 가족이 소풍 갈 날을 기다리듯
엄마야 누나야 그런데 우리,
강변 못 산다
강 조망권 있는 집은 너무 비싸다
* 카프카의 일기, 1912년 5월 9일
ㅡ『공정한시인의사회』(2021,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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