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엄마야 누나야 카프카야 /권혁웅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4. 24.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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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야 누나야 카프카야

 

  권혁웅

 

 

  집주인이 2년 만에 엄마더러 나가라고 했다

  계약갱신청구권? 그런 거 다 휴짓조각이라고

  자기가 들어와 살 거라고

  이사 나가는 날, 마스크 쓰고 들어와 휘 둘러보더니

  화장대 위에 못 박은 자리 하나를 짚었다

  "사람이 말이야, 남의 집 살면서……."

  그예 벽지 긁힌 값 20만원을 받아갔다

  엄마야 누나야

  난 지금도 날마다 부동산 사이트를 검색해본다

  집주인이 정말로 자기 집에 들어와 사는지 보려고

  엄마도 누나도 나도 집은 성북구

  내 직장은 성동구

  말하자면 우리 일가는 카프카처럼

  성(城)에는 끝내 들어가지 못한 셈인데

  K는 바둑의 축머리 같은 것일까

  아무리 몰아붙여도 나는 여기 있다고

  풍선인간처럼 버둥거리는 이 손을 보라고

  팔이 저린 쪽을 보면

  간밤에 어느 쪽으로 누워서 잤는지 알게 된다

  그런데 그레고르의 부모와 여동생은 그 벌레가

  자기 아들이거나 오빠라는 걸 어떻게 알아보았을까

  엄마, 부르며 다가오는 거대한 다지류(多肢類)는

  집주인 같았을까

  엄마야 누나야

  새로 이사한 집에서 등우량선(等雨量線)을 그으면

  장롱 뒤 벽을 타고 창문으로 넘어간다

  도둑 같다, 목 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지금 모든 불안에도 불구하고 내 소설에 매달리고 있다. 마치 동상의 인물이 먼 곳을 내다보면서도 그 동상의 받침대에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시 쓰는 동안에만 목 위가 살아있는

  이 거북목의

  실존처럼

  지문에는 물과 약간의 염화나트륨과

  아미노산, 요소, 암모니아, 피지가 섞여 있다

  2년 안에 집주인은 자기 집 게이트맨에

  아미노산과 피지를 묻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임하리라

  요는 그때까지 내가 기다릴 수 있을 것인가다

  그레고르의 가족이 소풍 갈 날을 기다리듯

  엄마야 누나야 그런데 우리,

  강변 못 산다

  강 조망권 있는 집은 너무 비싸다

 

 

* 카프카의 일기, 1912년 5월 9일

 

 

 

ㅡ『공정한시인의사회』(2021,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