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행과 행 사이 /배세복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5. 7.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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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과 행 사이

 

배세복

 

 

이른 봄이면 당신은 매일

들판에 나가 시를 지었다

당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한 것은

행을 나누는 것이었다

 

나는 겨우 새참 막걸리를 날랐다

당신의 일소나 쟁기가 될 수 없었기에

다랑논 첫머리에서 당신을 부른 후

독새풀이나 뜯고 있었다

 

당신이 막걸리를 마시는 동안에도

나는 당신이 행갈이 마친 시편에

한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당신의 시풍은 늘 고루하였다

 

나올 것 없는 논바닥을 뒤적이며

시를 쓰는 당신이 싫었다

차라리 가까운 어물전에서

새우젓이라도 뒤적이길 바랐다

 

당신이 시를 마저 완성하려고

들판을 자주 들락거리던 어느 계절

나는 당신을 떠났다 도시 어디에라도

멋들어진 시를 남기고 싶었다

 

당신은 끝까지 흙에다 시를 쓰고 갔다

마지막까지도 고루했던 당신의 시와

갓 세련된 척하는 내 시 덕분에

우리의 행간은 끝내 좁혀지지 않았다

 

 

 

―시집『목화밭 목화밭』(달아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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