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노랗게 물들이면 이베리아에서 봄비가 온다
최휘
나는 봄비, 어젯밤 이베리아 반도에서 출발했다
가랑비가 내려, 아침을 여는 제인의 목소리다 표정을 살피지 않는다 비의 진행에 방해가 되니까
나는 리듬, 나는 가장 가벼운 흐름, 창가에 잠시 머무는 배후, 구체적인 성과 이름을 얻기 직전이다
제인은 이사의 재인(才人), 그 방에서 저 방으로 저 방에서 이 방으로 흘렀다 제인은 아주 먼 곳으로 마지막 이사를 하고 싶다 제인은 지난 번 이사 때 이불을 버렸다 제인은 책만 남았다 제인은 밥맛이 사라진다 제인은 언제나 신도림에서 출발해 종로에서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나는 폭우를 품은 투명한 물빛, 제인을 향해 두 팔이 날개가 되어 전진할 때 빨간 블라우스를 입은 기상 캐스터가 오늘도 강추위가 계속 될 거라고 미리 발설하는 실수를 한다
나는 봄비, 창문 밖으로 내민 제인의 팔뚝에 또렷하게 내려앉는다 안녕 사랑스런 나의 오디오북, 책 한 권을 소리 내어 읽듯 말이 많았던 제인 너의 입술이 폭우에 무너진 둑방처럼 흙빛이구나
읽고 싶어서 산 책들이 읽지 않는 책들이 된다고 생각하는 제인은 저 방이 보이는 이 방에 앉아 먼 곳을 생각하는 제인은 갈 수 없다면 머리라도 미리 노랗게 물들여야 할까 생각하는 제인은 오늘의 날씨를 아랑곳 않고 얇게 옷을 입는 제인은 동원서적 문을 밀고 들어간다 머리칼을 생각하거나 이사를 생각하기 위해
제인은 종일토록 가랑비를 맞은 아이처럼 방 안에 웅크려 잠들 것이다 계단을 오르다 삐끗하고 양버즘나무의 삐져나오려는 연두를 몇 초 간 올려다 본 게 전부였어, 하면서, 밤새 봄비가 강풍으로 강풍이 대설 예비 특보로 지구 반 바퀴를 건너가는 줄도 모르고
―계간『모든: 시』(201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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