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굴참나무 자서전
신영애
기억을 지우니 바람이 분다
요양원 뒤뜰에 아무렇게나 자리잡은 통나무 의자들
말을 내려놓을 때마다
무뎌진 감정이 진물 흐르는 사연을 훔치는데
마음이 머물지 않아도 집이 될까
힘겹게 옮겨진 몸에는
세풍을 견딘 흔적이 옹이로 자리잡았다
어스름한 산마루에 머무는 시선
노을이 잦아들자 산 그림자 짙다
어느 서고에 한자리 차지하고
뿌리 깊은 수령을 전하고 싶었지만
골만 깊어진 몸뚱이는 바람도 머물지 못한다
재생을 멈춘 세포들은 사라지고 있다
다만
꿈결에 스치던 바람과 무성했던 온기와
산불과 병치레와 뿌리까지 흔들던 태풍을
진액이 마른 자서전에 기록해 놓았을 뿐이다
소멸을 위해 버티는 곳
아프지 않아도 아픔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며
풍장으로 사라질 날까지 끝내 그의 거처는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시인동네』(2018, 11월호)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머큐로크롬 /유현숙 (0) | 2021.06.12 |
---|---|
노을이 지는 거리 /김미경 (0) | 2021.06.04 |
당신 참 시다, 詩다 /서하 (0) | 2021.06.04 |
이만 총총 /서하 (0) | 2021.06.04 |
연꽃 방죽에서 /장진영 (0) | 2021.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