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문인과의 차 한 잔 ③ 신춘문예 多冠王 이근배 시인
“詩의 첫 줄은 神이 준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詩는 체험… 삶이 우러나야 좋은 詩
⊙ 1961년 《서울신문》 《경향신문》 신춘문예 통해 등단… 1964년까지 신춘문예·신인예술상 9관왕
⊙ 독립운동하던 선친, 10세 때 처음 만나… 6·25 이후 소식 끊겨.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언어를 농축해야 감동의 폭발력 뿜어내
⊙ 시의 끝 구절은 영화의 라스트 신처럼… 상투적인 형용사·부사 버려야
⊙ 조선 초기 궁궐서 쓰던 벼루(渭原花艸石長生文日月硯) 포함, 평생 수집한 벼루 전시
李根培
1940년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 1961~64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한국일보》 등 각 일간지 신춘문예에 시·시조·동시 당선. 1963년 문공부 신인예술상 시·시조 2개 부문 수상, 1964년 문공부 신인예술상 문학부 특상 수상 / 월간 《한국문학》 발행인 겸 주간(1976~84년), 한국시인협회장, 한국시조협회장 역임. 現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시인인 이근배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대한민국예술원 이근배(李根培·82) 회장은 공식적으로 국내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올해로 등단 60주년을 맞았다. 196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벽’, 같은 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묘비명’으로 동시(同時) 등단했다. 신춘문예 2관왕이었다.
기자는 지난 3월 29일 서울 마포역 근처에 있는 이 회장의 집필실을 찾았다. 그의 시작법(詩作法)을 듣고 싶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오래된 벼루가 수북이 쌓여 있고 귀한 고서(古書)들이 숨바꼭질하듯 흩어져 있었다. 그야말 로 보물 창고지만, 보물 같지 않게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린다고 할까.
― 저 거대한 벼루들은 다 뭡니까.
선생의 눈빛에 불이 들어왔다.
“오는 6월쯤 서울 평창동 가나미술관에서 조선 개국(開國)에 바쳐진 벼루 예술의 극치를 최초 공개할 예정입니다.”
조선 초기 만들어진 벼루인 ‘위원화초석장생문일월연(渭原花艸石長生文日月硯)’을 세상에 내보낼 생각이다. 이 벼루는 태조 이성계 또는 태종 이방원이 공신들에게 내린 하사품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초기 궁궐에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문방(文房) 문화는 한·중·일 세 나라가 공유하고 있지만 벼루의 대종(大宗)을 자부하는 중국의 당·송·명·청 어느 시대의 벼루도 그 규모나 회화성, 살아 움직이는 극사실의 조탁이 조선 개국 무렵 만들어진 이 벼루에 미치지 못합니다. 이걸 곧 세상에 공개할 예정입니다.”
한국과 중국 벼루 1000여 점을 수집해온 이근배 시인. 그는 “조선시대 벼루 중에서 녹두색과 팥색이 섞인 花草石 벼루야말로 최고의 예술품”이라고 했다. 사진은 2014년 2월의 모습이다. 사진=조선일보DB |
그는 “평생을 모은 벼루들이 고려청자, 조선백자에 버금간다”고 주장하는데, 이 말을 할 때 이미 흥분 상태였다. 이근배 회장은 분명 자신을 연벽묵치(硯癖墨癡·문방사우에 빠지는 어리석음)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벼루에 대한 연작시만 80여 편에 이른다고 한다.
― 벼루 이야기는 다른 기회에 듣고, 오늘은 문학 이야기를 듣고 싶어 왔습니다.
“회방연(回榜宴)이라는 것이 있어요. 예전 과거에 급제한 지 예순 돌을 기념하는 잔치를 이르던 말이죠.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1493~1582)이 회방연을 치렀다고 합니다.
올해는 개인적으로 등단 60년이 되는 해이니 회방연을 맞은 셈이지요. 과거 급제가 아닌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니 ‘회단연’이라 해야 할까?”
그는 껄껄 웃고는 이내 정색하고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제가 무슨 약력(略曆)이 그럴듯합니까, 공부한 것도 없고. 신춘문예 당선만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당시만 해도 당선으로 미래가 보장되던 시절도 아니었지요.”
스물한 살, 신춘문예 두 곳 當選… 한 곳 佳作
기자는 이 회장의 신춘문예 다관왕(多冠王)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
“1961년 1월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심사위원을 맡으셨던 이병기(李秉岐·1891~1968), 이태극(李泰極·1913~2003) 선생이 나를 시조로 등단시키셨어요.
가람(嘉藍·이병기)은 1939년 《문장》이란 잡지를 통해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1912~1970)와 김상옥(金相沃·1920~2004)을 뽑았어요. 그때 정지용(鄭芝溶·1903~1950)은 조지훈(趙芝薰·1920~1968), 박두진(朴斗鎭·1916~1998), 박목월(朴木月·1916~1978) 등 소위 청록파 시인들을 등단시켰고요.
광복 이후 신춘문예가 단절됐다가 1950년대 후반에 부활했는데 가람이 신춘문예 심사를 통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뽑은 신인이 납니다.
그때는 신춘문예 결과를 새해 1월1일자 신문을 봐야만 알 수 있었죠.”
― 미리 당선 통보를 안 했나요.
“지금은 12월 20일쯤에 통보하지만 그때는 1월1일자 신문을 봐야 알 수 있었어요. 가령 익명으로 투고해도 그대로 발표합니다.
12월 31일 밤중에 공초(空超·吳相淳·1894~1963) 선생이랑 명동에 있었는데 연세대 국문과 다니던 친구가 나더러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겁니다. 그때만 해도 내가 명동 깡패였거든요. ‘너, 이 새끼 나와! 내가 어떻게 당선이야 이 자식아!’ 그랬어요.”
― 명동 깡패라고요?
“제가 싸움, 잘합니다. 그때 공초 선생이 ‘사천’이란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모래 사(沙)자, 샘 천(泉)자. ‘사천, 너 《서울신문》에 ‘벽’을 투고하지 않았어?’ 그러는 거야.
어? 가만있어 봐. 《서울신문》에 투고한 것을 걔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때가 밤 10시쯤 됐을 때였어요. 후다닥 신문사로 뛰어갔죠.
신문 보급 트럭들이 지방판 신문을 배달하려고 시동을 걸어놓고 있었죠. 제 눈으로 신문을 펼치고서야 확인할 수 있었어요. 총 1000여 편의 작품을 뚫고 ‘벽’이 뽑혔어요. 그해 시조만 당선작이 있었고, 시는 당선작을 못 내놨어요.
운이 좋게도 《경향신문》도 당선(시조 ‘묘비명’)됐고 《조선일보》 역시 가작(시조 ‘압록강’)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3관왕이었던 셈이죠. 그 무렵엔 등단의 길이 워낙 좁아 가작도 당선으로 인정했으니까….”
이근배의 나이 스물한 살 때였다.
향수의 꽃이파리/ 핏빛 피어 눈에 감겨//
어머니! 외마디 지르고/ 고지에 올라서면//
저기 저/ 조국의 가슴을 찢어/ 줄기져 간 철조망//
응시(凝視) 눈빛을 거둬/ 문득 작은 돌을 본다//
입 다물어 굳었어도/ 품고 있는 슬픈 증언//
자유를/ 사랑한 병사의/ 비문 없는 묘석인걸.
눈 쌓인 사각에서/ 불붙이던 정열이랑//
신화의 골짝마다/ 스며진 젊은 피도//
역겨워/ 하늘을 외면해서/ 풀꽃으로 피었는가. (이하 생략)
-이근배의 시조 ‘벽(壁): 휴전선에서’ 일부
筆名으로 계속 신춘문예 당선
이근배 시인의 196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보신각종’. 아래는 그해 신문에 소개된 등단 문인들 기사. |
이근배의 신춘문예 도전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듬해 다시 도전했는데 196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이근배(李槿培)’라는 필명으로 ‘보신각종’이 다시 당선됐다.
또 그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이금사(李琴史)’라는 필명으로 시조 ‘바위’가 ‘가작 2석’으로 뽑혔다. 또 ‘이근녕(李根寧)’이란 필명으로 동요 ‘달맞이꽃’이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뽑혔다. 요즘엔 복수 등단이 아예 불가능하지만, 그 시절엔 가능한 일이었다.
1.
어둠에 녹쓴 일월(日月)/ 조국(祖國)의 깊은 밤을//
입깨문 열원(熱願)으로/ 눈멀어서 지키다가//
새날빛 / 밝아온 날엔/ 몸부림쳐 울었으리.
2.
하늘도 돌아섰던/ 상잔(相殘)의 포성(砲聲) 속에//
균열진 가슴이며 의로웁던 모국어를//
상기도/ 품어 안고서/ 울먹이는 증언이어!
(이하 생략)
-이근배의 시조 ‘보신각종’
이근배 회장의 말이다.
“1963년에는 시조가 아닌 시로 투고했는데 안 됐어요. 당시 5·16이 일어나면서 문화공보부 신인예술상이 생겼어요. 1963년 제2회 문공부 신인예술상에 도전해 시와 시조 부문에서 모두 수석(首席)을 먹었어요.”
시 당선작은 ‘달빛 속의 풍금’, 시조 당선작은 ‘산하일기(山河日記)’였다. ‘이근배(李根培)’라는 본명으로 도전했다.
“1964년으로 넘어가서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북위선’이 당선됐어요. 필명을 ‘이학목(李鶴木)’으로 투고했죠. 당시 《동아일보》도 시 ‘꽃과 왕령’이 당선됐지만, 둘 중 한 곳을 택하라고 해서 당선 사례금이 많은 《한국일보》를 택했어요. 당시 ‘북위선’ 심사평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그때 《한국일보》 당선금은 5000원, 《동아일보》는 2500원이었다고 한다.
서투른 병정은 가늠하고 있다.
목탄으로 그린 태양의
검은 크레파스의, 꽃밭의, 지도의
눈이 내리는 저녁 어귀에서
병정은 싸늘한 시간 위에 서 있다.
지금은 몇 도 선상인가.
그리고 무수히 탄우(彈雨)가 내리던
그 달빛의 고지는 몇 도 부근이던가.
가슴에는 뜨거운 포도주
한줄기 눈물로 새김하는 자유의
피비린 향수(鄕愁)에 찢긴 모자.
이슬이 맺히는 풀잎마다의 이유와
마냥 어둠의 표적을 노리는
병정의 가슴에 흐르는 빙하.
그것은 얼어붙은 눈동자와
시방 날개를 잃는 벽이었던가.
꽃이었던가.
-이근배의 시 ‘북위선’ 일부
계속된 그의 말이다.
“명동에서 만나던 친구들의 눈빛은 ‘시조는 돼도, 시는 안 되지?’였는데, 내심 ‘그렇다면…!’ 하고 속으로 별렀던 일이 이뤄진 것이었어요. 시 ‘북위선’에 대해 《한국일보》는 이례적으로 신문 사설을 통해 칭찬했어요. 그리고 심사위원이던 김종길(金宗吉·1926~2017) 선생이 문화면에 따로 ‘북위선의 사이즈’라는 작품 평을 썼죠. 번데기도 못 되는 내게 날개를 달아준 겁니다.”
겨우 스물한 살, 구두닦이 차림이었으니까…
1958년 4월 서라벌예술대학 시절. 왼쪽 첫 번째가 홍기삼(문학평론가, 동국대 전 총장), 네 번째가 이근배 시인, 다섯 번째가 천승세 소설가. |
그의 등단 도전기는 끝나지 않았다.
1964년 문공부 주최 제3회 신인예술상 문학 부문에서 시 ‘노래여 노래여’로 특상을 받았다. 시·소설·시조·희곡·아동문학 등 5개 부문의 ‘수석’ 중에서 1명에게 특상이 주어지는데 보통은 소설 부문 당선자가 특상을 받았지만 그해만큼은 시 당선자에게 특상이 돌아갔다.
“그땐(1964년) 신춘문예든, 신인예술상이든 투고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당시 서울 서대문구 영천동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대신중학교에 다니는 학생과 같은 방을 쓰고 있었어요. 어느 날 신촌에서 하숙할 때 알고 지내던 ‘이전형’이라는 연세대생이 찾아왔어요. 그가 ‘문공부 신인예술상에 투고하겠다’는 겁니다. 그에게 내가 쓴 시 ‘노래여 노래여’를 건네면서 내껀 ‘이걸로 보내주라’고 했죠. 이름은 같은 방 쓰는 중학생 이름(이선규)으로.
근데 신인예술상 특상을 먹어버렸어요. 심사를 모윤숙(毛允淑·1910~1990), 양주동(梁柱東·1903~1977) 선생이 했는데 모윤숙 선생이 내 시를 낭송하고 박수를 쳤다나? 아무튼 그랬다고 합니다. 특상은 ‘이선규’가 아닌 ‘이근배’로 받았지요.”
푸른 강변에서
피묻은 전설의 가슴을 씻는
내 가난한 모국어
꽃은 밤을 밝히는 지등처럼
어두운 산하에 피고 있지만
이카로스의 날개 치는
눈 먼 조국의 새여
너의 울고 돌아가는 신화의 길목에
핏금 진 벽은 서고
먼 산정의 바람기에 묻어서
늙은 사공의 노을이 흐른다
이름하여 사랑이더라도
결코 나뉘일 수 없는 가슴에
무어라 피 묻은 전설을 새겨두고
밤이면 문풍지처럼 우는 것일까
-이근배의 시 ‘노래여 노래여’ 일부
― 왜 그렇게 도전을 많이 했나요.
“박재삼(朴在森·1933~1997) 선생도 시조로 등단해서 자유시로도 명시(名詩)를 써내셨잖아요. 시조와 시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주장하는 이가 당시에 더러 있어서 비록 글솜씨는 모자라지만 공인받는 절차를 밟는 것도 흠이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죠.
하지만 그렇게 당선이 돼도 내게 원고 청탁을 하는 곳이 없었어요. 당시엔 문학잡지라고 해봐야 《현대문학》밖에 없었는데 자기네 출신조차 소화하기 어려울 때였으니까요.”
― 남들은 신춘문예를 목숨 걸고 도전해도 불가능하다는데….
“운이 좋은 거죠. 글은 안 되는데…, 운이야, 운.”
이근배 회장은 꼭 60년 전 1961년 문청(文靑) 시절로 되돌아가 이렇게 말했다.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얼마 후 신문사로 찾아갔어요. 그날 공교롭게도 눈이 많이 와서 광화문까지 미끄럼을 타고 가야 했지요. 청바지에 낡은 군화, 잠바(점퍼)때기 하나 걸치고선 신문사 4층까지 올라가니 당시 문화부장이던 이일동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시조 당선자라는 이가 겨우 스물한 살, 형편없는 구두닦이 차림이었으니까….
생각해보세요. 시를 쓴다는 일이 배고픔의 연속이었어요. 몇 관왕을 해도 앞이 하나도 안 보였고, 불투명했어요. 그런 시절과 비교한다면 요즘이야 얼마나 행복합니까. 지난 1월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자들에게 축사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그래도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확실하게 담보했으니 자신감을 가져라. 나를 봐라. 그 시절,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었다’고….”
이근배 詩作法 9가지
모교 충남 당진 송산초등학교에서. 이근배 시인은 1946년에 입학했다. 2019년 4월의 모습이다. |
― 어떻게 쓰면 시를 잘 쓸 수 있나요.
“마음먹고 쓰면 누구나 잘 쓸 수 있지요. 문학은 레토릭의 차이예요. 단어의 차이인데 백일장 심사할 때 내가 제일 빨라요. 다 볼 것 없어요. 첫 문장 한 줄만 보면 됩니다. 예컨대 일식집 주인이 주방장 테스트를 할 때 어떻게 봅니까. 요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칼을 어떻게 쓰느냐만 보면 대충(거의) 정확합니다. 시도 마찬가지예요.”
그는 ‘이근배 시작법(詩作法)’ 9가지를 설명했다.
“시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자주 듣지만 바둑의 정석처럼 정해진 게 없습니다. 나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은 지 60년 동안 대학에서 시를 가르쳐왔으나 정작 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시 쓰기에 대한 매뉴얼도 없어요.
그렇게 시 쓰기를 가르칩네, 하고 보따리를 들고 헤매다가 ‘시작법 9가지’라는 것을 약방문처럼 팔고 다닙니다. 약효가 없는 것인 줄 알면서 처방을 달라는 청을 받고 그 풀이를 몇 마디 하면 이렇습니다.”
지금도 일간지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활동 중인 그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시의 첫 줄은 신(神)이 준다.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의 말이다. 시의 글감을 얻고 붓을 들었을 때 첫 줄을 얻기 위해서는 영감(inspiration)이 떠올라야 한다. 신이든 악마든 오랜 글감 익히기와 생각의 천착(穿鑿)이 없는 사람에게 한 편의 시를 선사할 까닭이 있겠는가.
둘째, 총은 내가 먼저 쏜다.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에서 명사수는 총을 0.1초라도 먼저 뽑아야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다. 시는 극도의 언어 절약이 기본이다. 달리 말하면 언어의 핵무기라고나 할까. 언어를 농축하고 농축해야 그 감동의 폭발력을 뿜어낼 수 있다.
셋째, 송편에는 소를 넣어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도 열쇠가 있다. 이른바 키워드(key word)다. 곧 시인이 의도하는 시적 의도가 중심에 자리 잡아야 한다. 그러면 송편의 ‘소’에 해당하는 시의 알맹이는 무엇인가.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나 두루미가 사람의 알레고리(allegory)이듯이 시의 오브제(objet)는 꽃, 새, 바람, 산, 강… 등이다. 그 오브제가 무엇이든 그 속에 ‘사람’, 즉 ‘시인 자신’이 들어가야 한다. 시라는 송편에 넣는 ‘소’는 바로 ‘나’다. 왜냐면 시는 우러나오는 시인 자신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에밀레종의 여운은 마지막 타종이 멀리 보낸다
1975년 고향 집에서 손주를 업고 있는 어머니 장순의(張順儀) 여사와 이근배 시인. |
넷째, 꼭 집어서 김자옥.
탤런트 김자옥이 여학생으로 분장했던 코믹 시트콤에서 한 아주머니가 여러 여학생과 함께 있는 김자옥에게 “얘, 예쁜 애!”라고 하자 김자옥은 “그냥 예쁜 애라고 하지 마시고 꼭 집어서 김자옥이라고 불러주세요” 하는 장면이 있었다.
‘외롭다’ ‘슬프다’ ‘기쁘다’ ‘아프다’ 라는 실체가 없는 표현은 시어가 되지 못한다. 살아 움직이는 구체적 사실을 적시해야 한다. ‘예쁜 애’가 아닌 ‘김자옥’으로.
다섯째, 게딱지는 떼고 먹어라.
일상어에는 사물에 상투적으로 따라다니는 형용사와 부사가 있다. ‘따뜻한 봄날’ ‘추운 겨울날’ ‘푸른 하늘’ ‘하얀 눈’ 같은 법칙을 깬 것이 ‘찬란한 슬픔’(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게딱지처럼 붙어 다니는 껍질 언어를 과감히 떼어내고 속살 언어를 붙여야 한다.
여섯째, 바늘 가는 데 뱀이 간다.
이를테면 윤동주의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음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이다. 이처럼 오롯이 행간의 의미가 넓을수록 시적 효과가 높아진다.
일곱째, 아는 길도 돌아서 가라.
시인은 언어의 창조자라고 한다. 일상 속에 널리 쓰이는 모국어를 새로 조합해서 새 낱말을 만들어내야 한다. 시의 발상법도 그렇다. 평소에 익숙하게 들린 이야기가 아닌 새롭고도 낯선 이야기일 때 새 맛을 낼 수 있다. 누구도 가보지 않고 나도 가보지 못한 새 길을 가는 것이 창조다.
여덟째, 꼬리가 길면 밟힌다.
수필이나 소설 같은 산문을 마라톤, 또는 중거리에 비유한다면 시는 100m 경주다. 스타트도 몇백 분의 일 초라도 빨라야 하지만 골인 지점에서도 마지막 스퍼트가 승패를 결정한다. 엿가락 늘이듯 시를 오래 끌지 않고 도마뱀 꼬리 자르듯 버리고 멀리 뛰어야 한다.
아홉째,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밀기.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여운은 마지막 타종이 멀리 보낸다. 시의 끝 구절은 영화의 라스트 신처럼 오래 가슴에 여운으로 남는다. 오 헨리의 콩트처럼 극적 반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의 끝 구절은 비약, 상승 반전을 이룰 때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된다.
시는 감성이 아니라 체험(말라르메)
1989년 8월 중국 용정(룽징)에 있는 시인 윤동주의 묘소에서. |
이근배 회장은 시는 ‘10초 게임’이라고 했다.
“10초도 안 되는 시도 참 많습니다. 그 시 한 편을 소리 내어 읽으면 더 걸리겠지만, 눈으로 쓱~ 한 번 훑어보는 시간은 몇십 초 내에 끝납니다. 소리 내어 읽어 윤동주의 ‘서시’, 김춘수의 ‘꽃’도 30초, 20~30초의 승부가 시입니다.
내가 시를 썼다, 써서 잡지나 신문에 발표했다,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면 끝나는 것이고, 속된 말로 필이 꽂혀서 ‘괜찮네’ 하면 값이 나가는 것이죠.
그러니까 10초의 싸움인데 문제는 그걸 어떻게 건져 내느냐는 거죠. 가령 시인 안도현이 ‘너에게 묻는다’는 시를 썼는데요,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입니다.
안도현에게 물었어요. ‘이 시로 얼마나 벌었냐’고. ‘3억(원을) 벌었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시를 아무리 써도 단돈 10원을 못 벌었는데…. ‘연탄재’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얼마든지 내가 먼저 쓸 수 있었는데….
그런 시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언젠가 대학교 유아교육과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친 일이 있는데 한번은 ‘아버지’라는 제목으로 시를 써오라고 숙제를 냈어요.
한 학생이 ‘이번에 졸업을 하면 졸업장을 아버지 산소에 가져가겠다’고 쓴 겁니다. 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자기 손을 잡고 ‘미안하다. 대학을 못 보내서…’ 하고 눈물 흘렸던 일이 떠오른 거지요. 시를 쓰니까 아버지와 관련된 일들이 떠오른 겁니다.
또 다른 학생은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셨는데 늘 저녁 술상 앞에 딸을 앉혀 놓고 술을 권커니 잣거니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너를 어떻게 시집 보내느냐. 시집 보낼 때 울 것 같다’는 말을 평소 했대요. 학생은 ‘아버지’라는 시를 이렇게 썼을까요?
‘저는 그날 울지 않겠어요. 제가 울면 신부 화장이 지워지니까요’라고 썼어요. 참, 멋지지 않나요?
내가 문화센터에서 시 쓰기 강의를 할 때 칠십 넘은 할머니에게 ‘약속’이라는 시를 쓰게 했어요. 놀랍게도 대여섯 살 무렵의 ‘약속’을 떠올린 겁니다. 유년 시절에 물장구치다가 그만 물에 빠져 강에 떠내려가게 됐는데, 자기 집에서 일하던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 물에 뛰어들어 건져 냈대요.
그 아주머니가 아이를 진정시킨 뒤 ‘집에 가거든 어머니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라’고 당부했대요. 그 약속을 60여 년 지켰는데, 시를 쓰면서 비로소 ‘약속’을 깨뜨린 거지요.
‘약속’이란 글감을 안 줬으면 그 시가 어떻게 나왔겠어요?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글감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시적 표현이 서툴더라도 감동이 있으면 돼요. 말라르메는 ‘시는 감성이 아니라 체험’이라고 했고, I.A 리처드는 ‘시인은 왜 언어의 지배자인가. 그는 체험의 지배자이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좋은 시는, 우리의 실재 삶 속에서 우러나는 것을 가지고 쓰는 것이 옳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칭찬보다 오히려 고마운 꾸중
2013년 5월 한국시인협회 근대 인물사 시집 출간 기자간담회 모습이다. (왼쪽부터) 장석남, 김종철, 신달자, 이근배, 최동호 시인. |
이근배 회장은 1939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호적에는 1940년 3월 1일로 돼 있다. 독립운동을 했던 선친이 3·1운동이 일어난 날로 출생일을 바꾸었다고 한다.
“제 기억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처음 본 게 열 살 때였습니다. 저는 당진 할아버지 댁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주요 근거지였던 아산에서 항일운동과 사회운동을 하셨죠. 선친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1932년과 1935년에 각각 1년형과 2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셨습니다.”
선친인 이선준(李銑濬)에게 작년 11월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 회장은 기자에게 시 ‘자화상’을 낭송해주었다. 그 장시(長詩)를 다 외웠다.
너는 장학사(張學士)의 외손자요/ 이학자(李學者)의 손자라/ 머리맡에 얘기책을 쌓아놓고 읽으시던/ 할머니 안동김씨는/ 애비, 에미 품에 떼어다 키우는/ 똥오줌 못 가리는 손자의 귀에/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못박아 주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라 찾는 일 하겠다고/ 감옥을 드나들더니 광복이 되어서도/ 집에는 못 들어오는 아버지/(…)/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겨우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왔다/ 그제서야 처음 얼굴을 보게 된 아버지는/ 한 해 남짓 뒤에 삼팔선이 터져/ 바삐 떠난 후 오늘토록 소식이 끊겨 있다/ (이하 생략)”
-이근배의 시 ‘자화상’ 일부
그의 말이다.
“외할아버지는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6)의 수제자였고, 할아버지는 아주 완고한 유학자셨어요.
저는 부모 밑에서 자란 게 아니라 조부모 손에서 컸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는 짓이 할아버지 눈 밖에 나는 엉뚱한 짓만 했어요. 할아버지가 날 야단칠 때는 ‘저놈은 제 아비를 똑 닮았다’고 손가락질을 하셨어요.
우리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신동이시고 동네분들 중에 나쁘게 말한 분이 없었거든요. 어느 역사학자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1930년대 이후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한 것은 남로당밖에 없다고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아비 닮았다’고 야단치시는데, 난 그 말씀이 칭찬보다 오히려 고마운 꾸중이었던 거죠.”
이근배 회장이 1975년에 쓴 시 ‘문’을 읽으면 20세기 한국인이 겪어야 했던 시대적 아픔을 공감할 수 있다.
내가 문을 잠그는 버릇은/ 문을 잠그며/ 빗장이 헐겁다고 생각하는 버릇은/ 한밤중 누가 문을 두드리고/ 문짝이 떨어져서/ 쏟아져 들어온 전지(電池) 불빛에/ 눈을 못 뜨던 버릇은/ 머리맡에 펼쳐진 공책에/ 검은 발자국이 찍히고/ 낯선 사람들이 돌아간 뒤/ 겨울 문풍지처럼 떨며/ 새우잠을 자던 버릇은/ 자다가도 문득문득 잠이 깨던 버릇은/ 내가 자라서도/ 죽을 때까지도 영영 버릴 수 없는/ 문을 못 믿는 이 버릇은.
-이근배의 시 ‘문’ 전문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
이근배 시인은 시인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그의 선친은 독립운동을 했던 남로당원이었다. 시인이 10세 때 처음 아버지를 보았고 1년 남짓 같이 살다가 6·25가 터지면서 소식이 끊어졌다.
시인은 자라며 늘상 아버지의 부재를 체험해야 했다. ‘한밤중 누가 문을 두드리고’ ‘문짝이 떨어져 나가며’ ‘쏟아져 들어온 전짓불’과 마주해야 했다. 또 숙제하다 머리맡에 펼쳐놓은 ‘공책에 검은 발자국이 찍혀야’ 했다.
그런 아픈 ‘문’과 마주했으니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시인의 세계로 발을 디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렇지만 사상가의 아내였던 어머니의 일생 또한 짐작이 간다.
“방학 때 시골에 가면 어머니가 밭에 계셨어요. 치마저고리가 새까맣게 다 찌들고 얼굴이 중부소방서처럼 빨개요. 냉수에다 보리밥 말아 드시고…. 어머니 땀, 그게 어머니의 흘린 땀이 제 시가 된 겁니다. 제가 시를 잘 쓴 게 아니라, 그냥 제가 살아온, 속에 있는 걸 받아 쓴 것이죠.”
그가 쓴 ‘냉이꽃’이란 시가 있다.
어머니가 매던 김밭의/ 어머니가 흘린 땀이 자라서/ 꽃이 된 것아/ 너는 사상을 모른다/ 어머니가 사상가의 아내가 되어서/ 잠 못 드는 평생인 것을 모른다/ 초가집이 섰던 자리에는/ 내 유년에 날아오던/ 돌멩이만 남고/ 황막하구나/ 울음으로도 다 채우지 못하는/ 내가 자란 마을에 피어난/ 너 여리운 풀은.
-이근배의 시 ‘냉이꽃’ 전문
“저는 해방이 되고 난 다음 1946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제가 1년만 빨리 학교에 다녔다면 일본어를 국어로 배울 뻔했죠. 천만다행하게도 한글로 배웠어요. 당시엔 교과서가 없었어요. 선생님이 칠판에 ‘가나다라…’를 쓰셨죠. 스스로 모국어의 원년 세대, ‘한글둥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 모국어의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가령 알파벳이나 일본어 발음은 300~400개밖에 안 됩니다. 우리는 1만2000개나 됩니다. 별별 소리, 새소리, 귀신소리, 개 풀 뜯는 소리,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까지 다 할 수 있는 게 한글입니다. 또 50만 개의 단어를 가지고 있죠. 우리는 이렇게 위대한 문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똥참외론
2019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에 취임한 이근배 시인. 시인으로는 조병화 선생에 이어 두 번째이고 문인으로 치면 일곱 번째 회장이다. |
이 대목에서 이근배 회장은 ‘개똥참외론’ 이야기를 꺼냈다.
“개똥참외 따 드셔 보셨습니까. 콩밭 맬 때 개똥참외가 밭둑에 조그맣게 열려요. 거름으로 쓰던 인분에 박혔던 ‘참외씨’가 자라서 개똥참외로 큰 겁니다. 나중에 콩 뽑을 때 되면 노랗게 익거든요. 그럼 그 개똥참외를 누가 먼저 먹죠?
먼저 먹는 놈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봐놨다 해도 먼저 먹으면 그 사람이 임자인 겁니다.
남들이 먼저 좋은 글감으로 좋은 시를 썼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어요. 이번에는 개똥참외를 먼저 따 먹으면 되니까요. 우리가 장사하려면 물건이 있어야 하잖아요. 글감 파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기 안에 글감이 있어요. 내 안의 ‘나’를 잘 들여다보면 글감이 솔솔 나옵니다. 그걸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어요. 아셨죠?”
― 마지막으로 한국문학은 세계문학에서 어떤 위치입니까.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 민족은 혈통이 아니라 언어입니다. 한국인에게는 모국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한글이라는 문자가 있지요. 비록 남북이 분단되어 있지만 우리 민족만큼 시 잘 쓰고 소설 잘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노벨문학상 작품보다 우리나라 김동리(金東里·1913~1995), 황순원(黃順元·1915~2000)의 소설이 낫다고 자부합니다. 옛날에 양주동 선생의 강의를 도강한 적이 있어요. T.S.엘리엇의 ‘황무지’를 설명하며 ‘제깐놈이 이런 말을 알아?’ 그랬어요. 시 작품보다 자기 해석이 낫다는 것이지요. 아이돌 BTS와 영화 <기생충>의 문화적 저력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죠. 우리 민족은 문학 하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 AI 시대에도 문학이 존재할까요.
“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린 시절, 필통이 너무 갖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안 사주셨대요. 어느 장날에 전봇대 아래 한 남자가 쓰러져 있기에 가만히 보니 자기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요. 술 취한 아버지를 일으키는데 호주머니에서 필통이 쑥 나오더랍니다. 필통에서 아버지가 나오고, 시가 나오는 겁니다. 문학은 자기 몸을 파는 행위예요. 시에 자기를 집어넣지 않으면 아무리 AI 시대가 찾아와도 생명력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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