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처음표
김진규
떠나던 꿈은 내게 찾아와 끝없는 곁이 되고
겹겹이 접어둔 소매는 손을 대기도 전에 흘러내렸어
스러지는 물안개도, 서서히 흩어지는 흙더미도 없는
아무도 없는 여행의 마지막 날, 다시금 짐을 챙겨야 하는 날
너는 알까 내가 쓴 모든 쉼표는 너의 말을 생각하며 썼다는 것을
네가 숨을 쉬면 나도 거기에 멈추고, 네가 눈썹을 털어낼 때마다 난 몸서리치며, 하루를 보내고, 이틀이 가면, 약속한 날들은 무색해지고, 쉼표만
자꾸만, 그 시간을 쉬고 있다는 것을
네가 얘기를 시작하면 창밖은 더욱 생생한 바깥이 되어
짙어지는 그늘 속엔 계절이 지나는 소리, 바람 소리, 계속 너를 부르는 소리, 하지만
목을 졸리던 밤처럼, 단단한 돌더미처럼
시퍼런 어부림 속, 자맥질 소리, 수런거리는 소리, 계속 너를 부르는 소리, 하지만
모든 첫사랑은 결국,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통보였듯
잊고 살던 날씨를 챙기고, 오지 않을 추위를 생각하고, 가장 아끼던 표정을 꺼내 드는 순간, 문득 숨이 찬 내가, 아무것도 넣지 못한 짐을 바라보고 있을 때
화분에 심어둔 꽃말이 온통 피던 밤, 아침까지 불이 켜져 있던 방으로 찾아와
무서웠어, 그렇게 말한 건 사실 나였어
그런데, 다시 네가 돌아왔을 때
훔치고 싶던 밤을 지나, 알람도 없이 깨어난 아침 속에서
너는 내가 처음이라 말했다 나는 그게 사랑이라 말했어
―시집『이곳의 날씨는 우리의 기분』(여우난골, 2021)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 칼라 현상소 /진창윤 (0) | 2021.10.30 |
---|---|
목판화 /진창윤 (0) | 2021.10.30 |
이곳의 날씨는 우리의 기분 .김진규 (0) | 2021.10.27 |
검은 꽃 탄자니아 /함기석 (0) | 2021.10.27 |
여름이니까 괜찮아 / 이승희 (0) | 2021.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