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베라, 나는 아직도 울지 않네 /임혜신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1. 15.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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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라, 나는 아직도 울지 않네

 

임혜신

 

 

그리고 이상한 가을이 찾아와

초소처럼 서 있던 생선가게에 불이 꺼지고

선착장을 날던 드론들도 사라져

만년 시계*인 양 긴 불면에 드는 모래둔덕

가문 좋은 금속들만 시간의 페달을 유유히 달리는

이상한 밤이 찾아와

철 늦은 소금장미 들창에 피어나고

러시아풍 선술집에서 젖은 럼향기 풍겨올 때

나, 베라를 생각하네

내다 팔지도 않을 호박을 심고

잡아먹지도 않을 닭들을 키우던 눈물 많던 베라

애인 잃은 친구를 찾아가 제 것인 양 3년을 울던 베라

더 이상 크리넥스 집어 주기 싫다며 너도 나도 등 돌렸던

아더스 버트란드 얀의 ‘휴먼’

페이지 178쯤에서 만날 것만 같은 흰 얼굴과 빨간 볼

그녀가 러시아로 돌아간다던 밤을 생각하네

큰일이 났다고,

캄캄한 베링 해협같이 꿈틀대는 전화기 속에서

베라가 울지도 않던 밤을

 

 

* 텍사스 서부 산속에 설치되고 있는 이 시계는 초침이 일 년에 한 번 째깍거리고, 분침은 백 년마다 움직이며 천 년에 한 번 뻐꾸기가 소리를 내도록 설계되어 있다.

 

 

 

―시집『베라, 나는 아직도 울지 않네』(상상인,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