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우울한 노동자 /김하늘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1. 21.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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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노동자

 

김하늘

 

 

나는 사랑스러운 적이 없어

십일월이 오면 더욱 그렇다고 생각해

벨루가처럼 웃고 있지만,

나의 마음은 계속 당겨지고 있지

우주의 미아처럼 부유하지 않고서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쓸쓸한 사람이 쓸쓸한 나를 겪을 때,

우리는 구체적으로 울 수 있어

설거지할까 섹스할까

뭘 꾸물거려 이리 와

샅샅이 나를 핥아도 좋아

이것은 근절된 사랑,

오염된 물을 마시며

우리에겐 세상을 능멸할 힘이 없었지

 

서재의 꽃다발은 아름답게 썩어가는 중

 

날마다 향기를 체크하고,

죽어가는 식물에게 나는 냄새가

나를 때때로 질식하게 해

그래, 그 꽃은

내가 끔찍하게 미워하는 사람이 줬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놓고 갔어

쿨한 병신 같았지

골초는 염세적이라니까…

내 그럴 줄 알았어,

떼를 지어 울던 소녀들을 봤는데

누구도 나를 동정하지 않았지

인간은 본질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은

아픈 엔딩,

괴로운데 느린 엔딩,

노골적으로 다시 생각해도

사과를 쥐여주던 네 표정이

아직도 기억나

그게 아직도 나를 못 떠나는 이유일까

그때의 나는 좀 괜찮았을까

봐줄 만했을까

노끈에 목을 매던,

그때는,

인간미도 있었고

우울한 노동자였으니까

한 생이 하루 만에 끝나는 것 같아

절박할수록 죽는 게 만만찮아

가을밤에는

머릿속의 고요를 덜어내며

어쩐지 공손해진 마음이 들어서,

나이를 묻지 않고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랑스럽지 않아.”

“너는 무심해질 수 없어.”

“나는 맵고 반짝이는 사람이야.”

“너는 습지식물 같아.”

“내가 자주 울어서 그래···”

이맘때쯤 여자들의 대화는

기력이 없다

노려보지 않는다.

 

 

 

ㅡ『시산맥』(2021,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