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발코니의 시간 /박은영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2. 1. 28.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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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의 시간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공허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통유리 너머의 당신은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아슬아슬 이우는 봄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 있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한 구가 바람의 멍든 발을 매만져 준다

해 저무는 발코니,

세상이 한눈에 보인다

 

 

 

ㅡ시집『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실천문학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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