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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의 시간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공허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통유리 너머의 당신은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아슬아슬 이우는 봄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 있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한 구가 바람의 멍든 발을 매만져 준다
해 저무는 발코니,
세상이 한눈에 보인다
ㅡ시집『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실천문학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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