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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트럼펫
정선희
그 일이 있고 나서 땅바닥만 보고 걸었다
들리지 않는 곳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보이지 않는 유령을 클릭 클릭
단 한 번의 손짓으로
꿈의 잔액이 사라졌다
이삿짐을 부릴 집이 사라졌다
빛이 드는 곳에 놓아둘 식탁이 사라졌다
고개를 떨구고 핀 엔젤트럼펫
지렁이들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밖으로 나오면 죽는데 왜 자꾸 나오는 걸까
고무줄처럼 늘어진 무덤
내 앞에 와서 죽어 간 내 몸에서 나온 지렁이들
언제까지 피해 다닐 수 있을까
그 일이 있고 나서 모든 것을 아날로그로 바꾸었다
신용카드를 없애고 휴대폰 앱을 지우고
은행의 문턱을 꾹꾹 밟는 방향으로 역행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
들리지 않는 것들이 무서웠다
나는 조금 느리게 사는 방향으로 기울어 갔다
―계간『한국동서문학』(202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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