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기린을 찾아서 /이향숙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2. 2. 1.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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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을 찾아서

 

이향숙

 

 

껑충껑충 초원을 건너

날 만나러 왔었지

 

얼룩무늬 모피를 폼 나게 입고

새 학기 1-2 노트 표지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목을 길게 빼고 생각이 골똘해진 너는

앙증맞은 두 개의 뿔로 용맹을 가장했지

 

나는 믿었어

그 긴 앞다리를 뻗어 놀리는 머슴애들을 혼내줄 것을

서서 불면의 밤을 보내며 지켜준다는 것을

 

그땐 서로 눈빛만 봐도 알았어

그냥 좋았어

 

가끔 어린 심술이 몸에 낙서를 해도

깊은 눈망울로 지긋이 바라만 보았지

학기가 끝나갈 때쯤

긴 목엔 구멍이 나고 두 뿔은 너덜거리고

늘어뜨린 꼬리는 어디론가 사라졌지

 

아카시아꽃이 활짝 핀 날

동물원에서 긴 목을 빼고

일곱 살 계집아이와 눈 맞추는 너를 다시 만났어

관심 밖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발길을 돌렸지

 

그곳에서 네 곁을 떠난

오래된 시간과 잃어버린 날 보았어

 

우리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시산맥』(2021,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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