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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박은형
무지(無地)는 여름용 화두다
꽃치자 흰 내음도 무지의 일족이다
여름이면 채도 낮은 침묵을 설파하는 일몰을 기다린다
민무늬 감각을 어떻게든 얻어 보려고 조바심 한다
기억 안에 깊숙이 버려진 나쁜 장면을 벗겨 낸다면
흉터는 무지로 둘 것이다
애인이라는 지위가 우울한 애인들에게
선호도 낮은 이 절기를 권한다
초록 물갈퀴 우거진 중국단풍나무는 마른 잎을 매달고
색깔 빠지는 기분을 내년 봄까지 고수한다
식탁에 둘러앉은 일가족의 여름이 훤히 열려 있다
툭하면 밀려오는 낭떠러지를 수선해서 무언가를 지켜야만 산다
끝나지 않는 사랑을 발명한다 해도
몰(沒) 혹은 졸(卒)의 발목에 차이는 설계도는 오차가 없다
입술이 즐겁게 침묵할 오늘의 방향은 민무늬 감정
이별도 꽤 쏠쏠한 감정이 꽃치자에 붐빈다
기다리던 일몰이 겹치고 나는 조금, 무지를 얻었다
더운 바람에 뭉개진 얼굴에 무지가 들러붙는다
―『서정과현실』(2021, 하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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