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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벗어놓은 웅덩이 하나
유미애
가죽을 벗어놓기 위해 세상 끝에 닿은 짐승처럼, 쓸쓸할 때가 있지
많이도 떠돌았네
달고 쓴, 눈 먼 것들의 심장을 맛봤으니 꽃이 필 때마다 숨이 가빴지
뿌리를 갖고 싶었지 내가 피운 것이 꽃인지 눈물인지가 중요할까?
슬그머니 잡풀 사이로 숨어들었지만 절룩이는 온갖 종들이 모여들어
서
망초그늘에 세든 구덩이도 수시로 옮겨가야 했지
색색의 천을 기도처럼 묶고 떠나가는 배들
난들 배꽃 피는 동네에서 살아보고 싶지 않았을까
연두의 봄날을 가르며 오는 목선 한 척의 설렘을 잊었을까
삽 한 자루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나는
떠나는 발 풍문을 쫓는 귀 시간을 발라먹는 혓바닥이었을 뿐
웅덩이며 나뭇가지에 영혼을 흘리며 가는 노을에도 서러워져서
붉은 오지를 밝혀놓은 망초꽃대가 신성한 촛불처럼 느껴졌지
그 흔들림과 나란히 허리를 숙이면 최초의 사람이라도 된 듯 해
내가 날린 외로움의 씨앗 하나가 또 다른 나로부터 달아나던 중이
었을까?
이제와 신전 하나를 몸에 들인들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겠냐만
삽날의 두려움이 쪼그라든 심장을 두드리지만, 지금도 나는
꽃핀 웅덩이를 노저어가는 꿈을 꾼다네
―계간『문파』(202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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