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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족*을 읽다
조수일
얼굴 본 적 없는 미소년이
여린 새순 같은 무릎을 낮추고
허릴 굽혀 발을 씻긴다
얼굴 가득 살얼음이
고산의 슬픈 흔적처럼 거무스레 스며 있다
소년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수줍음이 얼굴 가득 일렁인다
찰방찰방 물과 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잠시
굳어버리곤 하는 공기를 희석시킬 뿐이다
천장 가득 흐릿한 조명이 지루한 듯 눈을 껌뻑인다
불빛 아래 물속,
꼼지락거리는 손놀림이
등 붉은 물고기 꼬리지느러미를 닮았다고 문득, 생각한다
바다의 어류를 본 적 없는 소년은
어디서 물고기의 몸놀림을 대대로 답습한 것일까
먼 옛날 유대 땅,
무릎 굽혀 발을 씻긴 눈 깊은 한 사내를 떠올린다
생각 없이 누운 나와의 괴리는 얼마쯤일까
너무 멀리 밀려와 버린,
너무 많이 잊어버리고 살아 온 내가
고산의 살얼음처럼 뒤척인 밤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섬김의 자세를 일컫는다.
―시집『모과를 지나는 구름의 시간』(시산맥,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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