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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사각형의 흙
정혜영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사람의 배경
직사각형의 구덩이 앞에서 희미하게 기다리고 있다
검은 얼굴 검은 정장을 하고
구덩이를 파던 삽을 흙더미 위에 내던지고 노란 장미를 한 손에 들고
커다란 그늘막 속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태양은 자꾸만 움직이고 그늘은 줄어들고 그림자들은 조금씩 자리를 이동한다
햇빛이 노랗게 구덩이 속을 비춘다
하얀 국화 꽃잎이 그녀를 향해 떨어지고 있다
직사각형의 흙이 소리를 내며 말라가고 있다
검은 리무진을 따라 버스를 탄 사람들
선글라스를 쓴 사람들이 두 손을 모으고 기다리고 있다
구덩이를 파던 포클레인 버킷이 흙더미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
슬픔으로 하나가 된
원수와 친지와 친구와 이웃과 원수가
―시집『이혼을 결심하는 저녁에는』(서정시학,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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