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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맑은 마지막 물빛으로 남아 타오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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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6003901
- ‘낙동강’에 등장하는 안도현(48) 시인의 아버지 안오성(1934∼1981)은, 후일 유명한 시인이 된 큰아들이 스물한 살이었을 때, 마흔여덟 살 나이로 일찍 돌아가셨다. 시인의 어머니 임홍교(1939∼ ) 여사가 우리 나이로 마흔세 살 때였고, 장남인 시인 밑으로 세 명의 동생이 초중고에 다니던, 참, 갑갑한 시절이었다.
“어머님께. 날씨가 무척 추워졌습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등지신 지도 벌써 다섯 달이 다 되어가나 봅니다. … 엄마,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우리를 위한 채찍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따금 술이라도 한 잔씩 마시면 아버지 생각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 우리라도 이 서러움을 이기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에는 언제쯤 내려오실 생각인지요 …. 1981년 12월 22일 도현 올림.”
임홍교 여사 칠순 기념으로 지난해 안도현 시인 부부가 펴낸 타블로이드판 ‘安氏年代記’에 따르면, 큰아들이 보낸 이 편지를 어머니는 수없이 읽고 또 읽었고, 읽을 때마다 흘린 눈물은 강을 이루었고, 어머니는 서랍에 이 편지를 오랫동안 보물처럼 간직해 왔다. 안도현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 고향 땅 경상도 예천에서 떠나와 전라도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안도현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대구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또래들이 참여하는 문예 백일장을 모두 휩쓸던,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아는 ‘스타’였다. 그는 자신의 문학 실력만으로도 서울의 대학에 특기생으로 당연히 진학하리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의 암초에 걸려 지방의 문학 명문, 전라북도 익산(이리)에 소재한 원광대 국문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진학하게 된 거였다. 그런 운명이 아니었다면, 경상도 낙동강과 전라도 만경강이 어찌 만날 수 있었을까. 그는 우선, ‘낙동강’으로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1981년 당선됐다. 그는 “또래보다 일찍 고향을 떠났고 더욱이 멀리 전라도에서 살고 있을 때여서, 오히려 낙동강을 선택했던 것 같다”고 수화기 너머에서 말했다.
안도현이 태어난 곳은 낙동강으로 흘러들 내성천이 지나가는 강변, 경북 예천 소망실이라는 마을이었다. 태어난 이듬해 부모가 예천과 경계를 이룬 안동 풍산으로 이사를 가 ‘풍산국민학교’를 다니다가 일찌감치 사촌들을 따라 대구로 유학을 갔다. 그의 시 ‘풍산국민학교’가 재미있어서 예천에 내려간 김에 안동 풍산초등학교를 둘러보았는데 시에서처럼 아직도 굵은 플라타너스가 운동장 가운데 남아 있었다.
“고 계집애 덧니 난 고 계집애랑/ 나랑 살았으면 하고 생각했었다 1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 목조건물 삐걱이는 풍금소리에 감겨 자주 울던 아이들/ 장래에 대통령 되고 싶어 하던 그 아이들은/ 키가 자랄수록 젖은 나무그늘을 찾아다니며 앉아 놀았지만/ 교실 앞 해바라기들은 가을이 되면 저마다 하나씩의 태양을 품고/ 불타 올랐다 운동장 중간에 일본놈이 심어 놓고 갔다는/ 성적표만한 낙엽들을 내뱉던 플라타너스 세 그루/ 청소시간이면 나는 자주 나뭇잎 뒷면으로 도망가 숨어 있었다”(‘풍산국민학교’ 부분)
성장한 곳이 풍산이라고는 해도, 외가와 큰집이 있는 내성천변은 시인의 유년기 정서를 형성하는 중요한 공간이다. ‘낙동강’의 진술처럼, 시인의 아버지가 내성천 어부였던 것은 아니다. 그냥 시적인 메타포일 따름이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는 그물 한 장만 주셨다고 했는데, 사실 시인의 부친은 경기도 여주에서 수박농사를 짓다가 돌아가셨다. 4형제의 장남인 도현의 어깨는 무거웠다. 그래서 그해 여름, 아버지가 밭에 남겨 놓은 수박들을 따서 트럭에 싣고 조수석에 앉아 영등포 청과물 경매시장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때 그는 이렇게 썼다.
“타이탄 트럭 하나 가득 달을 싣고/ 아버지의 친구 張氏 아저씨를 따라 서울로 가는 길은/ 어두웠다// 장씨 아저씨는 여관에 들자 코를 골며 주무시고/ 여관방 쇠창살에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영등포 청과물 시장 새벽 경매가 끝나면/ 리어카에 실려 서울 시내 골목 위로 둥그렇게 떠오를/ 그것은 아버지가 키우다 만/ 붉은 달이었다// 나는 그 달을 보며/ 너만 달이냐,/ 너만 달이냐,/ 창에 걸린 붉은 달에게/ 눈물을 훔치며 삿대질을 달에게 해대었다”(‘붉은 달’ 부분)
이렇게 슬픔을 옮기기만 해도 시가 되던 시절이 안도현에게도 있었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았던 아버지’가 수박 몇 통보다 더 값진 자산을 남겨준 셈이다. 내 아버지도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많은 자산을 남겨주었지만, 나는 불행하게도 시를 쓰진 못했다. 아버지가 남겨준 ‘그물’이 시인에게 그리 큰 도움을 주진 못한 모양이다.
내성천은 경북 봉화에서 발원한 낙동강의 지류다. 하루 전, 서울에서 예천까지 단숨에 내려와 내성천이 휘돌아 낙동강으로 합류하기 직전의 ‘회룡포’를 다녀왔는데, 말 그대로 강이 마을을 용처럼 휘감고 돌아가는 곳이었다. 어제는 날이 한참 어두웠다. 예천 읍내에 들어와 ‘태평추’ 집을 찾다가 포기한 채 여관에 먼저 짐을 풀었는데, 정작 그 여인숙 옆에 ‘태평추 전문’이라는 글씨를 유리창에 붙인 ‘동성식당’이 보였다. 식당 주인 신말자(60)씨는 직접 메밀묵을 쑤어 이 자리에서 20년째 태평추를 만들어 왔다고 했다.
“어릴 적 예천 외갓집에서 겨울에만 먹던 태평추라는 음식이 있었다// 객지를 떠돌면서 나는 태평추를 잊지 않았으나 때로 식당에서 메밀묵무침 같은 게 나오면 머리로 떠올려보기는 했으나 삼십년이 넘도록 입에 대보지 못하였다// 태평추는 채로 썬 묵에다 뜨끈한 멸치국물 육수를 붓고 볶은 돼지고기와 묵은지와 김가루와 깨소금을 얹어 숟가락으로 훌훌 떠먹는 음식인데 눈 많이 오는 추운 날 점심때쯤 먹으면 더할 수 없이 맛이 좋았다// 입가에 묻은 김가루를 혀끝으로 떼어먹으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바다며 갯내를 혼자 상상해 본 것도 그 수더분하고 매끄러운 음식을 먹을 때였다”(‘예천 태평추’ 부분)
오늘 내성천변은 환하고 맑다. 시인의 둘째 동생 태현(42)씨가 안내하는 중이다. 그는 시인의 동생답게, ‘문경새재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살고 있었다. 어젯밤, 전주에 살고 있는 시인의 소개로 그의 동생을 만나 맥주잔을 기울이며 시인의 내밀한 가족사에 대해 많이 들었던 터였다. 그중 으뜸은 시인의 장남 역할이었다. 명절 때 형제들이 예천에 모이면, 그 형제들은 오랜만에 내려온 친구를 찾는 친구들조차 만나지 않고 집안에만 틀어박힌다고 했다. 형제들끼리 술 마시는 재미가 훨씬 더 좋은 것인데, 그 중심에 안도현이라는 듬직한 장남과 형이 있었다. 어머니는 술 마신다고 만날 타박하면서도, 이날을 위해 가까운 군부대 ‘충성마트’에 가서 싼값으로 소주와 맥주를 박스째 떼어온다고 했다.
지난해 그의 모친 안홍교 여사 칠순신문 발행인도 그가 맡았는데, 이 신문에는 가족들이 단합해 일제히 임여사를 공격하는, 언론 본연의 소임을 다하는 비판적인 기사들이 실려 있다. 이를테면, 큰아들은 “방학을 맞아 집으로 가면 키우던 닭을 잡아 맏이인 나를 몰래 부엌으로 불러 큼지막한 닭다리를 어서 먹으라고 재촉하는” 편애를 일삼는다고 털어놓았고, 막내아들은 연애시절 만났던 처자에 대해 지금의 아내에게 알려주는 임여사의 그 ‘자상함’에 대해 비판하는 식이다. 마흔세 살에 혼자 된 그 임여사가, 아들의 시인 줄도 모르고, 먼저 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아들 집 벽에 걸린 글귀를 적어 오랫동안 가방에 넣고 다녔다는 특종이, 임여사 칠순기념신문 우측 상단에 젊은 시절 약혼사진과 함께 실렸다. 그 시는 큰아들이 1991년에 펴낸 ‘그대에게 가는 길’(푸른숲)이라는 시집에 수록된 시인데, 시인 아들은 엄마에게 짐짓 볼멘소리를 한다. 어떻게 아들 시인 줄도 모를 수 있느냐고. 어쨌든, 임홍교 여사는 저 세상의 남편에 이렇게 편지를 썼다.
“그대에게 가는 길이/ 세상에 있나 해서// 길 따라 나섰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끝없는 그리움이/ 나에게는 힘이 되어/ 내 스스로 길이 되어/ 그대에게 갑니다”(‘나그네’ 전문)
시인의 동생은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내성천을 바라보며 “이 뚝방길을 아버지 자전거 뒤에 타고 달린 적 있는데 그때 아버지는 ‘처녀 뱃사공’을 불렀다”고 말한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며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로 이어지는 그 노래. 시인의 데뷔작 ‘낙동강’이 거저 나온 게 아니라 분명 DNA의 과학인 것을, 실감하겠다. 그 시인은 전라도 익산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다가 ‘높고 외롭고 쓸쓸한’ 한 시절을 보냈고, 지금은 전주에서 살고 있는데, 그가 ‘낙동강’으로 데뷔한 뒤, 다시 3년이 흘러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전라도 ‘만경강’을 배경으로 쓴 시가 당선됐다.
시인은 “나의 20대 초반이 80년대였고, 전라도로 상징되는 역사적 상황이 안일한 서정시만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며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한국의 역사적 현실이 오순도순 같이 모여 살지 못하던 내 가족의 상황과도 흡사했다”고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시인으로 인하여, 낙동강과 만경강은 특정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네 가슴속에 하나로 흐르는 강이 되었다.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서울로 가는 전봉준’ 부분)
선임기자 jhoy@segye.com
낙 동 강
저물녘 나는 낙동강에 나가
보았다, 흰 옷자락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 오래 정든 하늘과 물소리도 따라가고 있었다
그 때, 강은
눈앞에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어느 날의 신열(身熱)처럼 뜨겁게,
어둠이 강의 끝 부분을 지우면서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낡은 목선을 손질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그물 한 장을 주셨다
그러나 그물을 빠져 달아난 한 뼘 미끄러운 힘으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치는 은어떼들
나는 놓치고, 내 살아온 만큼 저물어 가는
외로운 세상의 강안(江岸)에서
문득 피가 따뜻해지는 손을 펼치면
빈 손바닥에 살아 출렁이는 강물
아아 나는 아버지가 모랫벌에 찍어 놓은
발자국이었다, 홀로 서서 생각했을 때
내 눈물 웅얼웅얼 모두 모여 흐르는
낙동강
그 맑은 마지막 물빛으로 남아 타오르고 싶었다
■안도현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원광대 국문과 졸업.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이,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등.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이수문학상, 윤동주상 수상.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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