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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고향에서는 평등합니다. 젊었을 때는 고향이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일지 모르지만, 늙어가면서는
욕망의 키를 재다가 지위고하도 없고 모두 평등해져요.”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일지 모르지만, 늙어가면서는
욕망의 키를 재다가 지위고하도 없고 모두 평등해져요.”
관련이슈 :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20090409003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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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시인의 고향마을에서 구병산 계곡을 향해 가는 길목의 먼 산자락에 산벚꽃이 등불처럼 환하다.
시인은 산을 오르다가 “중동이 썩어 꺾인 늙은 산벚나무가/ 곰 발바닥처럼 뭉툭하게 남아 있는 가지에 꽃을 피워” 내는 형상을 보고, “서로 가려운 곳 긁어주고 등 비비며 놀다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 곰은 산벚나무 뒤로 숨고 산벚나무는 곰 뒤로 숨어/ 그 풍경이 산벚나무인지 곰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고 썼다. 시인은 그 산벚처럼 숫기가 없다.
그는 보은읍에 나와 손을 기다리다가 읍이 아니라 당신 집으로 내비게이션을 켜놓고 가는 중이라고 전했더니,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가 외지의 불청객과 겨루기(겨루는 게 아니라 자신의 평화를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싸움이다) 위해 숨을 가다듬는 중이었을 게다.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 시인의 집은 통나무와 흙으로 지어진, 주변에서도 돋보이는 아담한 집이다. 집 옆으로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고 버드나무 옆에는 오래된 산수유나무가 가득 꽃을 매달았다. 시인은 일꾼을 거의 쓰지 않고 이 집을 직접 지었는데, 자그마치 5년이나 걸렸다. 동네 노인들은 그를 만나면 입버릇처럼 언제 집이 완성되느냐고 물었고, 그들 중에는 집이 끝나는 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다.
시인은 대학(경북대 독문과)을 졸업하고 잠시 객지에서 방황하다가 이내 고향에 들어와 한 살 아래 고향 여자와 결혼해 아이들 낳고 지금까지 붙박이로 살아왔다. 아내는 인근 고등학교 역사교사이고, 시인은 여러 가지 일을 하긴 했지만 지금은 시만 쓰는 전업이다. 해외는 나가본 적 없고 몇 년 전 제주 작가회의 행사에 참여하느라 딱 한 번 비행기를 타보았다. 중국 여행 스케줄이 잡힌 적도 있었지만 출국 이틀 전 스스로 포기해버렸다. 운전면허가 없는 그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인근 상주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나갔다가 터미널에서 바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일. 한가한 시골 버스에 앉아 흔들리며 오고가노라면 마음이 평정된다고 했다. ‘늙은 산벚’이 따로 없다.
“이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병이 깊어 이제 짐승이 다 되었습니다/ (…)/ 가만, 땅에 엎드려 귀대고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종종 세상의 시험에 실패하고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번씩 세상에 나아가 실패하고 약을 먹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리우면 당신들의 세상 가까이 내려갔다 돌아오기도 한답니다/ 지난번 보내주신 약꾸러미 신문 한다발 잘 받아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소식 주지 마십시요/ 병이 깊을대로 깊어 이제 약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이 곳에 숨어산 지 오래 되었습니다’ 부분)
어떤 사연이 있어 젊은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와 두문불출, 살아왔을까. 시인은 끝내 구체적인 사연은 말하지 않았다. 그냥 돌아왔을 뿐이라고 했다. 그의 시로 지난 정서의 흐름을 어림짐작할 따름이다. 처음에는 사진도 찍기 싫어했다. 내려온 손님을 맞기는 하되, 신문에 얼굴 내미는 것, 마뜩치 않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거만한 것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지극히 겸손한 태도와 말투여서, 민망하고 미안했다.
◇송찬호 시인이 수행을 하듯 5년 동안 찬찬히 지어올린 집 앞으로 물이 오르기 시작한 수양버들 가지가 늘어져 있다.
옆에 있는 이에게 조근조근 이야기하듯 편안하게 풀어놓은 시편이다. 하지만 송찬호의 시들이 모두 이렇게 서사적이고 친절한 건 아니다. 오히려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사변에 능하다. 이를테면 “장지의 사람들이 땅을 열고 그를 봉해 버린다 간단한/ 외과수술처럼 여기 그가 잠들다/ 가끔씩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그곳에 심겨진 비명을 읽고 간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같은 그의 첫 번째 시집 표제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가 전형적이다. 누군가는 이 시를 두고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했고, 이즈음 미래파 시의 뿌리라고도 했다. 어쨌든 나는 이런 시도 괜찮지만, ‘봄밤’ 같은 시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문가에 고등어 몇 마리 슬며시 내려놓고 간 그 친구, 눈물 난다.
저물녘, 보은읍으로 나와 ‘신라식당’에 들었다. 황태를 넣고 청국장 냄새가 나는 된장을 풀어 끓여낸 황토 색깔 국이 사람을 따뜻하게 위무하는 맛집이다. 시인은 술이 조금 들어가고 더러 세상 이야기를 섞어가자 조금씩 편안해지는 낯빛이었다. 그는 주변에 “나쁜 사람도, 나쁜 환경도 없다”고 했다. 그가 스스로 발설하는 그 비결, 혹은 이유란, 쓸쓸하다. 욕망을 지니지 않으면, 특별히 요구하지 않으면, 부딪치지 않으면, 반작용이 일어날 리 없다는 거다.
“그해 봄 결혼식 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년 삶(…)//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얬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래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찔레꽃’ 부분)
왜 그는 일찍 귀향해 숨어 살기로 작정했을까. 찔레꽃 사랑 때문에? 시인은 묵묵히 ‘신비주의’를 고수한다. 그는 막연하게 말했다. “누구나 고향에서는 평등합니다. 젊었을 때는 고향이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일지 모르지만, 늙어가면서는 욕망의 키를 재다가 지위고하도 없고 모두 평등해져요. 나는 이걸 고향에서 뼈저리게 느낍니다.” 시인은 다음날에도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젊은 날, 그때 내가 제단에 바칠 수 있던 건/ 오직 그 헐벗음뿐, 어느새 내 팔도 훌륭한 양초로 변해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어깨에 뜨겁게 흘러내리는 무거운 촛대를 얹고”(‘촛불’ 부분)
그날 저녁 이어진 자리는 보은의 맥주 집이었는데, 소읍의 금요일 밤 술집은 너무 뻔해, 그곳에서는 아무리 활동량이 적은 숫기 없는 시인이라지만 어쩔 수 없이 지인들을 쉬 만날 수밖에 없었다. 대학 동기이자 그 역시 문학세례를 받은 친구, 그 벗은 얼핏 지나가는 말로 송찬호가 광부로도 일했다고 했는데, 시인은 그의 허벅지를 지그시 눌렀다. 인근에 문경 탄광이 있었으니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날 술값(생맥주 6000㏄ + 마른안주)은 동석했던 다른 친구가 냈다. 그 벗은 미당문학상 때도, 김수영문학상 때도, 서울에 올라가 시상식에 참석했단다.
“우리 동네는 충북과 보은의 동남쪽 끝머리에 있다. 이곳에서 동쪽을 붙잡고 자동차로 사오 분 가량 줄달음치면 경북을 잇는 도계와 만나게 되고 거길 한 발 넘어서면 상주 화서 땅의 시작이다. …내 마음은 거기서 그치질 않고 상주를 지나 문경 예천 영주 너머 영동산악 어딘가를 헤매곤 하는데, 그것은 그런 오랜 방황과 모색 끝에 오래도록 책들이 썩지 않고 노래가 죽지 않는, 시의 천축국에 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열망에서인 것이다.”
시인이 세 번째 시집 ‘붉은 눈, 동백’의 자서에 적은 말이다. 9년 만에, 그의 네 번째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이달에 나온다. 이번 시집에서는 과연 ‘시의 천축국’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섰을까. 세 번째 시집으로는 김수영문학상과 동서문학상을 받았고, 지난해에는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편 ‘가을’과 ‘늙은 산벚나무’로 미당문학상까지 받았으니, 그는 ‘시의 천축국’으로 틀림없이 가는 중인가. 그는 “시는 내가 경영할 수 있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니까…” 쓴다고 했다. 이런 그의 시는 마지막으로 또, 어떤가.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꽃의 향기를 구부려 꿀을 만들고/ 잎을 구부려 지붕을 만들고/ 물을 구부려 물방울 보석을 만들고/ 머나먼 비단길을 구부려 낙타등을 만들어 타고 가고/ 입 벌린 나팔꽃을 구부려 비비꼬인 숨통과 식도를 만들고/ 검게 익어가는 포도의 혀 끝을 구부려 죽음의 단맛을 내게 하고/ 여자가 몸을 구부려 아이를 만들 동안/ 굳은 약속을 구부려 반지를 만들고”(‘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부분)
선임기자 jhoy@segye.com
늙은 산벚나무
앞으로 늙은 곰은 동면에서 깨어나도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는기라
동굴에서 발톱이나 깎으며 뒹굴다가
여생을 마치기로 했는기라
그런데 또 몸이 근질거리는기라
등이며 어깨며 발긋발긋해지는기라
그때 문득 등 비비며 놀던 산벚나무가 생각나는기라
그때 그게 우리 눈에 딱, 걸렸는기라
서로 가려운 곳 긁어주고 등 비비며 놀다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
곰은 산벚나무 뒤로 숨고 산벚나무는 곰 뒤로 숨어
그 풍경이 산벚나무인지 곰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우리는 한동안 산행을 멈추고 바라보았는기라
중동이 썩어 꺾인 늙은 산벚나무가
곰 발바닥처럼 뭉특하게 남아있는 가지에 꽃을 피워
우리 앞에 내미는기라
■송찬호
▲1959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경북대 독문과 졸업
▲ ‘문학과지성’이 신군부에 의해 폐간되자 제호를 바꾸어 무크지로 발행되던 ‘우리시대의 문학’ 6집으로 1987년 등단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10년 동안의 빈 의자’ ‘붉은 눈, 동백’ 등
▲김수영문학상, 동서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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